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향기
2012년 올 해의 대상은 당신입니다!
  • 매년 이맘 때 쯤이면 브라운관에서는 채널마다 ‘가요대상’ ‘연기대상’ 등 여러 종류의 시상식을 방영합니다. 한해를 가늠하는 차원에서 시상식 프로그램은 수상자에게는 물론 보는 이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누가 어떤 분야에서 가장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상자는 주마등처럼 흐르는 지난 세월 때문인지 한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가족은 물론 스태프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공을 돌리기도 합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그런 일인자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문득 ‘신앙 대상’이라고 없으란 법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해 동안 신앙면에서 많은 이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이를 뽑아 상을 주는 신앙 대상, 생각만 해도 재밌습니다. 기왕 재미난 상상에 들어간 김에 어떤 사람들이 후보로 오를까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단연 ‘아프리카 고아들의 어머니’ 임연심 선교사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1984년, 아프리카 1호 선교사로 파송돼 무려 28년 동안 굶주리고 헐벗은 고아들을 돌보다 생을 마감한 임 선교사님. 문맹률 95%인 투르카나에서 고아들을 사랑으로 먹이고 입히며 꿈을 키워주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오늘날 그 땅에 교사와 공무원, 의사로 성장했지요. “왜 꼭 저여야 합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몇 번씩 확인을 하고 싶었다는 임연심 선교사님의 솔직한 이야기는 그 역시 보통 사람이지만 결국 순종으로 그 길을 걸어갔음을 알게 해줍니다. 제가 아는 한 집사님은 임연심 선교사님의 부고를 듣고 배부르고 편하게 살아온 지난 삶이 후회되고 미안해 스스로를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임연심 선교사님 혼자 너무 많이 감당하셨으니 뒤늦게라도 진 빚을 갚아야겠다고 했죠. 그래서 알뜰살뜰 모아놓은 돈을 선교 헌금으로 내놓으셨는데, 몸이 아닌 돈으로 빚을 갚는 자신에 대해 또 한번 부끄러워했습니다. 그 집사님이 전해준 울림 역시 임연심 선교사님의 그것만큼 강하고 깊었습니다. 영국에서 유학 중인 제 친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잘 나가는 금융맨이었던 그들은 뒤늦은 나이에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거기서 뜻하지 않게 ‘비주류’의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타지에서 못난 자격지심이 솟구칠 때마다 두 부부는 손을 맞잡고 하나님이 주신 본연의 온전한 자아로 회복시켜 달라며 기도한다지요. 얼마 전에는 내로라하는 국제기구 인턴직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합격 소식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부부의 다음 이야기였습니다. 국제기구라는, 세상에서 좋아 보이는 허울이 헛된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기를, 혹이라도 그 기쁨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보다 더 크고 중요해지지 않기를 기도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과연 올해의 대상일까, 인기상이나 신인상 같은 건 없을까 혼자 재미난 상상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로마서 12장 3절) 각각 믿음의 분량대로의 올해의 행함에 상주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다. 그것도 인기상이나 신인상이 아닌 제대로 대상 주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다. 축하합니다. 2012년 올해의 신앙 대상은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입니다. 황여정 (자유기고가)
  • 2012.12.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 따뜻한 성탄절을 위하여
  • 아주 어릴 적 성탄절 무렵엔 항상 함박눈이 내렸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기억 속의 성탄절은 항상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거리마다 캐럴이 넘쳐 났습니다. 동네 레코드 가게 바깥에 세워진 사각 앰프는 하루 종일 루돌프 사슴코를 불러댔습니다. 동방박사가 등장하는 성극을 연습하고 성경구절을 열심히 외웠던 것 같습니다. 성탄 전야, 허름한 개척교회 예배당이 가득 찼습니다. 교회에 얼굴도 비치지 않던 어른들이 자식들의 재롱잔치를 보러 왔습니다. 평소에 꿈도 못 꾸던 과자랑 사탕이랑 가득 담긴 선물 꾸러미를 받아들고 흐뭇해했습니다. 성가대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며 골목길을 누벼도 시끄럽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부족하진 않았던 성탄절, 기온이 아무리 떨어져도 온기를 잃지 않던 성탄절, 교회에 다니지 않던 사람도 괜히 들떠서 예배당 문을 두드렸던 성탄절, 그래서 누구에게나 따뜻한 성탄절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성탄절이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취업하느라 바빠서, 그리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성탄절은 그냥 공휴일 비슷한 것이 됐습니다. 예수님 생일로서의 ‘성탄절’보다는 축제일로서의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더 익숙해졌습니다. 외래어가 갖는 이국적 느낌은 주목성을 높이는 반면 종종 본질을 모호하게 만드는 역효과가 있습니다. 