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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이 낳는 생명
2006.03.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린도후서 4장 11∼12절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열매 맺듯
주님의 죽음으로 얻은 귀한 생명
고난을 통해 굳건해지는 신앙


 우리 한국 속담에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추운 지역에 있는 나라들 가운데 선진국이 많고 따뜻하고 온화한 환경에 있는 나라와 민족들이 대부분 후진국이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추운 나라에서는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애를 쓰지만 자연환경의 복을 받은 온화한 나라에서는 애쓰고 힘쓰지 않아도 먹고 살수 있으니까 자연히 사람들이 게을러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부르짖어 외치기 때문에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예수님은 죽음과 처절한 싸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을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죄악의 잔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 잔을 들여다보니 온갖 더러운 죄가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을 마시라고 합니다. 모든 인류의 죄악의 잔을 다 짊어지게 된 주님은 고뇌하십니다. 할수 있으면 잔을 옮겨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로 44절에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사들은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피하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구멍을 통해서 피가 흘러나오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셨습니다. 죄악의 잔을 앞에 둔 주님께서는 몸부림쳤고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갈등 속에서 기도하는데 땀이 피로 변할 정도였습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원수들이 조롱했습니다. 주님이 기도만 하면 열 두 군단 되는 천사를 보내어서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주님이 참으신 것은 주님이 죽으셔야 우리가 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로 54절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계시듯이, 주님은 내려올 수 없는 분이 아니라 능히 내려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택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택하신 길은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인류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사망을 통하여 주님께서 생명을 낳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31절로 32절에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죽음과 모욕과 고통을 택하시고 삶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과 고통에서 해방되고 오늘날 영원한 소망과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에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사흘만에 다 청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무덤에 들어가시고 음부에 내려 갔으나 사흘만에 사망과 음부를 다 극복하시고 승리하시고 일어나시므로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영원한 생명의 원천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과 음부는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을 낳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2. 왜 바울인가?

 

  다메섹 도상에서 선택을 받은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가 되고 성경의 3분의 2를 기록한 신약성경의 저술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지 않으셨으면 오늘날 기독교가 온 세계에 편만하게 전파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유럽과 소아시아에 복음이 증거되고 이것이 소아시아와 유럽과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바울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생명을 낳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도 보다도 바울은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죽음의 멍에를 짊어지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바울 선생은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나타냈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마게도니아를 통하여 온 유럽에 전파되고 소아시아를 통하여 아시아 전체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바울 선생이 참담한 사망의 고통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통계를 보면 1996년 국민소득 1만불이 넘어서면서 교회 출석률이 40%로 떨어졌습니다. 성도들 반 이상이 주일에 들로 산으로 사업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기도원도 마찬가지 입니다. 국민소득 만불이 되고 난 다음 기도원 출석률이 30%로 떨어져서 시설이 열악한 기도원은 문을 닫아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 교인 출석률이 가장 좋았던 때는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온 국민이 어마어마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 교회 출석률은 95%였습니다. 고난이 닥치자 그 영혼에 구원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사람은 편안하고 배부르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편안해지면 하나님의 나라와 신앙은 악세사리로 변화되고 본업이 안됩니다. 부업이 됩니다. ‘믿어도 좋고, 안믿어도 좋고’하는 식의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와서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부업이던 신앙이 본업이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벽에 주님께 나와 부르짖게 되고 고통스러우니까 금식하고 철야하고 기도원에 가서 외치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란 사망의 세력이 오히려 변화되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돌아서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는 귀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마귀를 따라가고 세상과 탐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세상에서 돌아서 하나님을 쳐다보고 생명의 원천 되시고 구원의 능력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하게 되어서 오히려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역설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로마시민이었습니다. 산헤드린 회원이었고 하나님의 엄청난 묵시와 계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의 이유와 원리를 설명할수 있는 사도였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하나님은 교만을 멀리할 고통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 가시 덕분에 자만심이 깨어져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절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 같은 분이 세 번 주께 부르짖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세상에 약할 때 강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부업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은 신앙이 약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고난 당하고 괴로움을 당해 세상 등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믿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은 신앙이 강합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품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더 많은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더 많은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많이 흘러나려면 많이 깨뜨려지고 많은 고난 가운데 처해야 됩니다. 주님이 크게 사용하는 사람은 큰 고난을 통과하게 됩니다. 깨어지고 터짐을 통해 온 전신을 다하여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시민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보면 한때 목사님이 백인들의 위협으로 두려움에 떨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몽고메리 버스 스트라이크(Montgomery bus boycott)’를 주도하고 있을 때 많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테러와 폭파 협박을 해왔습니다. 그들의 협박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던지 킹 목사님이 두려운 마음에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떼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 기도나 해보고 손을 떼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습니다. “마틴 루터 킹,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보라 세상 끝날까지 이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결코 너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테니 싸움을 계속하라”고 말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 평등권리를 주장하기 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시민인 흑인들은 큰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백인과 함께 버스를 타지 못하고 식당에서도 백인과 함께 섞여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을 당하고 슬픔을 겪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자녀 세대에서는 결코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살게 하겠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일어난 것입니다. 킹 목사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사라지고 어떤 어려움에도 의연히 대처하겠다는 용기가 넘쳤습니다. 결국 그는 백인들의 위협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흑인 해방운동과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많은 위협과 고통을 감례하면서 흑인해방운동을 부르짖었고 결국 총에 맞아 죽었지만 오늘날 흑인들은 그로 말미암아 인권,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 이제는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대우를 법적으로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은 미국 대통령까지 축하하고 미국에서는 공휴일로 제정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온 이 역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해방과 자유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자유와 해방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사망을 통해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자녀들이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면 그 고난을 통해서 위대한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슬픔과 고난과 눈물을 흘린 사람에게 은혜로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3. 가시떨기에 붙은 불

