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진의 미디어 엿보기
수다쟁이 FM라디오
  • < a> 수다쟁이 FM라디오 방송사간 치열한 청취율 전쟁이 원인 3D입체영상이나 가상현실(VR) 등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오디오만을 주축으로 하는 라디오는 일견 ‘한물 간’ 매체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학술지 ‘코뮤니카시옹 에 랑가주’의 최근 연구는 음성매체가 결코 영상매체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실험결과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프랑스 오를레앙 대학의 학생 110명을 영상뉴스 시청 그룹과 음성뉴스 청취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기억나는 주제를 쓰도록 한 결과 먼저 영상뉴스를 시청한 그룹은 508개의 주제를 기억해냈으나 음성뉴스를 청취한 그룹은 528개의 주제를 기억해내어 음성매체의 정보전달력이 영상매체를 앞선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레저활동인구 증가, 교통혼잡도 심화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동차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라디오는 영상매체와는 차별화된 고유의 기능을 수행해야할 필요성을 요구받고 있다. 20세기초 라디오의 발명 이후 근 100여 년만에 라디오라는 ‘올드미디어’가 또 다른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음질은 떨어지지만 전파도달거리가 길어 뉴스 등과 같은 시사정보 프로그램에 유용한 AM방송에 비해 FM방송은 VHF전파의 물리적 특성으로 인해 특별히 음악 프로그램에 적합한 매체이다. 특히 FM라디오의 넓은 주파수 대역은 별다른 기술적 어려움 없이 스테레오 방송을 가능케 함으로써 ‘FM방송 = 음악방송’이라는 명제가 상식화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의 FM방송은 음악위주(LESS TALK - MORE MUSIC)의 전통적 특성에서 벗어나 잡담과 사담위주의 토크위주(MORE TALK - LESS MUSIC)로 흐르고 있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연말 KBS, MBC, SBS 등 방송 3사 FM방송의 구성비율을 살펴본 결과, 음악과 토크의 비율이 거의 1:1에 달할 정도로 FM방송은 ‘수다’스러운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렇다면 ‘FM라디오 = 음악방송’이라는 명제를 깨뜨릴 정도로 토크의 비율이 높아져 가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텔레비전의 시청률 경쟁과 마찬가지로 라디오도 방송사간에 치열한 청취율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토크비율 증가의 대표적인 원인이 된다. 이렇듯 청취율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어떤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다더라하면 그것을 따라하게 되고 결국 ‘고만고만한’ 프로그램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 ‘잘나가는’ 연예인을 모셔와 마이크를 잡게함으로써 청취율을 높여보려는 스타시스템의 얄팍한 사용도 최근 FM방송의 특징을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최근 FM 프로그램들은 ‘잡식성’ 모방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자사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경쟁관계에 있는 타사 프로그램, 심지어 매체성격이 상이(相異)한 텔레비전 프로그램까지 ‘베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라디오가 자체의 독자적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텔레비전에 종속된 하위매체로 전락되고 있는 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특히 FM 프로그램 진행자의 대부분이 가수, 탤런트, 개그맨 등 주로 텔레비전을 통해 대중과 친숙해진 인물들로서 이러한 연예인들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는다는 것은 라디오의 진행인력이 전적으로 텔레비전에 의해 키워지고, 텔레비전을 통해 알려진 인력에 의존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길들여진 비디오형 연예인이라는 점에서 사실 오디오를 주요 미디어로 삼는 라디오에는 부적절한 인력들이다. 텔레비전에서 인기를 얻은 연예인들을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요 진행자로 기용하는 잘못된 관행이 결국 라디오 프로그램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부터 차별화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의 상당수를 텔레비전에 의해 배출된 스타시스템에 의존한다는 것은 청취율 향상이라는 ‘당근’을 가져다 줄 순 있으나 결국 여러 가지 부작용을 야기하게 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행자로서의 자질문제로, 이것은 문제언어의 남용과 연결된다. 특히 연예인의 경우 본인의 개성을 프로그램에 덧씌우기 위해 무분별한 유행어 남용, 친근감을 강조하기 위한 반말의 과도한 사용 등 그로 인한 부작용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며, 결국 음악보다는 토크에 비중을 두게 되어 전체적으로 말이 많아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 라디오는 진행자의 성격에 좌우되는 매체로, 흔히 이들 프로그램들을 캐릭터 프로그램(character program)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라디오에 있어서 진행자의 역할과 중요성은 막대한 것이다. 따라서 방송언어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는 사람을 단지 스타라고 해서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용하는 것은 방송의 공익성과 영향성을 무시한 청취율 지상주의적 행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wpark@kbi.re.kr)
