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중략)…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린도후서 12장 1∼10절
고난의 가시, 자기를 깨뜨리고 자기 우상화 막는데 기여
바울의 약함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강하게 만들어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가시에 감사해야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그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로 말미암아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왜 바울 선생 같은 분에게 가시가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이 택한 위대한 그릇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와 환상과 묵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사단의 사자, 육신의 가시를 보내셨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서 가시가 떠나도록 세 번이나 간구하였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선생은 오히려 환난과 곤고와 궁핍과 고난을 기뻐하고 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임하는 것을 알고 약함을 자랑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도 가시와 엉겅퀴가 항상 따릅니다. 인생에 크고 작은 가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가는데 나는 아무런 가시, 엉겅퀴도 체험하지 않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가시가 있고 가시에 찔리고 피를 흘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의 삶에 가시가 필요한가요?
1. 자기 우상을 깨뜨리는 가시
아담과 하와는 자기 숭배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고 의지하고 살아야 될 그가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믿고 의지해서 자기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자기 우상화 때문에 범죄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꾀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자기 우상화에 심취해서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동시에 그 속에 자기 우상화라는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우상화의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도 똑같았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이 창대하게 되어서 시날 광야를 중심으로 살고 있을 때 그들은 함께 모여서 거대한 탑을 쌓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탑을 쌓되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꼭 사단이 한말과 똑같습니다.
이사야 14장 14절에 루시퍼가 말하기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라고 했던 말을 똑같이 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노아의 후손들은 시날 평지에서 벽돌과 역청으로 탑 모양의 신전을 세워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한 것은 인간우상화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자. 그리고 하나님께 정면으로 반역해서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나님은 온 지면에 흩어져 살라고 했는데 우리 지면에 흩어지지 말자’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 심판을 받아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됐습니다.
모든 인간은 의식 혹은 무의식중에 자기 우상화를 합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우상화하고 자기를 경배하는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의 가시가 자기를 깨뜨리고 자기 우상화를 막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약해지니까 자기 우상화, 자기 존경, 자기 섬김을 버리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나타나서 그를 강하게 만들어 주셨다”고 바울선생은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18장 12절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한 것 처럼 교만하면 멸망하고 겸손하면 존귀하게 됩니다. 교만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가시의 역할입니다. 가시가 괴롭히니까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항복하고 회개하고 엎드리고 낮아지므로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은혜로써 존귀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게 다가온 크고 작은 가시가 내게 원수가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혹은 남편이 가시가 되는 사람도 있고 아내가 가시노릇하고 자식이 가시가 되고 친척과 이웃이 가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 가시를 보고 우리는 늘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 가시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의 허무함을 깨닫고 무력함을 깨닫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는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가시는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아를 의지하는 것을 깨뜨려 주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찾게 하는 가시
바울의 가시는 하나님을 찾게 하는 고난의 가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절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선생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기도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세 번 기도했다는 것은 보통 기도가 아닙니다. 그는 작심하고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혹은 금식하며 철야하며 ‘하나님이여 내 육체의 가시를 떠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번 기도하고 응답이 안 되니까 두 번째 또 주님께 작심하고 바울은 전력을 기울여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습니다. 세 번째 바울은 또다시 끈질기게 하나님께 나가서 이 가시가 내 몸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가 오니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평안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까? 편안하면 하나님도 천당도 다 2선으로 물러가버리고 맙니다. ‘왜 주일이 이렇게 빨리 다가오느냐? 무슨 기도회는 그렇게 많으냐?’라고 하지 않습니까? 편안하면 하늘나라와 은혜가 제2선으로 물러가게 됩니다.
