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28∼30절
나를 비우는 일, 이해할 수 있으나 실천은 쉽지 않아
나를 죽이고, 버리는 것…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가능
하나님께 맡기는 것,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
열심히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과 이런 대화를 나눈적이 있습니다. “조 목사님 저는 제 자신이 죽고 예수님만이 내안에 사시도록 노력해도 제 자신이 좀처럼 죽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목사님은 “욕심을 다 버리고 내 자신까지 버려야만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겠는데 버린다 버린다 해도 쉽게 버려지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목사님들의 말에 동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살아있는 한, 마음을 비우지 않는 한 마음에 평화를 갖기는 대단히 힘이 듭니다. 독일의 대문호였던 괴테는 80세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단 몇 주 동안이라도 참으로 행복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내가 평안함을 느끼고자 할 때는 내 자아에서 벗어날 때였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존 메이슨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정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 내가 죽는 일
내가 죽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분명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그와 같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이론상으로는 확실히 알지만 실제적인 삶 속에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이럴때 우리는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물세례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물 무덤에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속에는 옛사람이 살아있고 죄의 유혹에 넘어 질 때가 많습니다. 내가 죽었다 죽었다 하면서 사실은 안 죽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자신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다. 이제는 예수께서 내 속에 살아계신다’고 큰 소리 치다가도 다른 사람이 와서 자꾸 화를 돋우면 ‘뭐 어쩌고 어째? 주님 잠시 비켜 계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옛사람이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나중에 크게 실망을 합니다. ‘내가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 너무나 팔팔하게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뭡니까? 죽는다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말합니다. 죽었으면 옛세계 옛사람은 반응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한 제자가 선생님께 찾아와서 “선생님! 옛사람이 죽는 것이 뭡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것을 알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데로 하거라! 내일 점심 도시락을 싸서 네가 사랑하는 옛날 친구 중에 죽은 사람이 있으면 그 무덤에 가서 애통하고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온갖 좋은 말로 칭찬해라. 그리고 난 다음에 점심 도시락을 먹고 오후에는 미워하는 친구 무덤에 찾아가서 발을 구르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로 차고 오너라. 그러면 내가 죽는 것이 뭔지 알려 주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점심 도시락을 싸서 사랑하는 친구의 무덤에 가서 오전 내내 칭찬을 하고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미운 친구에게 가서 발을 구르고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고 주먹을 휘두르고 온갖 욕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선생님께 가서 “선생님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하자 그 선생님이 웃으면서 “사랑하는 친구에게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칭찬하고 찬양할 때 무덤에서 친구가 뭐라고 하더냐?”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는 “아무 말도 안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선생이 “그러면 점심 먹고 미운 친구에게 가서 온갖 욕을 하고 발을 구르고 침을 뱉고 주먹을 휘두를 때 그 친구는 뭐라고 말하더냐?”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그도 역시 아무 말 안합니다. 죽었는데 무슨 말을 합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그래, 죽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너를 욕하는 사람에게도 반응하지 아니하고 너를 칭찬하는 사람에게도 동요하지 아니하는 관계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무슨 화를 내고 죽은 사람이 무슨 칭찬을 좋아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이해는 되나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장사지냈지만 실제는 아직 안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옛날과 관계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실제적으로 삶 속에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새사람으로 살아서 행동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왜 실제적으로 노력을 해도 안 될까요?
