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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교해야 하나?
2005.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19∼20절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 정체성 자화상 잃고 마귀의 종노릇
예수 안에서 잃어버린 정체성 회복하고 새로운 신분 갖게되
예수 안에서 정체성 자화상 신분 갖게 하는 일이 선교

 

 깊은 정글에 비행기가 불시착한다든지 대양에서 배가 조난을 당하면 해당국가에서는 물론 주변국에서 헬기나 비행기, 선박을 동원하여 실종자 수색을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종된 어린이를 찾기 위하여 부모가 직장을 버리고 전국을 누비며 애타게 찾는 모습도 가끔 봅니다.
 하나님은 실종된 인생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희생시키면서 까지 인생을 찾아 애쓰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를 잃어버린 상황 속에서 내가 누군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인생에 관하여 프랑스의 문필가 몽테뉴는 “인간은 전 세계를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리학자 칼 융의 핵심질문 역시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가?”였습니다. 칼 융은 인간이 삶의 의미 즉, 종교적 인생관을 발견할 때까지는 의미 없이 방황하며 허망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종교적인 인생관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은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발견해야 정신적인 질환도 치유 받을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늘 잃어버린 자기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찾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잃어버린 정체성 회복

 

 그러면 우리가 왜 선교해야 됩니까? 그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주는 것이 선교의 사역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삶을 가져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 삶을 찾게 하는 것이 선교요, 전도인 것입니다. 아담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정체불명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어 방황하기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고 마귀의 손에 잡혀서 고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거울이 없으면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기가 누군지를 모릅니다. 길거리에서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 보십시오. “당신이 누굽니까?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야만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새로 발견한 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옛 아담의 자손들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 상실된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 우리는 알고 전해야 될 것입니다.
 새사람은 누구일까요? 새사람은 용서받은 의인이 된 사람입니다. 전에는 죄인이었고 죄의 종이었으며 정죄를 받고 마음의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때를 밀어도 희어지지 않는 피부색깔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는 아무리 노력을 하고 고행을 하고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희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누더기 옷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찬란한 의의 옷을 입은 자가 새로운 사람입니다. 나의 새로운 정체성은 용서와 의와 하나님의 영광을 옷 입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로운 정체성은 거룩한 성령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에 끌려 다니며 온갖 추하고 더러운 일을 다하고 세상 풍습에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벗을 수 없는 옛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 안에 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됩니다. 마귀와 세상에서 해방되어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선교란 바로 이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정체성은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입니다.
 약으로 못고치고 병원에서 수술로 못고치면 죽음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병의 노예가 되었으나 새로 지음을 받은 새로운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료함을 받은 새로운 사람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정체성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가난과 저주에 몸부림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가나 가시는 우리를 찌르고 엉겅퀴는 우리 몸을 휘어 감았습니다. 우리는 가난과 저주를 숙명처럼 짊어지고 산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비극과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음도 가난하고 몸도 가난하고 생활도 가난한 저주에 휘휘 감겨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것을 벗을 수 없었으나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서 우리의 저주를 속량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주와 가난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나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과 영생천국을 얻은 사람이 된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원한 어두움의 지옥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떨어져 나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일의 찬란한 광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 무덤에 들어가서 사흘 만에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캄캄한 그 길은 환한 부활의 광명으로 가득합니다. 사망은 없습니다. 흑암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 안에는 광명한 천국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장막집은 언제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는데 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져도 우리가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집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선교는 정체불명의 사람, 마귀에 끌려 다니는 사람을 찾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새 정체성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는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잃어버린 사람이 온 세상에 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주님은 성령을 보내시고 선교사를 보내셔서 구석구석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정체성을 회복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려 거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는데 아직까지도 이를 모르기 때문에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어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2. 자화상 회복

 

