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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2005.10.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 6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내
좋으신 하나님은 역경과 고난에도 꿈을 잃지 않게 하는 근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혼 · 범사 · 건강의 삼중구원 얻어


 우리가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부모 슬하입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생각은 다 선합니다. 자녀에 대해서 악한 생각을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고 자식에 대하여는 항상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인자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부모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마음이 어찌 선하시고 인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좋으신 분입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우리는 먼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의 나환자촌에 가서 일생을 그들과 하나 되어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또 테레사 수녀가 캘커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 되어 그들 속에서 섬기고 평생을 살아간 것을 보고 감동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수천 배가 넘는 은혜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쓰고 세상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 편안하고 좋으실 터인데 우리의 죄와 질병, 저주와 죽음과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시고 죄인 된 인간과 하나 되셔서 십자가에서 인간을 위하여 형벌을 자원해서 받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고대 파사에서 사용한 후 로마제국에 도입된, 4세기까지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사형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형은 단순히 나무에 사람을 못 박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연구결과에 따르면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맨 마지막 단계이고 그 형벌은 심한 채찍질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당시 채찍의 끝에는 납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을 달아 놓았기 때문에 한번 맞으면 살 속에 박혀서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고통이 극심해서 채찍에 맞다가 쇼크사로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손목과 발목에 약 20㎝의 대못을 박는데 이때 죄수의 몸무게로 인해 살이 찢어집니다. 손발의 신경이 다 끊어지는 그런 끝없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몸이 늘어져 있어서 가슴근육이 당겨져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나중에는 산소부족으로 온몸 전체가 경련을 일으킵니다. 의사인 리히터(Richter)박사가 쓴 ‘십자가 처형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보면 십자가 처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나 육체적인 긴장은 모든 동작에 고통을 준다. 못이 박혀진 손 부분은 신경이 예민하고 몹시 아픔을 느끼기 쉬운 곳이었으므로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준다. 못의 상처와 채찍에 맞은 자국은 곧 염증을 일으키고 몸이 썩어 들어가는 괴저현상까지 일으켰다. 신체의 위치가 피의 순환을 방해하고 고통을 일으켰으며, 육체의 긴장은 죽음 자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은 최악의 고통이요, 그것은 순간순간 괴로움이 증가하는 긴 고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형벌은 타는 듯한 갈증을 사형수에게 느끼게 해서 목말라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왜 우리 주님이 이런 고통을 당했습니까? 우리는 십자가 고통을 평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통은 말로다 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영·육간에 고통이요, 괴로움이요, 치욕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이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 이런 예수님은 좋으신 하나님, 좋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짜보라. 예수님의 피가 뚝뚝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 능력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고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이제는 우리들로 하여금 부활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과 인간이 하나 되게 하사 값없이 한없는 영화를 누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5절로 6절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벌레 같은 우리들을 주님이 끌어안고 함께 일으키사 함께 승천시켜서 함께 보좌에 앉게 하셨으니 왠 말입니까? 왠 은혜입니까? 왠 영화입니까? 왠 축복입니까? 우리의 상상을 너무나 초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시켜서 함께 승천시킨 그 놀라운 은혜를 이룩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정말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령을 보내사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말하고 우리 한국어는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변호사’라는 의미고, 또한 유대인들은 어머니를 말할 때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을 종종 썼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변호사일 뿐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같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오순절 날 이후로 지금까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를 돌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끊임없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처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을 모시고 있기에 고아가 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고아원은 없습니다. 성령이 파라클레토스, 우리 어머니와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은 제자를 기르시는 선생님처럼 우리들을 늘 가르치고 길러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제자가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가르침과 지도로 제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도 우리가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늘 묻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너의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겠는가? 네 지혜, 네 총명, 네 모략, 네 재능, 네 지식, 네 건강, 네 가정, 네 부귀, 네 성공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겠는가?’ 성령은 우리 일생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역사입니다.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가 죽고 좌절되고 낙심하고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무서운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 늘 꾸짖는 하나님, 벌 주시는 하나님, 지옥 불에 넣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 속에 떨어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2. 역경과 고난에도 꿈을 잃지 않게 하심

 