특히 대중매체와 유통업체가 만드는 크리스마스는 ‘예수탄생일’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잔칫날’에 가깝습니다. 연인과 데이트를 즐기거나, 쇼핑을 하거나,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무엇인가를 하며 놀아야 크리스마스를 잘 보낸 것이 돼 버렸습니다. 교회는 커지고 화려해지고 넉넉해졌지만 오래전의 그 따뜻했던 분위기는 많이 퇴색된 것 같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워낙 크다보니 구태여 예배당을 찾지 않는 탓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교회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탓도 있습니다. 사회를 향해서 성탄의 참 의미를 일깨우는 출발은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날씨보다 더 추운 경제 한파의 시대입니다. 약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겐 당장 물질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정신이 공허한 시대입니다. 삶의 목적을 잃고 낙심한 사람들에겐 위로가 필요합니다. 성탄의 정신은 약하고 병든 죄인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 없어도 행복했던 성탄의 기억 중 일부는 과장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의 허름한 가건물 예배당 안이 지금보다 따뜻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성도도 가난하고 목사도 가난하고 전도사도 가난하고 교회도 가난하지만, 크고 높은 꿈이 있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이웃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과거와 다름없는데, 그 때와 달리 우리가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추위를 느끼는 것은 교회가 바뀐 탓일까요? 세상이 바뀐 탓일까요? 내가 바뀐 탓일까요?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나신하 기자(KBS)
  • 2012.12.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투표 합시다!
  • 12월 19일 제 18대 대통령선거일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곳곳에 후보자들의 현수막이 나부끼고 유세차량들의 확성기 소리가 요란합니다. 더욱이 같은 날 치러지는 보궐선거 후보자들, 또 투표 독려 현수막까지 더해져 거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습니다. 사실 대통령의 책임은 막중합니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①국가의 원수로서 외국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며, ②국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영토와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고, ③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와 ④정부의 수반으로서 행정을 총괄 지휘할 책무를 지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대통령은 대한민국호의 선장입니다. 5천만 국민들을 자유, 민주, 번영의 항구로 인도해야 할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이기주의가 팽배한 무한경쟁의 국제사회에서 국력을 결집해 민족의 활로를 개척해 나가는 선봉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의 안보를 튼튼히 하고 민생을 두루 챙기며 국정을 주도해 나가는 것 역시 대통령이 해야 할 몫입니다. 이런 면에서 12월 19일 대선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결정짓는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그 마음의 성실함”과 “그 손의 공교함으로”(시 78:72) 나라를 잘 이끌 좋은 대통령이 선출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 질 수 있기를 기도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반드시 투표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시대를 간파하는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지고 꼭 투표장에 나가 주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은 민주주의의 근간입니다. 그리고 그 실제적 표현이 선거와 투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투표권은 시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투쟁하여 쟁취한 값진 권리입니다. 국민의 보통·직접·평등·비밀 투표로 대표자를 선출하는 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 6븡25의 전장에서 수많은 호국용사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또 처연한 혁명의 현장에서 선열들이 고귀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그렇기에 투표권은 결코 기권해 버려서는 안 될 너무나도 소중한 권리입니다. 더욱이 조국이 어려울 때 마다 애국애족을 앞장 서 실천해 온 것은 한국 교회의 자랑스러운 신앙 전통입니다. 실제로 현대사는 기독교의 확산과 산업화, 민주화의 진전이 정비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2월 19일,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투표장에 나가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라사랑의 첫 걸음이며 행동하는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12.12.16 / 복순희 기자

    브라보 마이 라이프!
