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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나와 보이는 나
2005.10.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린도후서 4장 16절 ∼ 5장 1절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속사람이 살아야 하나님과 교통 이루어져
영으로 사는 사람, 새로운 자화상 갖고 변화된 삶 살아야


 하나님이 에덴에서 사람을 지을 때 흙으로 사람을 빚어 놓았습니다. 완전한 사람 모습이었지만 생명은 없었습니다. 그 코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찬양을 하고 자연만물을 보고 기뻐 뛰며 춤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 속에 하나님의 생령을 받아들인 생명의 영혼입니다. 성경 에스겔 37장 1절로 10절에 놀라운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에스겔을 거대한 골짜기로 데려갔는데 그 속에 마른 뼈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에스겔아 이 뼈들이 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기가막힌 질문이라 에스겔은 “저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라고 했고, 다시 하나님은 “그러면 이 뼈들로 명하여 사람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니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심줄이 덮여지고 살이 채워지고 가죽이 덮여서 거대한 군중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생기가 들어가게 하시자 사방에서 생기가 불어 들어와 그 속에 들어가니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람의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어도 생기가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생기 즉,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신 영이 떠나면 죽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 속사람인 영혼의 실상

 

 안 보이는 나 즉, 영혼의 실상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영혼이 떠나면 보이는 나인 육체는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의논하여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팔았습니다. 일부는 숨겨 놓고 남은 돈을 베드로에게 가지고 와서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성령을 속인 죄로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사람은 영혼이 들어있을 때 살아있지 영혼이 떠나가면 죽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바울선생은 몸을 떠나 주 예수님과 같이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생각하고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소똥 밭에 굴러도 이 땅에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 실상을 너무나 잘 압니다. 우리의 몸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구원받은 영혼은 너무나 아름다운 천국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울은 또 빌립보서 1장 21절로 23절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죽는것도 유익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때 사는 것만 유익이고 죽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 믿는 사람은 사는 것, 죽는 것 모두가 우리에게 유익이니 손해날 것이 없습니다. 살아도 좋고 죽으면 더 좋고 이런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바울은 “더욱 좋은 것은 내가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더욱 좋은 일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사는 것도 좋지만 죽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말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사는 것이 좋고 죽는 것은 나쁘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는 것도 좋지만 죽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사람이 나이 들면 아주 시들은 꽃과 같이 쭈글쭈글 해집니다. 결국 우리는 육체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슬퍼할 것이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육신은 잠시 잠깐이지만 눈에 안 보이는 영혼은 영원불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2절로 24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한 부자가 세마포 옷을 입고 자색 옷을 걸치고 밤낮 잔치하며 주지육림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영혼의 불멸도 믿지 않았습니다.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며 살았습니다. 그집 대문간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집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몸은 헐고 병들어서 문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추우니까 개를 끌어안고 자므로 개들도 그를 좋아해서 헌데를 핥아 주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연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육체는 무덤에 던져졌으나 그 속사람은 천사에게 받들여 낙원에 들어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했습니다. 속사람은 천사들에게 받들여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거창한 장례식을 치르고 호화로운 묘를 만들었지만 그 속에 그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낙원을 쳐다보니 거지 나사로가 영화로운 사람이 되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으로 냉수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서늘케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기에 냉수  한 방울만으로라도 혀를 서늘케 해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여기에 분명히 나사로는 그대로 나사로고 부자는 그대로 인격을 가지고 간 부자였습니다. 이목구비가 다 있고 그들의 희노애락 감정도 그대로 있고 느낌도 그대로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씀을 배반한 사람은 음부에 떨어져서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천국에서 기도하는것 조차 응답하여 주십니다. 저는 47년간 목회하면서 많은 초상집에 갔는데 부모가 예수를 믿고 자녀들이 예수를 안 믿어도 부모가 세상을 뜬 후 자녀들이 거의 100% 예수를 믿고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볼 때 음부에 내려간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아도 구원받아 천당에 간 사람의 호소는 천국에서도 주님이 들어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우편에 계시면서 주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2. 왜 거듭나야 하는가?

 