 좋으신 하나님 사상은 역경과 고난에도 꿈을 잃지 않게 하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내게 다가오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좋으신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므로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하고 꿈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사상이 역경을 이기게 하는 사실은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일찍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꿈에 형들과 함께 밀 수확을 갔는데 형의 단들이 자기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차 모든 형제 중에서 요셉이 으뜸이 될 것’을 의미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을 향하여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해와 달은 아버지, 어머니고, 열한 별은 형제들입니다. 요셉이 가정에 으뜸이 될 것을 하나님이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꿈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 꿈 속에 그는 살았고 언제든 부모, 형제들을 자기가 리드하고 돌보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17살에 형들에게 배반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어서 종으로 팔려갔고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어서 10년이 넘도록 종살이에 온갖 고통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참소를 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지냈습니다. 기나긴 고생과 괴로움 속에서 요셉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배후에 좋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역경이 다가오고 거센 풍랑이 다가와도 배후에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므로 하나님이 다스려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파도를 뛰어넘어 저 건너편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았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앙고백이 창세기 50장 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나쁜 것을 좋게 해주셔서 결국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긍정적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름이 끼고 비가 쏟아져도 구름 저 위에 햇빛이 쨍쨍 비치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구름이 끼고 비가 온다고 해서 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해가 사라졌다고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통탄하고 울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인생에 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좌절과 절망이 다가와도 그 배후에 하나님의 좋은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모든 것 조차도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좋게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좋은 하나님을 확실히 마음속에 알면 결단코 우리의 생애 속에 꿈을 저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하나님 사상이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는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놀랍게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역경과 고난이 다가올 때 좋으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고 악이 선으로 바뀔 것을 우리가 기대하고 꿈꾸고 굳게 믿어야만 됩니다. 나쁜 것만 바라보고 탄식하고 통탄하고 원망하고 부정적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언제나 나쁜 것 저 건너편에 있는 좋으신 하나님의 손을 바라봐야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나쁜 것도 그 위에는 하나님의 손이 있어서 다스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3. 좋으신 하나님이 희망이 되심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희망이 넘칩니다.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보다 더 크신 하나님,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 죽음보다 크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요, 나의 하나님이요, 좋으신 하나님이니까 희망이 사라질 수 없습니다.
 제가 대조동에 개척할 때 ‘좋으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그때 대조동은 참 처참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다 초토화 되었지만 1958년도까지 나라는 회복되지 못하고 살길이 막연했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살러 왔다가 서울에서도 있을 곳이 없는 사람이 퇴출 되어 나온 곳이 대조동, 불광동 지역이었습니다. 판자촌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너무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처참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천국도 지옥도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말하냐면 “지옥? 이미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무슨 지옥이 또 겁나나?”고 대꾸합니다.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환경적으로 봐서나 감각적으로 느끼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두 다 절망인데 어떻게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속에 주신 것이 희망의 메시지, 삼박자 축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은 햇빛같이 제 마음속을 비춰 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나가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며 생명을 빼앗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잘되면 이 땅에 살아있을 동안에 범사에도 잘되고 병도 고쳐 주어서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많은 사람이 나와서 예수를 믿고 병이 나았습니다. 폐병이 낫고, 암이 떨어지고 관절염, 신경통이 고침 받으니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고 주님의 은총을 받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실로 삼대재앙에서 삼중축복을 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삼대재앙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원래 아담이 있던 에덴은 하나님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만든 처소였습니다. 에덴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저주도 없었고 죽음도 물론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 나와서 그 결과로 가져온 것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죽음의 재앙이요,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가난과 저주와 고통이 다가오는 재앙이요, 육체는 병들고 늙고 죽고 지옥에 떨어지는 재앙을 당했습니다. 이 삼대재앙을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짊어지고 벗으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벗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시고 몸 찢고 피 흘려 극심한 고통에서 이 모든 죄가를 청산하고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고난과 장사지내심과 부활을 통하여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가져온 삼대재앙을 벗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고 환경적으로 저주받고 육체의 죽음과 지옥의 노예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은총을 얻어 삼중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안락은 하늘에 있고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는 오직 불안과 고뇌와 탄식이 있을뿐’이라고 말했고 영국의 성직자 토마스 풀러 역시 ‘사람은 비명과 함께 울면서 태어나고 고통과 함께 살다가 결국에는 절망하여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땅에서 인간은 영적 죽음과 환경적인 저주와 육체적인 죽음의 삼대재앙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예수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오면 용서와 의와 영광과 영생이 있고 예수님 안에서 저주에서 해방을 얻어 축복이 약속되고 예수님 안에서 치료되고 부활을 얻고 영생 천국을 얻는 축복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삼중축복을 받으면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했고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도 하나님은 긍휼을 배푸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을 제가 불광동에 낭패와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하니까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빛이 생기고 얼굴에 웃음이 생기고 마음에 희망을 갖게 되고 그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게 되고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이 응답하게 되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 9월 15일자 순복음가족신문에 난 이레전자 정문식 집사의 간증을 읽고 마음에 큰 감동을 입었습니다. 정문식 집사는 이레전자를 일으켜 세워 정부로부터 표창까지 받은 자랑스러운 우리 교회 성도입니다. 이레전자가 매출액 1,400억원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앞길이 캄캄하고 환경이 아무리 어두워도 좋으신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시므로 결국에는 좋게 된다는 것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늘의 그가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처럼 저는 한평생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전하며 살아왔습니다. 47년간 목회를 하며 깊은 좌절도 느낄 때가 있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고난의 폭풍에 휘말리고 외로울 때도 언제나 배후에 계신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꿈과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저 건너편에 좋은 하나님이 계신다. 아무리 먹장구름이 끼어도 저 건너편에 좋으신 하나님이 계신다. 결과에 가면 좋게 된다. 하나님이 끝에 가서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환경을 바라보고 좌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셨습니다. 성경말씀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를 불러서 예수를 믿게 하시고 구원을 받으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주신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좋고 선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습니다. 이 좋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이 좋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항상 눈에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그 건너편에 계신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좋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꿈을 갖고 희망을 펼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벌레같은 우리를 위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우리와 하나되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잘못을 다 청산해 주시고 부활하사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좋은 하나님이요, 영원히 좋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안에서 꿈을 버릴 수가 없고 이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마음속에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은 지금보다 얼마나 영광스러울 것을 꿈꾸고 나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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