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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곳
2005.04.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1∼6절


집과 가족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행복한 가정이 된다
그 나라와 그 의 먼저 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 삶 모든 것 책임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비한 저 천국이 우리의 영원한 있을 곳


겨울동안 조용하던 산과 들에 봄이 오면 갑자기 새소리로 가득해집니다. 우리들은 ‘봄이 오니 새들이 기뻐서 저렇게 요란스럽게 노래하는가’라고 여기지만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둥지 틀 곳이 필요합니다. 그 때문에 새들은 자기가 있을 곳을 차지하기 위하여 또는 이미 자기가 둥지 틀 곳을 선점해 놓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그렇게 소리 높여 지저귄다고 합니다. 동물들도 자기가 사는 지역을 지키기 위하여 피를 흘리며 싸웁니다. 사람의 삶도 있을 곳과 서로 분리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1. 몸은 가장 기본적인 있을 곳

 

 육체는 우리가 거쳐야할 가장 기본적인 있을 곳입니다. 육체가 무너지면 있을 곳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몸의 주인은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몸이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몸에 있을 곳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22절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온 몸에 약 공장을 가동시켜서 양약을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마음에 기쁨이 우리의 몸속에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니 우리 몸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14절에도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이 상하면 몸도 함께 파괴되는 것입니다. 건강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최소한도의 있을 곳이기 때문에 건강을 잃어버리면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병들었을 때만 병원에 가고 야단법석하지 말고 건강할 때 우리 스스로를 지키면 늘 평안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잠언 3장 7절로 8절에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면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없고 악을 행하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대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면 이것이 몸에 양약이 되고 골수로 윤택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은 참으로 양약이 되고 골수로 윤택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무병장수하게 합니다.
 미국 데일리 뉴스 예방의학전문가인 피터 한센 박사는 건강을 위한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3대 비결은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한 식생활을 하면서 술, 담배, 과로, 수면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을 지키는 50%의 비결 이라고 말했었습니다. 나머지 50%의 건강관리법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을 하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져 병균을 물리치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몸에 저항력이 사라집니다. 쉽게 병들고 몸이 허약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보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성경에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이웃보다도 먼저 자기에게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전이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전을 우리가 잘 보존해야 될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가정이란 있을 곳

 

 우리가 살면서 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가정이 없고 집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가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집단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이면서 한마음, 한 몸이 되어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족이 모여서 사는 집이 있다는 것이 평안의 조건이 됩니다. 가족도 없고 집도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가족이 함께 모여 가정을 이루고 살 집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이 사글세방이든, 전세방이든, 임대주택이든, 사택이든, 개인주택이든 있을 곳이 있어야 사람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살 집이 없을 때 불안해집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위를 보면 집값이 자꾸 오르고 내 집 마련의 꿈이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하고 사회가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03년 이혼사유는 부부불화가 70%로 가장 많았으며 경제문제로 인한 이혼비율이 16.4%로 10년전 2.4%에 비교하여 돈 때문에 이혼건수가 7배로 급증해 있습니다. 통계청이 작년 6월 전국 3만3000 가구를 조사해 보면 결혼 후 내 집 마련 기간은 평균 10년 1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난 다음에 10년을 하루같이 저축하고 노력해야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 집을 마련하기 전에는 늘 마음에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민을 간 한국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혹은 철야로 일을 하면서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을 하면서 내 집 마련을 합니다. 이국땅에 가서 외롭고 불안하니까 내 집 마련을 해서 마음에 안정을 얻으려고 무수히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이 있고 가족이 있어도 그 집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만 사랑과 정의가 가득한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아무리 집이 있고 가족이 있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가정은 가정이 아닙니다. 서로 물고 찢고 싸우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시편 128편 1절로 2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살면 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손으로 수고한데로 먹고 하는 일이 형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모신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가정이 있고 집이 있어도 하나님 계시지 아니하면 그 가정에 사랑이 사라지고 정의가 없어지면 허무맹랑한 가정이 됩니다. 야웨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직장이란 있을 곳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직장이란 있을 곳이 있어야 됩니다. 직장이란 있을 곳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직업이나 직장은 삶의 터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원시시대로 말하면 사냥터가 바로 직장입니다. 사냥해오지 못하면 굴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이 굶어죽습니다. 직장이 없을 때 직업이 없을 때 마음이 불안합니다. 직장과 직업은 우리가 사회 있을 곳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 12장 11절에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05년 4월 현재 우리나라의 실업자는 90만 7000명으로 3.9%의 실업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변한 청년실업률 역시 41만 1000명으로 8.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문제는 우리한국에 대학 진학률이 80.7%입니다. 그렇게 많이 대학을 갑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 사람은 56.4%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자의 취업률은 60.1%에 불과합니다. 청년실업률이 우리 한국에 큰 문제입니다. 
젊은 청년들이 불안하고 초조한 것은 사회적으로 있을 곳이 없이 떠돌이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노동연구원의 한 연구원의 말에 의하면 실제 실업률은 정부의 공식발표보다 두 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정부의 공식수치는 단순 아르바이트인 파트타임 근무까지 취업인원으로 포함시키기 때문입니다. 직장은 사회적인 있을 곳입니다. 직장이 있어야 자기의 정체성이 확인됩니다. 직장이 없으면 내가 누군지 모릅니다. 떠돌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소속감을 상실하고 상호교통도 갖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 후 명함이 없는 상실감을 맛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 있을 곳인 직장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정체성을 찾습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어서 명함을 내밀 수 없게 되면 소속감과 정체성 모두를 잃어버리고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장의 있을 곳이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4. 국가란 있을 곳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국가란 있을 곳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가는 국민들이 있을 땅입니다. 우리가 독도 문제로 일본하고 밀고 당깁니다. 분명히 우리 땅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강제적으로 자기 땅이라고 궤변을 하기 때문에 우리 국민이 분노해서 일어난 것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는 국민이 있을 곳입니다.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서러움을 겪은 유대인을 보십시오. 유대인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라 살고 범죄 함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온 천하만국으로 흩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핍박을 당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 히틀러에 의하여 600만명이 참살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큰 비극인 것입니까? 우리도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잃고 36년간 종살이한 한 서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을 36년 동안 점령하고 우리에게 가혹한 행위를 한 것을 보통으로 생각합니다. 때린 사람은 때린 것을 잊어버리지만 맞은 사람은 영원히 아픈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를 점령해서 우리를 수탈한 것을 잊어버리고 혹은 더 잘했다고 변명하지만 수탈당한 우리는 그 고통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국가 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우리는 겪어서 잘 압니다. 우리는 1910년 일본에 나라를 잃고 36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공인된 국가로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세계는 나라 없는 민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로 6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번영하고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되고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번영하고 복을 받고 강성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5. 영원한 있을 곳