  • 2004.12.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TV속의 시청률 지상주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 < a> TV속의 시청률 지상주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방송쪽 일을 하다보니 일선제작 현장에 있는 PD들을 만나볼 기회를 자주 갖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볼 때 가끔씩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했던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하나같이 점잖고 매너 좋은 사람들인데 왜 프로그램을 저렇게 만들까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경험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자들께서 쉽게 짐작하실 수 있듯이 그 이유는 바로 ‘시청률’ 때문이다. PD들이 느끼는 시청률에 대한 압박은 우리들의 상상을 쉽게 초월해버린다. 매일 아침 성적표처럼 찍혀 나오는 시청률. 전국의 전체 시청자 수를 생각한다면 시청률은 터무니없이 적은 시청자들의 시청 기호를 숫자로 뽑아낸 것뿐이라고 무시하고도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PD들은 시청률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에 피가 마르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시청률 안나오면 위로 방송사 높은 분들께 욕먹고, 아래로 출연자들에게 무시당한다. 시청률이 PD들의 ‘흥망성쇠’를 가름하는 유일한 잣대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이 시청률 지상주의라는 사지(死地)로 내몰리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PD들에게 가해지는 방송사측의 시청률 압박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얘기는 아니다. 얼마 전 일본의 한 민영방송 프로듀서가 돈을 써서 시청률을 조작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충격적 뉴스가 있었다. 니혼TV의 프로듀서가 탐정사무소를 통해 일본비디오리서치의 시청률 조사 표본 가구를 알아내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들을 보는 대가로 5000∼1만엔씩을 준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 방송계 안팎에서는 이 사건을 개인 비리로 덮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니혼TV는 회사 차원의 조직적 개입은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사전에 문제를 알고도 쉬쉬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개로 경영진의 도의적 책임이 거론되고 있다는데 편성국장 출신의 사장이 노골적으로 시청률 경쟁을 독려했고, 프로듀서 연봉에 시청률을 반영하도록 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는 후문이다. 결국 니혼TV가 9년 연속 종일, 골든타임(오후 7∼10시), 프라임타임(오후 7∼11시), 논프라임타임 등 시청률 4관왕을 지켜온 화려한 역사 뒤에는 경영진부터 말단 사원까지 시청률 지상주의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시청률 지상주의가 빚어낸 씁쓸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00%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긴 하지만 시청률에 대한 일선 PD들의 강박증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단순히 비난만 할 수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꼭 무리수를 낳게 마련이다. 일본에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조작’ 정도에 그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시청률 압박이 미치는 폐해가 그만큼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KBS 오락프로그램 녹화 도중 송편을 먹다 기도(氣道)가 막히는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성우 장정진씨의 불행한 사고는 그동안 시청률 올리기에만 급급해 출연자들의 안전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제작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시청률 도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출연자는 1회성 소품과 다를 게 없었다. 출연자들을 자극적이고 가학적인 이벤트 현장으로 내몰면서도 짐짓 태연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제작진들의 극단적 이기주의에 기인한다. 이를 계기로 제작진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시청률 때문에 외면해온 진짜 시청자의 뜻을 거스른 대가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껴야 할 것이다. TV에겐 상업적 논리와 치열한 경쟁구도가 숙명이나 다름없다. 프로그램 생산자는 본능적으로 최다 수용자를 획득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부터 체득한다. 시청률 지상주의라는 이전투구 속에서 정작 시청자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청자 주권이라는 방송사의 구호는 허울에 그치고 말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수치로 평가되는 시청률 지상주의적 제작관행은 우리 사회의 고질(痼疾)로 자리 잡은 외모지상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끊임없는 재생산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다수의 이익만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시청률 상승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수의 입장, 소수의 의견은 항상 무시될 수밖에 없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방송의 무관심이 바로 이러한 시청률 지상주의로부터 파생된 병리현상이라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상업적 스포츠 행사로 이미 전락한 아테네 올림픽은 비싼 돈을 들여가며 생중계하지만 시청자 확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장애인 올림픽은 항상 뒷전이었다. 