 선교는 자화상을 회복시켜 주는 운동인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잘 생겼으면 자식들도 대개 잘 생겼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어떻게 생겼는가 알고자 할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자화상을 분명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고 버림받았을 때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어떠한 모습인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화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다음 늘 보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귀의 자화상을 가지고 마귀처럼 부정적이고 죄짓고 비뚤어지고 좌절하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못나가므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므로 자기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겉만 화려하지 속은 텅비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생은 허수아비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허무와 무의미와 공허로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텅빈 자화상을 갖고 사는 인생은 허무로 말미암아 자살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매년 3만명씩 자살합니다. 만약 어떤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매년 3만명씩 죽는다면 이것은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세계에서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다는 스칸디나비아 3국도 해마다 자살이 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의식주 문제로 자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가져다주는 허무와 무의미를 이기지 못하고 텅빈 자화상 때문에 몸서리치다가 자살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에 들어서면서 자살증후군이라는 무서운 풍조가 퍼져가고 있습니다. 2004년 7월 현재 집단자살, 동반자살 등 자살로만 하루 평균 36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된 자화상을 잃어버린 공허한 인간은 결국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생명까지 버리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무어라고 해도 텅비고 공허한 삶입니다.
 아무리 요란스럽고 찬란한 세상으로 꾸며 놓아도 마음의 빈 가슴은 세상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팠으나 물을  보존하지 못하는 깨어진 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없는 삶은 혼미한 삶입니다.
 프랑스에 세계적인 철학자요, 수학자요, 과학자였던 파스칼이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방향과 고뇌의 종지부를 찍은 후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요, 수학자의 하나님도 아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믿는 자의 하나님인 것을 내가 알아내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난 다음 그 앞에 엎드려 나갈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그를 품어 주시고 잃어버린 자화상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 텅빈 가슴이 꽉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본래 형상을 회복하는 방법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만남으로 삶의 혼돈은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공허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므로 메워지고 혼돈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흑암에 잡힌 인생은 누가 해방시켜 줍니까? 사람들은 아담, 하와 이후로 흑암의 세력인 원수 마귀에게 잡혀서 심신이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잡혀 무신론자가 되고 유물론자가 되고 절망에 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빛은 예수님이고 어두움은 마귀인데 예수님보다 마귀를 더 따라가는 이유는 마귀에게 잡혀서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지라도 갈보리 산 밑에 와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보면 내 모든 죄가 다 사함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며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모든 병이 다 고침을 받고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자신들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가 파멸에서 구속함을 얻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 주시고 좋은 것으로 내 마음에 소원을 만족케 해서 내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파멸에서 건져내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좋은 것을 선물로 받아 독수리같이 새롭게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독수리같이 새롭게 되어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모습으로 완전히 굳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또 모든 병이 나은 모습을 굳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병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파멸에서 건짐 받고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독수리처럼 펄펄 날아오르는 삶의 모습을 가지고 이것을 전하는 것이 선교요, 복음전도인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 자화상이 회복됩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화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자기를 찾아주고 자화상을 복구시켜 주는 운동을 하는 것이 선교사역인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을 찾아서 자기 모습을 새롭게 보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화상을 찾을 뿐 아니라 자화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올바른 자화상을 찾아주는 운동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분을 가진 천국인(天國人)이 된 것을 찾아주기 위해서 선교를 해야 합니다.

 

 3. 새로운 신분을 가진 천국인

 

 십자가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3대 재앙을 가지고 왔습니다. 죄와 죽음의 재앙, 저주와 가난의 재앙, 질병과 육체의 죽음과 음부에 떨어지는 재앙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오고 난 다음 우리 신분에 변화가 왔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택한다는 것은 좋아서 택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편을 택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택하듯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모셔 드리면 왕 같은 제사장이 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사망과 음부의 세력을 멸하고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왕 같은 제사장의 자격을 우리가 얻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거룩한 나라가 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삽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마귀의 나라에서 삽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겨서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임금이 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시고 돌봐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소유하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로 소유하시고 성령은 우리를 인쳐서 등기이전을 하여 하늘나라 백성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굴러다니는 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귀하고 귀하게 간직하는 소유물이 된 것입니다.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품에 품고 계십니다. 이러한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버림받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자기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아니라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기 아름다운 자화상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바라보고 삽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알고 그 신분을 가슴에 품고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은총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고 받은 은혜를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 바로 선교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왔은즉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전달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 빛은 예수님 안에서만 비추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어떤 종교도 어떠한 형식과 의식도 철학도 도덕도 빛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새로운 자화상을 얻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확인하고 우리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당당한 지식과 믿음과 은혜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이 새로운 은혜 속에 들어오게 하시고 선교를 하게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는 31년 동안 선교사역을 했고 또 앞으로 더욱더 선교하기를 원합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자아상을 찾게 하여 주시고 잃어버린 신분을 찾아서 당당하게 인생을 승리로 살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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