그러나 가시가 와서 찌르고 고통을 주면 그때는 ‘왜 주일이 이렇게 빨리 안다가 오느냐, 수요일에도 말씀 듣고 기도해야지’라고 합니다. 새벽에도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찾아와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고 혹은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고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는 것이니 손해보다도 이익이 많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집니다. 약할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셔서 성령 충만히 채워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중에 지나고 보면 약하고 시련당하고 고통당했던 것이 오히려 영적으로 큰 이익이 되고 은혜가 되고 복이 된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선생은 자기가 약하기 때문에 더 약함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고 간구하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약했던 것이 감사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저는 항상 저의 일생에서 가장 기념할만하고 감사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가 17살 때 폐병으로 쓰러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나에게 가장 큰 비극이요, 좌절이요, 절망이었지만 이제 돌아보면 제가 17살에 폐병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기 때문에 약해지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한참 꿈에 부풀어 있고 성공하고 출세할 야망으로 꽉 들어찬 시점에 하나님도 예수님도 내게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약할 때 깨어지고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고 보니 오늘날에 내가 있는 것은 폐병 덕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가시가 돌이켜 볼 때 얼마나 큰 유익과 축복이 되었는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천국을 바꾸겠으며 무엇으로 주의 종의 사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이 큰 축복이 그 고난 때문에 다가온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와야 기도를 하게 되고 기도를 해야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은혜는 물과 같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릅니다. 우리가 고통을 통해서 깨어지고 낮아지면 은혜가 고입니다. 높아져서 바위처럼 우뚝 서 있으면 아무리 은혜의 단비가 흘러도 고이지 않습니다. 깨어져서 납작해지고 평평해지고 푹 파지면 거기에 은혜의 단비가 고입니다. 우리가 깨어질 때 은혜가 임하시고 낮아질 때 은혜가 우리에게 채워지고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존 번연은 ‘시험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 울 때가 가장 위험한 시련이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시지 않을 때가 열 가지 시련을 받을 때 보다 더 위험한 때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련이 없는 삶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련이 있을 때가 안전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성공의 열매를 자랑하지 않게 하는 가시
고난의 가시가 성공의 열매를 자랑치 않게 합니다. 고난의 가시가 와서 늘 고통스럽고 괴롭고 허덕이면서 성공한 사람은 내 힘으로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연약하고 허약하고 부족하고 모자랐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일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통하여 부자도 되게 하고 유명하게 되기도 하고 성공도 하고 승리도 하고 축복도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난의 가시가 겸손하게 만들어서 승리와 축복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람은 자기 자랑에 빠져서 마귀의 유혹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가 자기의 무력함을 항상 깨닫게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무력함을 늘 깨닫기 때문에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붙들어주고 세워주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금세기 초 세계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토스카니니라는 위대한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는데 심한 근시 때문에 연주 중에 악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연주 중에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연주용 악보를 통째로 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연주자들은 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데 그는 미리 악보를 통째 외워서 연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연주회를 앞두고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연주자들 중에 한 사람이 지휘를 해야 되겠는데 그 악보를 통째로 외워서 아는 사람은 토스카니니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스카니니가 지휘봉을 잡고 지휘를 했는데 그 속에 감추었던 지휘의 천재적인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토스카니니는 세계적인 대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심한 근시라는 가시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후에 토스카니니는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어려울 때 힘 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하지 말자.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는가.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드리자.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욱 똑똑히 하나님이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 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신다” 여기에서 토스카니니는 자기의 위대한 천재적인 지휘 능력으로, 내가 잘나서, 내가 음악적인 천재성이 있어서 그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시라는 가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휘자가 되었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고난의 가시가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우리를 바라보지 않게 합니다. 내가 약할 때 나를 의지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육신이 약할 때 내 육신을 의지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내가 무식할 때 내 지식을 의지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붙잡아 줍니까?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가시가 나를 찔러서 내가 고통스럽고 허약할 때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를 붙잡아 주실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시편 123편 2절에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는 말씀처럼 종은 항상 상전의 손을 바라보고 여종은 주모의 손을 바라보지 않습니까? 우리도 약할 때 늘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됩니다.