시청률은 프로그램을 평가하는 양적 잣대일 뿐이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양과 질 양 측면에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 방송 시스템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체제라는 점에서 질적 잣대로 프로그램을 평가하는 일을 포기해선 안될 것이다. (wpark@kbi.re.kr)
  • 2004.11.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김선일씨 피살사건과 언론의 사회적 책임
  • < a> 추측에 따른 오보, 선정적 보도 아쉬워 뉴스의 본질 제대로 파악하는 언론돼야 조금 심하게 얘기해서 한국의 언론, 그러니까 신문과 방송은 저널리즘 원칙이나 규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혹은 소홀히 생각하면서 뉴스생산에 나서고 있다는 생각이다. 사회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다는 포괄적이고 모호한 기준을 내세워 ‘객관성’, ‘공정성’에 대한 형식적인 요건만 충족시킨 채 하루하루를 채워 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사회적 파장이 큰 이슈가 등장하더라도 피상적(무감각) 혹은 감정적/선정적(흥분)인 태도로 뉴스를 제작하게 될 수밖에 없다. 뉴스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관행화된 틀 속에서 뉴스가 정의되고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뉴스는 단순한 사실 전달의 과정이 아니다. 즉 우리 주변의 다양한 관심사들을 추리고 다듬어서 수용자에게 전달했다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뉴스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고, 의미부여의 과정이며, 합의를 이끌어내는 장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 속에는 그 생산을 관장하는 체계가 있고, 또 지켜야 할 규범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외양을 다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 갈등적 이슈에 대한 구성원들의 의견이 드러나고, 조정되는 공론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요구되는 내용측면의 실천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 특히 방송 저널리즘을 논할 때 이와 같은 기본적인 원칙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뉴스는 올바른 원칙과 규범을 축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무엇이 공동선(Public Good)을 위하여 일궈야 할 문제인가를 명백하게 따져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저널리스트들에게 요구되는 공익적 책무의 본질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는 감성이나 감각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사실과 논거를 지녀야 한다. 또 편협한 냉소주의나 자폐적 규범을 과감히 청산하고 넓고 깊게 사건을 통찰한 결과를 중심으로 보도하는 진취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김선일씨 피살사건은 그 개인과 가족의 불행이라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시대적 비극상을 반영하고 있는 상징적인 이슈이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다시 한번 갈등적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우리 사회의 언론들도 추구하는 바에 김선일씨의 비극적 죽음이 표출하는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로 인한 영향력에 대해 극단적인 대립양상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김선일씨 피살관련 보도는 언론보도가 추구하는 양면적 가치 대립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뉴스의 신속성과 정확성 사이의 갈등, 인질의 신상과 피살 정보 제공의 무제한 허용과 한계설정 사이의 갈등, 그리고 대응논리로 제시된 ‘응징론’과 ‘국익론’ 사이의 갈등 따위 말이다. 국제적인 테러범에 의한 한국인 최초의 피살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다루면서 한국의 언론은 과연 지켜야할 저널리즘 원칙과 규범에 충실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김선일씨 피살사건 관련 뉴스기사를 분석한 결과는 우리 언론의 고질(固質)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과 같이 언론이 흥분할 요소를 두루 갖춘 사건일수록 언론은 감정적이고 선정적인 보도태도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총칼로 무장한 인질범들 앞에서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장면, 눈이 가려진 채 무릎을 꿇은 살해 직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국민은 그가 겪었을 고통과 절망을 공감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 사건의 의미가 더욱 크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장면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감정적/선정적 보도태도에 다름 아니다. 