  • ‘브라보 유어 라이프’라는 보험 광고 카피가 있었다. 누구는 이 카피가 어법에 맞지 않는다고도 했단다. 그러나 언어란 감각적으로 확 와 닿으면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이 말이 좋다. 마치 내 인생이여! 힘을 내라! 브라보!하는 것 같아서다. 나이가 들어가는 즈음의 나는 나이가 드는 것도 축복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축복이라니, 미쳤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왕에 나이가 들어갈 바에는 이것이 “축복이다” 딱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세금을 더 내는 것도 아니다. 우거지상하고 있어야 아무도 도와 주는 사람 없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럴 듯 하더라. 나이가 드는 것은 경험도 많아지고 지혜도 생기고 이해력도 많아 진다는 것이다. 예전 보다 훨씬 좋은 환경 의료, 섭생, 운동, 지식, 인간관계 등이 있어 건강이 유지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내핍과 절약 그리고 살아내기 위한 고통 등 요즈음 젊은이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우리에겐 있다. 추위 더위 굶주림 가난 질병 정변 불공평 등 못 이겨낼 환경이 없다.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않는 요즘 세대와는 다른 생활력이 있다. 지나 놓고 보니 우리는 어느 상황이든지 적응 할 수 있는 능력이 강한 세대였다. 그런 능력이 있으니 그 아니 축복인가? 좌절 실패 통찰 관조 인내 자기 분수와 한계를 아는 것 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나이를 물을 때 미국 사람들은 하우 올드 아유?(How old are you?) 즉 얼마나 늙었느냐고 묻는다. 한국 사람들은 몇 살 이냐고 묻는다. 얼마나 살았느냐는 뜻이다. 한국 사람들의 말에는 지혜와 진리가 담겨 있다. 산다는 것이 힘겨울 지라도 한국인은 누구나 살만한 세월을 사는 것이다. 젊을 때는 미쳐 느끼지 못했던 것 작은 생명하나에도 연민을 느낄 수 있는 마음도 좋다. 원숙함, 통찰력, 안정감등을 느낄 때 살아있어 감사하다. 아직은 내발로 가고 싶은 곳 마음 대로 가고 먹고 싶은 거 만들어 먹고 자식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줄 수 있는데 뭘 더 바라나 싶다. 굉장히 거창한 것 대단한 성취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아직 많이 시들지는 않았음에 감사한다. 채소도 시들기 전에 물을 주어야 싱싱함이 오래 가는 것처럼 내 인생도 아주 시들기 전에 물도 주고 가꾸면서 살아야지.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내 인생아 힘내라. 브라보를 외쳐라. 힘이 솟아난다고 스스로에게 격려를 보내라. 브라보 마이 라이프! 김영숙 원장(가정문화원)
  • 2012.12.09 / 복순희 기자

    ‘엄친아’ 하나 부럽지 않다
  • 수능 가채점 결과가 나왔다. 내가 사는 서초동에는 동네가 동네인 만큼 수능 이후 연일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의 이야기가 한창이다. 올해 유독 어려웠다는 수리, 외국어를 모두 만점 맞고 언어에서 두 개 틀려 의대 진학의 고지를 앞에 둔, 건너 건너 아는 엄마의 사촌, 오촌, 육촌의 이야기가 끝도 없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대한민국 땅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한숨이 절로 쉬어진다. 올해로 9살된 내 아들, 앞으로 10년 뒤 어찌어찌 해서 대학을 들어갔다고 치자. 거기가 끝이 아니다. 낙타 바늘 구멍 같은 취업난을 뚫고 취직이라는 관문을 뛰어넘어야 한다. 저 혼자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땐 처자식 벌어 먹이느라 내 아버지가 그랬고, 지금의 내 남편이 그런 것처럼 ‘월화수목금금금’의 라이프스타일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괜스레 우울한 상상으로 얼굴에 그늘이 진다.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 아니 자식 인생도 참 덧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오늘 아침 ‘공유경제가 뜬다’는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요즘 같은 불황 시대에 빌려주고, 빌려쓰는 ‘흥부’ 스타일의 소비가 공유경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는 기사다. 정수기, 침대 렌탈은 기본적인 것이고, 이제 대형슈퍼에서는 LED TV, 냉장고까지 렌탈해 준단다. 또한 공유경제에서 더 나아가 우리나라는 공유도시를 만들기 위해 서울시에서 내달부터 카셰어링(승용차 공동이용) 서비스를 시작한단다. 차량이 필요할 때 가까운 주택 보관소에서 수시로 빌려 쓸 수 있는 서비스인데 30분 단위로 예약이 가능하고 시간당 임대료도 6000∼7000원 정도밖에 안된다고. 공유경제라… 입 안에서 낯선 신조어를 몇 번 되뇌이다가 문득 ‘내 자식도 공유 경제?!’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 내 품에 있는 내 자식도 공유경제임에 분명할 터다. 하나님이 장기 임대해주셨을 뿐, 소유자는 하나님이다. 장기 계약하다보니 마치 내 것인 양 착각한다는 게 문제다. “내 것을 자꾸 네 것이라고 주장하니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앞으로 3년마다 갱신하는 걸로 하고, 갱신 시마다 추가 요금을 내던가 해라!” 하나님이 이렇듯 야속하게 자식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으셔서 자꾸 잊나보다. 자식의 대학, 취업, 결혼 그리고 또 그 이후의 삶… 막막하게 느껴질 때면 자식 계약서를 꺼내 들여다보자. ‘내 자식이 아닌 하나님 자식. 지금 잠시 대여 받아 공유하고 있을 뿐, 본 소유권은 하나님’ 계약서 내용을 큰소리 내서 읽어본다. 소유자가 우리 하나님인데 뭐가 걱정인가. ‘엄친아’ 하나 부럽지 않다! 황여정(자유기고가)
  • 201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유럽에서 만난 ‘감사함니다’
