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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길은 영광으로 통한다
2005.06.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4장 17∼18절


하나님은 문제의 해답을 언제나 우리 곁에 예비하셨다
십자가 사건 통해 사망의 절망이 부활의 영광으로 변화
문제가 없으면 해답도 없고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


 고난은 인생을 깊이 있게 하고 똑같이 고난당하는 이웃을 가슴으로 동정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뿐 아니라 고난은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발생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만들어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고난당하게 되면 진지하고 뜨겁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면 믿음이 향상되고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의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 구약시대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

 

 구약에서 고난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을 떠나 홍해에 왔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300만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가에 왔는데 앞에는 창일한 바다가 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마음을 바꾸어 전군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기 위해 질풍노도같이 쫓아 왔습니다.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인 것입니다. 그들은 절망에 처했습니다. 온 백성들이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제는 모두 다 대학살을 당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다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께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어떠한 고난에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난이 일어날 때 부르짖어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지만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난 다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로 14절은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영광의 역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놓는 전대미문의 기적을 행했던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고난이 없었으면 이런 영광의 기록은 성경에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은 괴로운 것이지만 영광을 가져오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길을 걸어갔는데 물이 떨어졌습니다. 또 고난에 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때 연못을 발견했습니다. 뛰어가서 마셔보니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설상가상입니다. 그들은 또 한번 좌절과 절망에 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쳤습니다. 몸부림을 쳤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고통은 기회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2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고난이 다가올 때 모세가 기도할 것을 알고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 쓴 연못물 곁에 나무가 있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지니 물이 중화가 되어 달아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쓴물이 있으면 물을 달게 하는 나뭇가지도 곁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의 해답을 언제나 우리 곁에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아니하면 해답도 안 나타내 주시지만 부르짖으면 문제의 해답을 발견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해답도 멀리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 들어왔을 때 정말 어려운 고통에 처했습니다. 300만 명이 갑자기 애굽에서 떠나왔기 때문에 먹을 양식을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이제 굶어죽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삼시 세 끼를 배불리 먹일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절망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알아야 될 것은 절망은 하나님이 나타날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을 찾으니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상에 체험하지 못한 위대한 기적인 만나가 내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양식을 구하지 못하고 절망에 처하는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답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만나가 임한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5절로 16절에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고난당하여 파멸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고 연단받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하므로 마침내 고난이 변하여 복이 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 신약시대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

 

 주님이 우리 구주가 되시고 우리 가운데 계셔서 능력을 나타내신 증거는 바로 고난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제자들과 함께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혼인잔치가 한창 무르익어갈 쯤에 그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가 잔치의 주음식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는 낭패에 이르고 신혼부부는 아주 곤란하게 됩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서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을 요한복음 2장 7절로 8절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처음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1절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영광도 다가옵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영광을 체험하고 싶으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을 통해서 나타나며 고난은 영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사로의 죽음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거대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실부모하고 오라버니 나사로를 의지하고 사는 베다니의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들은 형제간에 오순도순 잘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를 사랑하셔서 예루살렘에 오시면 베다니로 와서 그 집에서 묵고 그 가족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에 멀리 계실 때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자매는 오빠가 병들자 예수님께 서신을 띄웠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으니 빨리 와서 고쳐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편지를 받고도 오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었고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나사로가 죽는다는 그 처절한 절망이 와야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나사로의 무덤가에 서서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주님 이미 오라버니가 죽어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썩은 냄새가 나니 이제 끝났습니다만 하나님께는 죽은지 하루되나 나흘되나 천년이 되나 만년이 되나 관계없습니다. 바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 되어 무덤에 들어가서 썩은 냄새가 나도록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라고 말씀하자 나사로는 살아서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보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님 의 한마디에 죽은 사람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기회가 되는 것이지 절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절대절망인 죽음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마귀와 세상을 그 몸에 담당하시고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들의 소망이 다 끝나고 좌절과 절망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그 밑에서 도박을 했습니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축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절망하여 모두다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간 지 3일 만에 무덤 문을 헤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었냐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죽었기 때문에 그 죽음으로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마귀와 세상을 이기시고 질병과 저주를 극복하셨습니다. 영원한 멸망과 지옥을 극복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승리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사망도 이기고 무덤도 이기고 영원한 천국의 영광으로 가슴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고 승리의 씨앗이 되어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죽음의 고통은 영광의 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망의 절망이 부활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고난은 영광을 가져오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고난이 다가오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고난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더 나은 승리의 삶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삶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사람은 고난을 당합니다. 고난 당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큰 고난당하는 사람, 작은 고난당하는 사람간의 차별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고난을 당합니다.
 욥기 5장 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을 때면 불티가 하늘로 올라감같이 인생은 태어난 사람은 다 고난당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또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게 하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고난을 알고 계실까요?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고통당하는 것을 누가 알아줄까? 하나님도 몰라줄 것이다. 내가 외친들 누가 알고서 응답해 주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도 다 헤아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크고 작은 것을 모두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27절로 31절에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입습니다.
 ‘하나님은 내 사정을 모른다. 나의 슬픔과 고통은 하나님께 감춰져있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두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앙망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십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 광야에 갔는데 남자만 5000명에 여자가 기만 명이 모여왔습니다. 말씀을 듣고 해거름이 되니까 그들이 다 배가 고파 절절 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절로 6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당할 때는 주님이 어떻게 해결할지 알고 계십니다. 어떻게 해결할지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진짜로 믿느냐, 안 믿느냐, 진짜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느냐 아니냐 진짜로 하나님이 간섭해 줄 것을 기대하냐 안하느냐?’ 이렇게 주님께서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빌립은 낙제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광야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바라보고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꿈을 가지고 기대했기 때문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기쁘게 축복하사 이를 나누어 주니 그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열 두 바구니가 남은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실지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기적을 기대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당했을 때 이미 해결방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 연못물에 이스라엘 백성이 갔었을 때 주님은 이미 물을 달게 할 나무도 그 옆에 놓아두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는 눈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니까 모세의 눈을 열어서 그 나무 가지를 보여 주어서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졌지 않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면 쓴물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그 좌절과 절망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고 꿈을 가지고 믿고 기도하면 해답도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답 없이 문제를 우리에게 보내지 않습니다. 문제가 오면 해답도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맡기고 문제가 생길 때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광이 오는 파이프입니다.
 시편 37편 5절로 6절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도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이 오면 피할 길도 하나님이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피할 길도 주님이 눈에 보여주게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으면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절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굳세게 끝까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감각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기 때문에 믿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경험을 통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적 이성으로 믿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내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에 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난이 있어야 인내심도 나오고 연단도 되고 연단을 받고 나면 소망이 더 커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6절에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난당할 때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잠잠하게 기다리십시오. 기도라는 것은 항상 부르짖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나중에 할 말이 없거든 가만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임금님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임금님 계신 곳에 가마니 깔고 석고대죄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찬송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지치거든 아무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도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감사하고 찬송하며 기다리십시오.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고 열흘도 좋고 기다리십시오. 찬송하고 기도했으면 하나님이 다 들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다리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난없는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날개를 활짝 펴고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을거리가 그렇게 많고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느끼고 믿음을 얻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응답한 기적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어마어마한 고난을 당한 때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응답한 기적의 기록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기적도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이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성경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적을 보내겠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모든 고난의 길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고 낙심치 않으면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으면 해답도 없고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고난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작고 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고 찬미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고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 곁에 계시므로 하나님이 모든 고난을 합동하여 유익이 되게 만들어 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성도들 중에 고난을 당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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