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장 12∼13절
율법주의자의 위선… 예수님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
율법은 삶의 거울,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손에서 돌을 놓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예수님께서 아침에 성전 뜰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기울인 귀를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성경에 보니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증거 할 때 하나님의 치료하는 능력이 함께 임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임재하신 곳에는 치료하는 광선이 발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치료를 받고 육체에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을 증거 하면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심취해 있는데 갑자기 새벽공기를 가르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장한 남자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여인은 옷매무새가 다 흐트러지고 머리가 산발이 되고 울어서 눈은 퉁퉁 부었고 신발도 벗겨진채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예수님은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적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적은 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허리를 펴서 사람들의 눈을 큰자부터 작은자까지 맞춰 보시고 장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이 여자를 쳐라” 그리고는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을 적기 시작하는데 사람들마다 그 손가락을 따라 글을 읽더니만 모두다 슬그머니 돌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허리를 펴서 주위를 보고 여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여자가 퉁퉁 부은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돌만 사방에 흩어져 있고 아무 사람도 없었습니다. “주님 아무도 없나이다” 그러자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집에 돌아가서 다시 범죄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율법주의와 위선
이 말씀 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율법주의자는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간음을 혼자 하는 것 보았습니까? 현장에서 여자를 잡았다면 왜 남자하고 같이 끌고 오지 여자만 끌고 왔습니까? 위선자들 아닙니까? 이것은 계획적으로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정직한 사람이면 여자와 남자를 현장에서 붙잡았으니 둘 다 끌고 와야 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처녀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간통할 때나 남의 아내와 간음할 때는 어느 경우든 남자와 여자 두 사람 다 돌로 쳐 죽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선자들은 두 사람을 다 끌고 오지 않고 약한 여자만 끌고 와서 예수님께 그를 정죄하고 심판할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교법사들의 위선에 대해서 예수님은 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허리를 굽혀서 적은 글은 내 생각에는 율법을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 그 율법을 적으니까 이 사람들이 기세등등해서 그러면 그렇지 모세의 율법대로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잡혔으니 돌로 쳐 죽여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허리를 펴서 그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당신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후 다시 그들의 감추인 죄악을 주님이 적어 내려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 놓은 죄를 예수님이 일일이 적어 내는 것을 보고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몸부림쳤습니다. 너무나 겁이 났습니다. 사람들 앞에는 위선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손가락이 적는 그 글을 볼 때 자기들의 죄가 천하에 드러나자 큰 사람부터 작은 사람까지 돌을 버려두고 슬그머니 도망을 치고 만 것입니다.
2.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므로 두 번째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싶은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율법대로 심판하겠다고 고함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 스스로 율법에 비추어 양심에 가책이 없고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여자를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이 위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돌로 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수님 앞에서 그럴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은 그들의 생애를 열린 책처럼 환히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그들의 죄를 적어 내려갈 때 그들은 정신이 아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자를 돌로 치면 다음에는 그들 스스로가 그 돌에 맞아서 죽어야 될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들이 자신만만하게 선 것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 그들이 흠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교법사들은 말할 필요 없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우상에 절하지 않고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계명이 문제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여기에 그들이 흔들렸습니다. 돌로 쳐 죽이는 죄는 7계명까지 입니다.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 죄는 범하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다음 죄는 돌로 쳐 죽이는 법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돌로 쳐 죽이는 죄에 해당하는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이 5계명에서 7계명 앞에 그들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적어 내려가는데 그 죄에 모두 다 해당되었던 것입니다.
남을 벗기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벗김을 당할 때는 안절부절합니다. 이 여자를 간음했다고 쉽게 정죄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들추어 낼 때 그들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 아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그들을 벗기니까 그들은 심판 앞에 몸서리쳤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자신만만한 의인은 없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도 똑같은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절로 3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은 엄하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이 결국에는 자기에게 잣대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이 지은 ‘관계의 기술’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시간을 끌면 느린 것이고 내가 시간을 끌면 철저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으른 탓이고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바쁜탓이다. 다른 사람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 주제 넘은 짓이고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 주도권이 있는 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무례한 짓이고 내가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창의적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윗사람을 즐겁게 하면 아첨이고 내가 윗사람을 즐겁게 하면 협조하는 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앞서면 규칙을 어긴 것이고 내가 앞서면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도덕적으로 불륜을 하면 스캔들이고 내가 불륜을 행하면 로맨스라고 말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잣대를 바꿔서 남을 재고 자기를 잽니다. 사람들은 남에 대한 잣대와 자신에 대한 잣대를 달리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도 똑같은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을 비정하게 판단하고도 자기는 판단 안 받을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에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시는가?