 인간이 타락하자 영혼이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었다는 것은 교통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사랑한다 해도 대답하지 않고 미워해도 분노하지 않습니다. 교통이 끊어진 것입니다. 영혼이 죽으니까 영인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담의 자손들로 영혼이 죽어서 태어나 영혼이 죽은대로 육체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육체에 대한 것은 알지만 영에 속한 것은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천국도 지옥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우습게 생각하고 무식하다고 생각하고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적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가 없고 영적세계와 전혀 교통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8장 4절에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고 에베소서 2장 5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했으니 모든 사람들이 범죄로 말미암아 허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육체만 가지고 삽니다. 육체만 가지고 사니 감각적인 사람이 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질수 있는 것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사람은 욕심만을 따라서 삽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 삽니다. 또한 육체에 속한 사람은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무엇이든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려고 하고 그 이상 하나님의 계시적인 지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육체를 따라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 사라질 것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만 취하고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빈손들고 영원히 버림을 당케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고야 이런 큰 기사와 이적을 행할 수가 있나이까?”
 이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눈을 뚫어지게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주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거듭나다니요. 그럼 나 같은 이 늙은 노인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람이란 것은 영이란 말과 똑같은 프뉴마토스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이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영이 거듭난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속사람 즉, 영혼이 죽었다가 거듭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영혼이 거듭납니까? 왜 죽었습니까?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면 죄를 청산해야 영혼이 도로 살아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죄를 청산할 수 있습니까? 그를 위해서 죄없는 예수님이 육신을 쓰고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셨을 때 아담이 지은 죄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청산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와 예수님을 의지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한번도 짓지 않은 것처럼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거듭날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종교도 많고 철학도 많고 좋은 가르침도 많지만 그것은 세상적인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은 한길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살려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을 주로 부르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살아나야 하나님과 교통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3. 영으로 사는 속사람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영의 사람이 되면 영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육의 사람으로 삽니다. 감각으로 살고, 정욕으로 살고, 이성으로 삽니다. 영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장례지내고 부활해서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사람은 영의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은 말씀으로 변화된 삶을 삽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말씀을 읽지도 않습니다. 말씀을 듣지도 않습니다. 말씀이 어리석게 보이고 무식하게 보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성령이 속에 계시므로 성경을 읽어보면 이해 할 수 있고 은혜가 되고 복이 되고 성경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경고한 것처럼 말씀을 읽으므로 자꾸 옛사람은 벗어지고 새사람으로 변화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영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를 받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고 깨달으면 내가 한걸음 더 나아가고 조금 더 변화되고 조금 더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말씀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나라 제1세대 카피라이터인 이만재씨가 쓴 ‘막쪄낸 찐빵’이라는 책에 그는 자신의 거듭남에 관하여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참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 내 나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일은 별일이다. 세상에 나처럼 한평생 엉덩이 뿔높이 달고 휘젓고 다니며 오로지 술과 법과 객기를 인생의 낙인양 믿고 살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참으로 갑자기 좋은 술벗들 대신에 예수님 사랑해요. 어쩌고 저쩌고를 속에 어물거리며 이 세상에 호적이 존재하지도 않은 까닭에 이전에 한번도 본 일이 없는 먼 나라 목수네 털보의 아들을 은근히 속으로 짝사랑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재밌는 표현입니다. 도저히 육신의 사람은 인정할 수 없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라고 믿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영으로 살면 또 성령과 더불어 살고 감동과 기도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와 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른 보혜사를 주어서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오순절날 이후에 우리에게 와서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예수님 안에서 꿈을 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사람이 되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는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는 꿈을 꿀 수 있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병에서 고침 받아 건강한 사람이 되는 꿈을 꿀 수 있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저주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축복과 번영을 받은 것을 꿈 꿀수 있고,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꿈 꿀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영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님을 통하여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들을 때 저는 가슴이 저미도록 감격합니다. 새로운 자화상을 얻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고, 아침에 일어나도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도 나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사람이 되었다고 꿈을 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로 사는 사람은 감각으로 살고, 감정으로 살고, 정욕으로 살고, 이성으로 삽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말씀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했으며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나는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믿노라’해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나는 말씀대로 믿는다고 나가는 사람이 영의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리고 믿음은 운명을 변화 시킵니다. 성경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의 사람은 천국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은 세상 말을 하고 하늘나라 사람은 하늘나라 말을 씁니다. 우리는 믿음의 말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우리 한국 속담에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말로써 묶으면 하늘에서 묶이고 말로써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의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신령한 사람이 되었으면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모시면 우리는 별 도리 없이 용서하고 사랑해야 됩니다. 십자가를 끌어안고 용서와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용서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남편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로 8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움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벗기고 할퀴고 먹칠을 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이웃을 자꾸 벗기고 흠을 보고 할퀴고 먹칠하고 짓밟으면 그것은 육의 사람이지 영의 사람은 아닙니다. 영의 사람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덮어주고 치료해주고 살려주고 추스려주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의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사람은 날이 갈수록 늙어지고 후패하고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속사람 즉, 영혼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살다가 지옥에 가든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말씀과 성령으로 날로 새로워져 영적으로 성장해 천국으로 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며칠후 며칠후 우리들은 이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납니다. 보이는 육신의 삶을 청산하고 보이지 않는 천국, 영원한 영광의 세계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세세무궁토록 왕 노릇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불멸의 영혼이 육신의 장막집 속에 살고 있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죽은 영혼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노예가 되어서 세상을 따라 살다가 세상과 함께 멸망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육신이 사라질 때 천국에 들어가서 더 좋은 곳, 더 아름다운 곳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다 구원받은 영의 사람으로 영의 삶을 굳건히 살다가 주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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