 

  모세가 광야에서 만난 가시떨기는 불이 붙은 채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가시떨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가시떨기라는 것은 목재로도 쓸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가시넝쿨입니다. 가시넝쿨에 불이 붙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시넝쿨 같은 사람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다 탐심과 욕심의 가시떨기 속에서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마귀를 바라보고 세상을 따라간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와 하나님 성령의 불이 붙기 위해서는 고통이 다가와야 됩니다. 시편 9편 13절에 “야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라는 말씀과 같이 사망의 문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38장 17절에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큰 고통이 온 것은 내게 평안을 주기 위해서 고통을 주신 것입니다. 나를 죽이려고 고통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결과 내가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찾으면 주님 주시는 평안 가운데 우리가 머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자로 칭송받는 성 프란시스는 본래 부잣집 아들로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또래의 청년들과 함께 허랑방탕하고 술에 취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큰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세상가는 길을 돌이키고 하나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주님께 간절히 찾고 부르짖은 결과, 중생하고 변화되고 나중에 그는 온 일생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는 성자가 된 것입니다.

  유명한 문학가 존 밀턴도 실명 후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은혜를 받아 ‘실락원’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썼습니다. 미국 흑인노예해방에 큰 영향을 미쳤던 ‘엉클 톰스 캐빈’이라는 책을 지은 스토우 부인도 고난을 통해 승리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미국 흑인해방운동을 문학적으로 격려한 분이 스토우 부인입니다. 스토우 부인이 지은 책은 미국에 널리 읽혀진 명작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도 이 책을 읽고 노예해방에 나설수 있는 결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딸을 하나 낳았는데 금지옥엽 귀한 딸이 갑자기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스토우 부인은 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절망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흑인들이 생각 났습니다. 자신은 딸이 죽어서 이별하여 이렇게 슬픈데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노예로 끌려와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녀들은 자녀대로 뿔뿔이 노예로 팔려나가 생이별의 슬픔을 가슴에 쓰리게 안고 사는데 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 딸이 죽고 난 다음 딸의 죽음을 통해서 흑인은 해방되어야 되고 노예제도는 철폐 되어야 된다는 깊은 신념으로 그가 책을 지은 것이 바로 ‘엉클 톰스 캐빈’인 것입니다. 이때부터 스토우 부인은 흑인들이 더 이상 비참하게 이별하지 않도록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출간되므로 백인들이 흑인의 처지를 공감하고, 노예 해방 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고통을 통해 생명을 낳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위대한 과학자 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는 책은 세계적인 원자력 전문가 정근모 박사의 자서전입니다. 정근모 박사는 세계적인 원자학자입니다. 그는 교회의 장로이며 과기처 장관도 역임했고, 현재는 명지대 총장으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국제 해비타트운동 한국지부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최고의 석학들이 모인다는 한림원 원장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정근모 박사는 어릴 때부터 얼마나 머리가 좋았든지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20대에 미국에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고, 25세에 미국 명문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정근모 박사에게 ‘꼬마 교수’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있었습니다. 아들 하나가 어려서부터 병으로 고생해서 큰 수술을 6번이나 했습니다. 나중에는 정근모 박사가 신장 하나를 떼어서 아들에게 주었지만 결국 아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의술이 발달하고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지만, 자식의 병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깨어져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정 박사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인생의 고통스런 경험이 때로는 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련이 없었더라면 나도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들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훈으로 “시련을 만나거든 기도하십시오”라는 말을 합니다.

  가시떨기같은 탐욕에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고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시련이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정근모 박사와 저는 친한 친구입니다.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얼마나 신앙심이 깊고 하나님께 겸손하고 모든 것을 맡겨서 주님을 섬기는 훌륭한 분인 것을 느끼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그로 하여금 가시넝쿨 속에서 성령의 불길이 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가시떨기 속에서 구원의 불이 붙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고난 즉 사망의 세력이 압박해야 합니다. 고통속에서 구원의 불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페스탈로치는 “고난은 풍족을 가져온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져온다. 만일 행복하였더라면 나는 결코 성숙되지 않았을 것을 고난이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말했으며 독일의 격언중에도 ‘고난은 기도의 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스위스의 법학자요, 철학자인 힐티는 말하기를 “대개 행복한 때보다도 고난의 때에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때보다 고난에 처한 때가 신앙에 더 좋은 때”라고 말했습니다.

  탐욕의 가시넝쿨 속에 사는 우리가 순수한 신앙의 불길을 가슴에 품기 위해서는 강력한 육신의 고통이 다가와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욕심의 가시넝쿨 속에서도 회개하게 되고 반성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과 고통의 위협이 가해질수록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생명의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그 생명의 은혜로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됩니다. 어느 병실에 걸려있는 시 한편을 나누면서 말씀의 끝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친구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 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하고 가난한 사람을 동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깨어져서 세상으로 가는 발걸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가시떨기 속에 구원이 들어오고 성령의 불길이 타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받는 것을 유익으로 생각하고 감사하고 그 기회에 회개하고 깨어지고 더욱 주님께 돌아오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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