아무리 뉴스가치가 큰 장면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 과연 ‘공공의 이익’과 ‘공공에 대한 서비스’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다. 감정적/선정적 보도경향은 언론의 상업주의와 취재경쟁의 합작물이란 점에서 상업주의 성격이 짙은 한국의 언론체제하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함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그 정도가 높을수록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자극적 내용만이 강조되어 언론 본래의 기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점에서 언론이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기도 하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wpark@kbi.re.kr)
  • 2004.07.3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사회적 위기와 언론의 바로 서기
  • 특정 이슈 보도에 있어 객관적 자세 필요 탄핵관련 보도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뜨겁다. 과연 객관적인 뉴스는 존재할 수 있을까? 객관적 현실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희박해진 이른바 ‘탈(脫)사실 시대’에 뉴스가 사실을 객관적으로 반영한다고 믿는 언론학자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뉴스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the real reality)’이 아닌 ‘구성된 현실(the constructed reality)’에 기반 한다는 일부 연구자들의 주장에는 뉴스가 현실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사회의 지배적 가치, 이익 및 관심에 맞추어 재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매체라는 신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들은 뉴스의 객관주의를 부인하고 뉴스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 모두가 뉴스의 완전한 허구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뉴스는 이미 발생한 사실에 대한 ‘정보’이며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전달되는 ‘이야기’일 뿐 사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뉴스는 본질적으로 객관적일 수 없다. 오히려 주관성이 개입되는 사회적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사건이 어떤 식으로 보도되느냐 하는 것은 그 사건이 본래 내포하고 있는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인 가치와 시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하나의 사건은 ‘선택’되고 ‘각색’된다는 주장이 뉴스의 객관성을 비판하는 연구자들의 핵심적 논의에 위치한다. 다시 말해서 뉴스는 단순한 현실의 반영물이 아니라 현실을 재규정함은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특정한 기호를 선정하여 특정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전파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이를 우리는 객관성의 현실구성이론이라 부른다. 이는 매스미디어가 단순하게 현실을 묘사하는 거울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주도체가 된다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이 관점에서 텔레비전 뉴스는 사실 그 자체의 반영물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하나의 틀(frame)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구성체로서 뉴스에 관한 분석은 뉴스를 외부의 객관적 사실을 상징적 현실로 구성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징적 현실이 사건이나 사안을 이해하는 하나의 창 혹은 틀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진다. 특히 TV뉴스는 이데올로기 재생산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간주되는데, 터크만이라는 학자는 뉴스가 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뉴스내용을 객관적인 보도인 것처럼 변형시켜 보편적인 정보로 포장해내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또 다른 연구자는 텔레비전 뉴스에 의하여 재구성된 현실은 사회의 권력관계의 표현으로 특정 개인, 집단, 계급의 의견과 가치가 보도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텔레비전 뉴스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전파하는 과정 및 결과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대개의 인식을 뉴스에 의존하여 구성하게 된다. 대부분 뉴스를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사실이라 믿고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뉴스가 곧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오랜 ‘관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믿는, 곧 뉴스가 사실의 전달이라고 믿는 믿음은 어쩌면 신화(神話)일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뉴스의 객관성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주관적인 서술의 측면이 강조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수도 있다. 