고난의 가시가 항상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고난의 가시는 자신이 단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서 수분과 양분을 올려 주어서 내가 지금 맺은 열매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의해서 맺어진 것입니다. 나는 가지로서 그냥 붙어 있었습니다. 물기와 양분을 끌어 올리는 것은 나무인 예수님이 해주셨고 나를 붙잡아 주신 이도 나무인 예수님이 붙잡아 주셨습니다. 자랑할 것이 내겐 없습니다. 나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나 성공은 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뤄졌습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은 가시가 와서 우리의 실상을 알게 해줍니다.
4. 세상 영광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가시
고난의 가시는 세상 영광에 집착하지 않게 만듭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세상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집착하고 권력에 집착해서 천년만년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 쾌락에 집착하는 사람, 청춘에 집착하는 사람, 세상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 이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고 기록했습니다.
저는 요사이 형편을 살펴보면 주님 오실 날이 너무나 가까웠다는 것을 느낍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홍수로 수만에서 수십만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죽어가고, 태풍으로 한도시가 하루 아침에 사라집니다.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병들이 생겨나고 어느 곳에 가나 민족의 분쟁, 종족간의 분쟁, 종교· 문화적 분쟁이 이 땅을 흔들고 있습니다.
고난의 가시는 인간의 연약함을 늘 기억하게 하므로 어느 순간에도 빈손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난이 다가와서 괴로우니까 어느 순간에도 죽을 수가 있고 어느 순간에도 손 털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우리에게 경고해 주어서 세상과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시가 깨닫게 해줍니다.
고난의 가시는 인간의 삶의 토대가 언제든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므로 세상을 의지하지 않게 합니다. 세계 최강이요 최고 부자 나라인 미국이 이처럼 고난당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미국의 큰 도시 하나가 허리케인으로 말미암아 사라집니까? 미국의 뉴올리언스는 정말로 큰 도시입니다. 저는 재즈의 본고장인 그곳에 가서 부흥회를 수차례 열고 슈퍼돔이라는 큰 야구장에서도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80만의 인구가 사는 거대한 도시가 순식간에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말미암아 물에 수장되고 만여 명이 생명을 잃고 온 시민이 다 도시를 떠나야 하는 비극을 당한 것을 보면 인간이 자랑하는 것은 순식간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시편 90편 5절에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의 지위, 명예, 권세, 부귀, 영화 이것은 하루 아침에 없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가시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고난의 가시는 온전한 것이 있는 천국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세상에 의지할 곳 없이 행인과 나그네 길을 우리는 걸어가고 우리의 영원한 본고장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의 장차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오니 우리는 밤에나 낮에나 눈물을 흘리며 내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기를 때 그 둥지를 가시로 만듭니다. 뾰족뾰족 가시가 난 가시채를 가지고 둥지를 짓고 거기에 짐승을 잡아 가죽으로 위에 입히고 새들을 잡아서 털을 뽑아서 푹신푹신하게 만듭니다. 자라서 날 때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둥지를 떠나지 않고 자꾸 부모에게 의지하면 어미 독수리가 와서 둥지를 어지럽게 합니다. 털을 다 끌어내고 가죽을 벗겨 내고 가시둥지에 몰아넣습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푹신하던 둥지가 가시둥지인 것을 몰랐습니다. 새끼들은 가시에 찔려 괴로우니까 훨훨 날아갑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 지구를 가시둥지로 만듭니다. 처처에 지진이 있고 기근이 있고 온역이 있고 전쟁이 있고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 너희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 이곳이 가시둥지다. 자 내 날개 위에 올라타라. 훨훨 날아 천국으로 가자!”라고 말씀합니다. 가시 둥지가 되는 이유는 가시둥지에서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바람타고 영원한 천국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고난의 가시는 구원이 있는 천국을 바라보게 만들어 줍니다. 고난의 가시는 참으로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의 가시가 있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괴롭습니까? 그러므로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고난의 가시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바울선생처럼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위대한 사도 바울선생에게도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시가 있는 것을 탄식하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친척이 이웃이 가시가 되어 우리를 찌를 때 우리는 괴롭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주의 은혜로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 세상을 이기려고 하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극복하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해준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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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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