  • 유럽의 오래된 도시로 출장을 갔습니다. 도착 첫날부터 시차 적응이 힘들었습니다. 대낮부터 정신이 몽롱하더니 초저녁엔 잠이 쏟아지고 이른 새벽엔 어김없이 눈이 떠졌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빠듯한 일정을 소화한 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호텔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인 메모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감사함니다’ 맞춤법은 틀렸지만 한 획 한 획 정성들여 눌러 쓴 티가 확연한 글자 다섯 개. 이것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하니 아침에 숙소를 나서면서 팁을 놓고 나온 생각이 났습니다. 물론 많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으레 그러는 것이라고 들었기에 기계적으로 반복하던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무심코 한 행동에 진심어린 감사 인사를 받은 것 같아 쑥스러웠습니다.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 팁을 내놓고 일을 나갔다 들어오면 감사 쪽지를 발견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방 청소를 맡았던 직원이 누구인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출장을 갔던 동료가 한국인처럼 보이는 직원이 방을 청소하는 것 같았다고 귀띔해줬을 뿐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방 청소와 정리정돈이 여느 호텔보다 잘 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직원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지 아니면 그냥 현지인인데 동양인처럼 보였을 뿐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낯설고 힘든 출장 중에 만난 ‘감사함니다’라는 쪽지는 다른 여행지를 다니고 귀국하는 순간까지도 쉽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의례적이고 어쩌면 약간의 도덕적 허영심의 깃든 행동에 대해 진심어린 답례를 받기는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호텔 방 청소는 가장 힘든 노동에 속합니다. 아침마다 처리해야 할 방 숫자가 많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 관심을 뒀다가는 제 시간에 일을 마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팁을 발견하면 그냥 챙겨 넣고 빨리 다음 방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바쁜 중에도 서툰 한글로 한 획씩 답례를 써내려갔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해옵니다. 그 직원은 참으로 선한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는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러나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남에게 주는 것은 꺼려하고 받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는 세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서운함에는 더 예민하지만 고마움에는 둔감해지고 있습니다. 나이, 직업, 학벌, 빈부와 관계없이 공통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나서 지금 이 순간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것 하나로도 감사할 일인데, 혹시 나는 아직도 ‘나에게 조금 더 주십시오’만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회개할 일입니다. 성경은 온통 감사와 기쁨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작은 일에 감사하면 기쁨이 찾아오고 활력이 되살아나고 용기가 샘솟습니다. 감사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노력해볼 일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반복하면 잃어버린 감사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지치고 피곤하다면 ‘감사’를 오래전 잃어버렸거나 잠시 잊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신하 기자(KBS)
  • 2012.11.18 / 오정선 기자

    대입 수험생들에게
  • 구국의 성웅으로 존경 받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의 인물입니다.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그가 전라좌수사라는 정3품의 중직을 맡았을 때의 나이는 47세였습니다. 서애 유성룡 등을 비롯한 친구나 지인들에 비해 몹시 늦은 입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순신은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기간 뜻을 못 펴게 되면 자포자기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어느 위치에 있건 한 결 같이 자신을 갈고 닦으며 대망의 그날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13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지난 목요일 치러졌습니다. 예년처럼 수험생들을 위한 다양한 종합대책이 마련 시행되었습니다. 출근시간들이 조정되고 각종 교통편의가 제공되었습니다. 심지어 듣기평가 시간에는 고사장 주변의 항공기 운항이 전면 통제되고 열차의 경적사용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대입수능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심과 배려는 대학입시가 차지하고 있는 막중한 사회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단 하루 단 한 번의 수능고사로 삶의 행로가 결정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대학은 인생이라는 마라톤 코스 중 의미 있는 한 지점에 불과합니다. 