2.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 비워야 내가 마음이 평안해지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채워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버리고 비운 것 같다가도 나중에 보면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성자들은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좇으라는 것은 올바른 말씀입니다. 아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 이름을 위해서 집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자매도 부모도 자식도 전토도 버릴 수가 있습니까? 가능할 것 같지만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했고 또 그렇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아시시에 살던 성 프랜시스는 부잣집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 그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입고 있는 옷조차 벗어서 벌거벗고 누더기 옷을 갈아입고 평생을 걸인으로 살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다 비우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도 테레사 수녀도 모두 자신의 것을 다 버리고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은 세상인연 끊어 버리고 자신의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 위해서 살았는데 우리는 겹겹이 일련의 줄에 매여 꼼짝을 할 수 없습니다. 부모와의 인연을 어떻게 끊을 것이며, 부부인연을 어떻게 끊을 것이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식을 다 버리고 떠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사회적 인연도 있고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고 동창도 있고 지연도 있고 이런 인연이 겹겹이 묶여 있는데 우리가 버리고 다 떠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어떻게 버리란 말입니까? 이해는 되나 실천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께서도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3.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나의 옛사람이 죽고 자아를 비울수가 있을까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어느 동네에 부자가 와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나는 어릴 때부터 그것들을 다 지켰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직 한 가지 모자란 것이 있다.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떠나갔습니다. 돈이 많고 재산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때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약대가 어떻게 바늘귀로 들어갑니까? 그 제자들이 너무 놀라서 “주여!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옛사람을 버리고 욕심을 비워 버리는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일,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온갖 부작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집에서 급히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해서 가니까 그 집 아들이 열심히 교회 나오고 기도를 많이 하더니만 목을 매있는 것을 부모님들이 끌어내어서 겨우 살렸습니다. 왜 목을 맸냐니까 성경에 죽으라고 해서 목을 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죽으면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한번은 우리 교회 학교에서 열심히 아동을 가르치는 자매님이 수면제를 많이 먹고 거의 죽게 되어서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위세척을 한 후 빨리 기도하러 오라고 해서 내가 기도하러 갔습니다. 정신이 들 때 왜 수면제를 먹었냐고 하니까 세상을 버리고 떠나라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세상욕심이 마음에 붙어서 안 떠나기 때문에 수면제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죽고 버릴 수 있다면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사람이 죽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사람이 수면제를 먹고 세상을 떠남으로써 욕심과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는 일과 내가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내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희안한 비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옛사람이 죽고 세상과 탐욕을 버리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해주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끌어 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장사 지내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옛사람을 죽여 버리고 우리 옛사람을 비워 버리고 옛사람을 떠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옛사람을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버리고 그리스도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55편 22절에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말했으며, 베드로전서 5장 6절로 7절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았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내고 부활하고 비워 버리는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난 다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지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 죄를 범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저주를 다 청산하시고 이것을 이룰 수 있도록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다른 점은 믿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보혜사로 와 계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는 신앙생활 못합니다. 구약시대도 율법의 짐을 짊어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자기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화받고 세상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믿어도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기도할 때 성령이 우리에게 변화를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성령이 가능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회개하게 해주시고 성령이 기도하게 해주시고 성령이 믿게 해 주시고 성령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힘으로 능으로 안되는데 인간의 힘과 능으로 자살을 하거나 수면제를 먹고 옛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떠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성 프랜시스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나 그렇지 않으면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힘으로 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성령이 내 속에 와 계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와주심을 믿어야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믿어야 됩니다. 세상과 마귀를 떠난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를 믿으라. 내가 해주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죽고 자신을 비울 수 있는가. 그 방법과 결과는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 길을 열려고 애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죽습니까? 내가 어떻게 자신을 비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역사로써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옛사람이 죽고 내가 세상을 비울 수 있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자리에 그리스도가 살아나고 내가 비운자리에 예수님이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죽으면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비워지면 내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사십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십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5만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를 찾아와 하나님께 응답받고 축복받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죽었습니다. 조지 뮬러라는 사람은 아주 철저하게 죽었습니다. 나의 편해가 죽고 나의 기호가 죽고 나의 의지가 죽고 나에 대한 세상의 인정이나 비판도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나 형제들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서도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오직 주께만 의지하고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살고 있습니다” 조지 뮬러가 기도하는 문제마다 응답을 받은 것은 자기를 버리고 주님만을 앙망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소용돌이치는 환경 중에 한없이 부딪혀오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하고 내가 비워지고 버려져야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팔팔 살아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역사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득 차 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죽고 내가 비워질 수 있는 길은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되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전능한 하나님으로 이런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같이 불같이 생수같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계시며 24시간 떠나지 않습니다.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면 성령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죽는 것도 버리는 것도 비우는 것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사와 이적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참 평화를 갖고 권세와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비워지고 그리스도로 채워져야 되겠는데 아버지 내가 죽는 것과 내가 비워지는 것은 나의 힘과 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애써도 안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비워지고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일은 성령이 해주시는 일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기도하오니 성령으로 아버지여 기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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