 

 영원한 있을 곳이 없으면 영원히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가정이 있고 집이 있어도 사회적인 있을 곳인 직장이 있어도 그리고 나라가 있어도 이것은 모두 다 잃어버릴 것을 전제로 한 것들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빼앗길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있을 곳이 없으면 우리는 영원한 나그네가 되고 맙니다. 사람이 지구상에 잠시 살다 떠난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90편 3절로 4절에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사는 것이 눈 깜박할 사이입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20대같은 생각이 드는데 벌써 70세가 되었습니다. 거짓말 같습니다. 살아온 것이 꿈결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입니다. 아마 아담, 하와가 지금까지 살았을지라도 잠시 살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땅에 영원히 있을 곳을 알지 못하고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인생들은 정말 허무하고 무의미한 인생을 삽니다. 대중 가수 최희준씨의 하숙생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아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간다’
 너무나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맹랑한 고백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를 안 믿고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모두 다 허무합니다. 죄책에서 놓여날 수도 없고 허무와 무의미를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살았는데 이 땅에 있을 곳이 많던 사람입니다. 건강하고 좋은 집에 권세 있는 직업에 호의, 호식하고 방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문밖에 쭈그리고 앉아서 얻어먹는 거지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 있을 동안 노숙자요 병들고 집이 없고 직업도 없고 정신없이 걸식하고 산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0절로 21절에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부자는 있을 곳이 많았고 거지는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을 곳은 얼마 안가서 다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영원히 있을 곳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2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빌려온 인생터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도 빌려온 것, 가정도 빌려온 것, 직장도 빌려온 것, 나라도 빌려온 것 이 세상에 전세방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언제고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떠나서 갈 곳이 어디겠습니까? 거지도 죽었습니다.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천사에게 받들려 낙원으로 들어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이 세상 있을 곳에 들어붙어서 영원히 건강하고 영원히 호화로운 집이 있고 영원히 직장이 있고 영원히 자기 나라가 왕성할 줄 알고 세상만 잡고 있다가 죽음으로 다 잃어버릴 때 그는 저편 하늘나라에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 불꽃 가운데서 고통하며 쳐다보니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을 보고 탄식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어 손에 냉수를 찍어 물 한 방울로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중에 고민하나이다”
 인간의 운명은 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영원히 결정됩니다. 영원한 안식이냐, 영원한 고통이냐, 영원한 평안이냐, 영원한 슬픔이냐를 이 땅에서 우리가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알고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9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선생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두엄 밭에 뒹굴어도 이 세상이 좋다고 하는데 주님 따르는 바울선생은 육신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땅에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섬기고 사는 우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어도 불안, 초조, 좌절, 절망하는데 영원히 있을 곳이 없을 때 얼마나 당황하고 당혹하겠습니까? 우리의 육신은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영원한 처소는 하늘에 있습니다. 천국에 가야 비로소 우리가 영원히 편안히 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있을 곳은 얼마 후에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죽음은 육체적인 몸도 가정도 직업도 사회적 있을 곳도 나라도 몽땅 빼앗아 갑니다. 영원한 있을 곳이 없을 때는 영원히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시고 낭랑한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6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가는 길을 여시기 위해서 육신을 쓰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친히 매달려 몸 찢고 피 흘려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청산하시고 하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보혈로 레드 카펫을 깔아 놓고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예수를 믿고 나가면 아버지 나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예비하신 영원히 거할 처소로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눈물과 근심과 탄식이 없는 나라입니다.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죽을 몸이 영원히 살 몸으로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육신의 몸이 영의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있을 곳입니다. 주님은 이 곳에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영원한 있을 곳이 있으면 이 땅에 있을 곳이 있으면 있는대로 감사하고 없어도 그로 말미암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월은 흘러가고 우리는 곧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모두 다 있을 곳을 찾고 있습니다. 건강한 몸, 가정, 직업, 국가, 세상에 있을 곳을 찾아 방황하지만 있을 곳을 얻은 사람은 잃을까 걱정하고, 있을 곳이 없는 사람은 있을 곳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아버지, 영원히 있을 곳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비 되어 있사오니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게 하옵소서. 그 안에서 영원히 있을 곳을 마음에 확신과 평안을 가지고 잠시 있을 세상을 믿음과 담대한 마음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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