42.195㎞를 달리는 경주에서 5㎞ 구간이나 반환점을 먼저 통과한 선수가 반드시 결승점에 1위로 선착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학에 진학했느냐, 못 했느냐, 혹은 어느 대학에 들어갔느냐가 삶 전체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수능이나 대입 결과에 좌절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자만해서도 안 됩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미래를 긴 안목으로 보는 지혜입니다. 삶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남 보다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목표를 향해 꾸준히 바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성경에도 다윗이나 다니엘처럼 연소할 때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인물이 있는가 하면,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연만하여 주님의 소명을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화사하고 강렬한 봄꽃을 닮은 삶이 있는가 하면 구절초나 국화처럼 그윽하고 고결한 가을꽃 같은 인생도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삶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시험 성적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수험생 여러분들은 이미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주님 안에서 펼쳐질 찬란한 내일이 약속되어 있기에 여러분들 모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변함없는 우리들의 꿈나무인 것입니다. 수험생 여러분! 사랑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12.11.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나” 독립 만세
  • 얼마 전 ‘넝쿨째 굴러 온 당신’이란 연속극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너희 집 현관 비밀번호가 뭐냐”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시어머니들 사이에서 과연 그걸 물어야 하나 안 물어야 하나가 논쟁이 됐었다. 우리 아들이 결혼을 할 때도 “함께 살자 말자” 할 분위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분가하는 걸 당연히 받아들였다. 분가를 해도 요즘엔 오라 소리를 안 하면 불쑥 가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시어머니로서 젊은 애들이 어떻게 사나 궁금하기도 하고 내 아들에게 뭘 해 먹이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사실 딸네 집이나 며느리 집에 가면 새살림이라 반짝반짝하고 깔끔한 게 보기 좋았다. 그러다 내 집에 오면 묵은 살림에 짝 안 맞는 그릇 등을 보며 내심 ‘나도 확 다 버리고 새 걸로 좀 사?’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이고, 얼마나 더 살겠다고 다 바꾸나’ 그러면서 궁상떠는 내 모습이 싫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여기 저기 아픈 곳도 생긴다. 마음은 봄을 타고 몸은 가을을 탄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어느 날 며느리한테 여기저기 몸 아프단 얘길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때 내 딸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어머니는 맨날 아프데서 전화걸기 싫어.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하셔. 한번은 119를 불러 병원 가셨다고해서 허겁지겁 병원으로 갔는데 의사가 괜찮다고 하잖아. 그래서 한숨 돌리고 집에 왔지. 다음날 전화하니 퇴근하고 오라 하시는 거야. 엄마, 내가 놀아? 애 안 키워?”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났다. ‘아, 내 며느리도 내가 징징대면 이런 기분이겠다’ 싶었다. 나이가 들면 실제로 여기 저기 아픈 곳도 많아지고 정서적으로도 누군가와 더 많은 유대를 갖고 싶다. 내가 자꾸 잊혀질 것 같아 걱정도 많아진다.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바깥 활동에서도 자신감이 없어진다. 100세 시대라고 한다. 나이 칠십도 결코 노년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장년이라고 한다. 장년이면 아직 역할도 더 많고 스스로의 역할을 더 만들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사는 사람은 누구랑 말 할 사람이 없어서 더 외롭다. 무언가를 하나 정해서 배워보는 게 어떨까? 그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해 가면서. 내 인생에 내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누가 나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말은 아이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장년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말이 됐다. 나는 이제 한 인간으로서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 대한 독립 만세가 아니라 ‘나’ 독립 만세를 외쳐야겠다. 김영숙 원장(가정문화원)
  • 2012.11.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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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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