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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려 움
2002.08.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본문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장 18절)

우리는 매일 수많은 두려움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그것이 크든 작든 그 안에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질병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불행에 대한 두려움, 인정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버림당할까 하는 두려움, 재난에 부딪칠까 하는 두려움 등 그 두려움이 어떤 것이든지 오랫동안 마음을 점령하게 되면 재앙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죄를 범하고 형벌을 받는 것처럼 두려움도 그에 따른 형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마음에 부정적이고 무서운 과대망상을 일으켜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용기를 잃게 하고 담력을 잃게 하며 당황하며 낙심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무력화하고 패배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원수에게 저항할 힘을 잃게 만듭니다. 왜 우리는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까?


1. 죄가 주는 두려움

인간은 두려움 없이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 속에 사는데 두려움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사랑을 잃어버리자 비로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온전한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했는데 사랑의 관계가 두절되면서 그 자리를 두려움이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8절로 10절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죄하기 전 인간들은 하나님이 오시면 반기며 뛰어 나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동산을 거닐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자 하나님의 음성이 두려워지고 그 결과 숨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잃어버리자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범죄하여 양심이 벌거벗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 공포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하여 두려움에 떠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후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가 없어 떨고 있는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처음으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인간들이 범죄하기 이전에 에덴동산에는 피흘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그 벌거벗은 몸을 입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 그들에게 옷을 입혔습니다. 죄의 값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짐승이 죽고 피를 흘리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그 의의 가죽을 벗겨 우리를 입히실 것을 창세기에서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인한 대속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의의 의복을 받아 입는 것 이외에는 부끄러움을 덮을 도리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로 앞치마를 해서 입었으나 햇빛이 비치자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아무리 앞치마를 해 입어도 수치를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힐 때까지는 수치를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수양이나 도덕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덮고자 애써도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수치와 곤욕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몸찢고 피 흘려서 죽으시고 그 결과로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와 의의 옷을 받아 입기 전에는 수치가 덮여지지 않고 그로 인한 마음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33절로 34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용서와 의를 주시므로 아무도 그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2. 마귀가 주는 두려움

죄로 말미암아 오는 두려움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죄의 용서를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지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이유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제게 오는 인터넷 편지 중에서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종종 봅니다. 그들은 앉아도 두렵고 서도 두렵습니다. 일이 안 될 때도 두렵고, 일이 잘되어도 불행이 다가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유없는 두려움인데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유없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습니다. 사랑과 능력과 건실한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심을 가져다줍니다.

마귀는 먼저 두려움으로 우리를 공격해 무력화시킨 후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합니다. 욥기 3장 24절로 26절에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시험과 환란을 당하기 전에 이미 그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무서움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먼저 욥에게 두려움과 놀라움을 갖다 주어 그를 무력하게 만들고 저항력을 없애 버린 다음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사자가 으르렁거리며 다닙니까?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짐승들이 두려워서 저항력을 잃게하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먼저 불안과 공포심을 주고 그 다음에 재난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이고 불길한 생각을 차단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기 신분을 깊이 인식해서 부정적이고 불길한 생각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확실히 알게되면 굳세어 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은 자기 신분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마귀와 세속이 쫓겨 나가고 성령충만과 거룩함을 얻은 자기 신분을 확인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마음의 병과 육체의 질병에서 해방되고 놓임을 받았다는 당당한 주권을 가진 자라는 자기 신분을 인식해야 됩니다. 또한 저주와 가난이 다 청산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사는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됩니다. 사망과 음부가 철폐되고 부활과 영생과 천국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신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마귀가 와서 마음대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알면 우리는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생각이 다가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대적해야 됩니다. 불길한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오는 것을 마음속에 그대로 받아 들이면 안됩니다. 말씀에 서서 부정적인 생각이나 불길한 생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대적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굳세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무서워 떱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므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고 성령과 함께 삶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찬양을 그치지 말아야 됩니다. 찬양 중에 거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이 찾아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여 군대가 지키듯 지켜 주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쳐들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두려움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조사해보니 40%는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고, 50%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고, 10%만이 현재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실상 90%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죽은 미국 군인의 수가 30만명이었는데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보내고 두려움 때문에 심장병으로 죽은 시민수가 1백만명이 넘었습니다. 적군의 총칼에 맞아 죽는 것보다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죽는 수가 더 많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환경이 주는 두려움