왜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돌로치지 아니하시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이 여자를 무죄방면 하였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신 걸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사라는 것은 뭡니까? 구약시대에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짐승을 가지고 와서 짐승의 머리 위에 안수하고 죄를 고백하고 짐승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제물이 되어서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리고 그 몸은 불태웠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이 곧 사람을 대신해서 정죄를 받고 심판 당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정죄하고 심판해서 죽이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용서와 치료와 사랑을 원하십니다. 긍휼은 사랑과 용서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모두 다 심판하시면 구원 받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제사를 원하셨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재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주 앞에 의롭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정죄하고 심판하고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 것은 그 여자를 돌로 치면 거기에 있는 사람 중 한사람도 돌로 안 맞을 사람이 없습니다. 똑같은 율법의 심판의 잣대로 재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여자를 돌로 친 사람들도 다 돌에 맞아 한사람도 남김없이 다 시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선 모세의 제자들, 바리새인, 사두개인, 교법사들이 모두 다 손에 돌을 들고 있다가 돌을 놓아 버렸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돌을 들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앞에 서면 돌에 맞을 자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향하여 돌을 들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도 남편을 향하여 돌을 들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향해서 돌을 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이웃을 향해서 돌을 들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가 던지면 그 돌은 나에게 돌아와서 나를 죽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이시여 내 이웃이 범죄 했을 때 하루에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용서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은 이유는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여자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해서 정죄 받고 심판받고 죽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주님이 성찬 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다 청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정죄와 심판과 사형선고를 대신 짊어졌습니다. 우리의 죄를 주님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은 정죄를 받으시고 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받았습니다. 몸부림치고 고통을 당하면서 피를 다 흘리고 몸을 찢고 죽음을 맛보시고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모든 것을 다 청산하시고 승리하고 부활하여 일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제 정죄도 심판도 죽음도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 밖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 때문에 정죄 받고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아무리 율법이 쏟아지는 정죄와 심판과 사형을 언도해도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제 모세의 율법이 용도가 달라졌습니다. 원래 모세의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율법이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정죄당하고, 심판당하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덮고 있으므로 아무리 율법이 우리를 정죄해도 보혈이 우리를 정하게 하고 의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율법은 용도가 변경되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보여주는 거울이 되고 또 율법은 우리가 올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이 되어 줍니다. 이제는 우리를 정죄하거나 심판하거나 죽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때문에 율법은 우리에게 거울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지 안 사는지 보여주는 거울이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어린아이의 선생역할을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율법의 권세를 다 철폐해 버린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고 심판받고 멸망받기를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심판과 정죄와 멸망을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십자가 이후로 예수님은 용서와 구원과 은혜를 베푸는 시대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손에 돌을 들고 서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교법사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돌을 들고 왔지만 결국 예수님 앞에서는 돌을 다 놓고 떠나가 버리고 만 것처럼 오늘날도 예수님 앞에서는 돌을 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원수들도 예수님 앞에서는 자기들의 죄가 백일천하에 들어날 것이기 때문에, 돌로 칠 수가 없기 때문에 돌을 놓아 버렸는데 하물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돌을 들고 예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가 어떻습니까? TV를 보십시오. 신문을 보십시오. 방송을 들어 보십시오. 돌이 동서남북에서 날고 있습니다. 온 천지에 돌멩이 천지입니다. 청와대도 국회에도 돌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기업체도 개인도 서로 돌을 던져서 우리 한국은 지금 돌무더기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서로 심판하고 서로 정죄하고 서로 죽이려고 합니다. 교회조차 서로 심판하고 정죄하고 서로 죽이려고 합니다. 교회 앞에도 돌무더기가 쌓입니다. 우리 강단 앞에도 돌무더기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에는 돌무더기가 없습니까?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내가 남을 심판하면 나도 그로써 심판 받아야 되고 내가 남을 정죄하면 그 정죄함으로 나도 정죄 받아야 되고 내가 남을 돌로 치면 나도 돌로 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과 같이 동행하려면 손에 돌을 놓아야 됩니다. 돌을 들고 목사가 될 수 없고 돌을 들고 장로가 못됩니다. 돌을 든 안수집사, 권사, 집사가 될 수 없고 지역장, 구역장, 평신도가 될 수 없습니다. 돌을 들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찬양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부모가 참고 견디면서 돌보아 주고 용서하고 돌보아주고 용서하고 돌봐주므로 똥, 오줌을 다 가리게 되고 자기 스스로 옷 입고 밥 먹게 되고 성인이 되지 않습니까? 많은 용서와 돌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영적으로도 한가지입니다. 한꺼번에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쓰러지면 용서하고 또 일으키고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삶의 거울입니다. 거울로 비춰주고 이것 고쳐라. 저것 고쳐라. 가르쳐 주고 그 다음에는 다시 정죄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이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서 우리들은 주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용서와 의와 영광을 받았으면 남도 하나님 앞에 용서하고 하나님께 의를 받고 영광을 받도록 오래참고 우리가 기도하고 도와 줘야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옷깃을 여미고 경청할 때입니다. ‘나는 제사를 원치 않는다. 심판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것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긍휼을 원한다. 나는 용서하고 의롭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 구원을 받게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천에도 세월이 지나면 아름다운 꽃들과 숲이 생겨납니다. 산불이 스쳐간 곳, 홍수가 쓸어간 곳, 지진이 허물어뜨려 놓은 곳이라도 자연은 세월을 통해 인간의 횡포를 용서하고 사랑의 손길로 상처 난 곳을 치료하여 아름다운 풀이 나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치유가 없이는 인간과 자연역시 함께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용서와 사랑과 치유는 자연의 질서요, 인생의 질서인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치유가 없이 가혹한 정죄와 심판과 형벌만 있는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황폐해지고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용서와 사랑과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우리의 정죄와 심판과 죽음을 청산해 버리시고 이제는 주님 앞에서 끝없는 용서와 사랑과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영생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려고 오늘도 노력하고 계십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손에 돌을 들고 주님을 섬길 수가 없사옵니다. 원수들조차도 예수님 앞에는 돌을 다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웃을 치려고 손에 돌을 들고 주님을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이시여 주님은 용서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우리의 가슴속에 용서와 사랑과 치유를 가지고 신앙생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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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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