천신만고로 광야를 지나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는 열 정탐꾼의 보고에 의한 절망과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광야를 바라보고, 높은 성벽을 바라보고, 그 성에 사는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후 절망과 두려움에 대한 보고를 했을 때 그 두려움은 강한 전염성을 가져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며 땅을 치고 통곡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광야를 지나오며 체험한 하나님, 그들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열 정탐꾼과 함께 부정적인 생각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쫓겨나 40년만에 모두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민수기 14장 9절)고 말하며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열명의 정탐꾼의 보고에 두려워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벌을 받아 죽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14장 1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은 신앙의 반대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포기하면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요,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두려움으로 물에 빠진 베드로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배를 타고 먼저 가도록 독려했기 때문에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먼저 건너가는데 밤에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바람에 시달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줄 알고 무서워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이시어든 나로 물 위로 걸어오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명하시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마음속에 믿음이 있을 때는 그리스도와 능력으로 연결되어서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을 때 그 마음에 믿음을 잃고 두려움이 들어차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0절로 31절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상 베드로는 파도 때문에 빠진 것이 아니라 바람을 보고 무서워서 빠졌던 것입니다. 믿음이 들어오면 두려움은 쫓겨 나가고 두려움이 들어오면 믿음이 쫓겨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절로 3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의지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을 내어쫓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언 17장 22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을 때에 우리는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유없는 두려움은 마귀가 가져오는 것이므로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해서 내어쫓아야 되는 것입니다.

4. 인간을 의지할 때의 두려움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배를 타고 가면서 대화의 꽃을 피우다가 예수님을 주무시게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큰 풍랑을 만났으나 그들은 풍랑속에서 배를 안전하게 저어갈 수 있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역부족을 통감하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를 살려 주시옵소서’라며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자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을 의지할 때는 두려워했으나 예수님을 의지할 때에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예수님이 물결을 잠잠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을 의지할 때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기에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믿음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의지한 사울왕과 그 군대는 골리앗을 두려워했습니다. 블레셋 군대 중 거장 골리앗이 싸움을 걸며 40일 동안 고함을 치는 바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불안과 공포에 떨며 무력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1절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력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2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두려움을 내어쫓은 것입니다. 두려움이 들어오면 믿음이 사라집니다. 사울과 그 군대는 믿음이 없었으나 다윗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워서 그를 물리쳤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보십시오. 다윗은 시편 27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그의 빛으로 삼고 구원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들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에서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면 마귀는 그 두려움을 통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그러나 마음에 믿음이 있으면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론조사 결과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점술을 믿고 있으며, 궁합이 나쁘면 결혼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응답자의 3분의 1이나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므로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을 장사 밑천으로 삼는 것이 사주, 팔자, 궁합입니다. 사주, 팔자, 궁합이란 두려워하여 떠는 사람에게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해주고 돈벌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 오는 수많은 인터넷 편지를 보면 사주팔자를 보고 난 다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다가 구원해 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신분이 확실한데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면 그에 해당하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두려움에 대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죄를 회개하고 보혈로 씻음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오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 강하고 담대하게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즐기고 확신한데 거하며, 주님 안에서 받은 새로운 신분을 확실히 갖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사물을 바라보며 항상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자랑하고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살게 될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을 얻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갖고 확신에 찬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말씀을 읽고 성령 충만하여 당당하게 살아나갈 때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승리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인생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나 믿음을 가지면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두려움에 떨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이 깨어졌을 때 또 마귀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여 이유없이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마귀를 물리치게 도와 주시옵소서.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도와주시고 운명과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또한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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