즉 뉴스는 관찰자나 서술자의 주관에 따라 그 내용이나 서술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탄핵관련 보도와 같이 개별 사회구성원들이나 집단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의 경우, 이와 관련된 미디어의 보도태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슈를 바라보는 여러 시각 중 어떤 것을 채택하여 보도하는가에 따라 뉴스의 이야기 구성방식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미디어에 의해 ‘다양한’ 시각에서 구성된 뉴스는 결국 뉴스 수용자의 ‘편향된’ 인식을 형성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뉴스는 특정 이슈에 대한 수용자의 인식과 판단을 달라지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슈에 대한 찬성-반대를 나타내는 평가적 의견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정보를 전달하고 여론을 형성함에 있어 언론매체가 확보하고 있는 ‘기득권’과 영향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언론이 특정한 이슈를 다룸에 있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의 이익이나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얼마 전 발생한 김선일씨 피살사건과 관련하여서도 언론이 과연 그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지러운 세상, 언론의 바로 서기가 더욱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 (wpark@kbi.re.kr)
  • 2004.07.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프로그램 등급제의 허와 실
  • 현행 방송 프로그램 등급제 운영토록 돼 있어 1980년대 초중반, 필자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이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는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그 무엇이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이야 인터넷과 각종 미디어를 통해 지나치게 많은 유해정보가 청소년들에게 여과 없이 전달되고 있어 문제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기껏해야 허름한 변두리 극장에 몰래 들어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훔쳐보던 것이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내용에 따라 관람허용 연령을 결정하는 영화식 등급제(rating system)가 텔레비전 방영물에 적용된 것이 「방송 프로그램 등급제」이다. 선진국의 등급체계를 다소 변형하여 2001년 2월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방송법 제33조에서는 “방송사업자는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하여 방송 프로그램의 폭력성 및 음란성의 유해정도, 시청자의 연령 등을 감안하여 방송 프로그램의 등급을 분류하고 이를 방송 중에 표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우리나라의 현행 방송 프로그램 등급제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유해한 폭력성, 선정성, 부적절한 언어사용 정도의 기준에 따라 개별 프로그램에 등급을 분류하고 이를 화면에 표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등급은 ‘모든 연령 시청가’, ‘7세’, ‘12세’, ‘15세’, ‘19세 이상 시청가’ 등 5등급으로 분류된다. 연령등급기호 표시는 흰색 테두리, 노랑색 바탕의 원형에 검정색 숫자로 화면 대각선 20분의 1이상 크기로 하여 우측 상단에 표시하고, 해당 프로그램 시작과 동시에 30초 이상, 방송 중 10분마다 30초 이상 표시해야 한다. 특히 ‘19세 이상 시청가’ 등급은 청소년보호시간대인 ‘평일 오후 1∼10시’, ‘휴일 오전 10시∼오후 10시’ 사이에는 방송할 수 없다. 위반하면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와 시청자에 대한 사과, 해당 프로그램의 정정, 중지, 방송편성 책임자와 해당 프로그램 관계자에 대한 징계 등 제재조치를 할 수 있다. 프로그램 등급제는 다채널·다매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청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제도이다. 방송은 갈수록 극단적인 상업화로 치닫고 저급한 영상물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제공하는 등급제는 유해한 프로그램으로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프로그램 등급제로 대표되는 TV 방영물에 대한 자율규제방식은 송신자의 편성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동시에 시청자보호의 궁극적인 판단을 시청자의 손에 맡긴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이는 심의기구에 의한 타율심의를 상당량 줄이면서 송신자와 수신자 모두의 자율적 판단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점에서 가장 앞선 규제기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많은 장점을 지닌 프로그램 등급제도 몇 가지 결정적인 약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금단의 열매 효과(forbidden fruit effect)’와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엄명하신 선악과가 하와의 눈에는 더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던 것처럼 어린이와 청소년의 눈에는 자기 또래가 보아서는 안될 프로그램에 더 많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이 점이 등급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등급제의 또 다른 문제점은 ‘19세 이상 시청가’ 등급을 받은 프로그램들의 폭력·선정성 수위가 더 높아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보호법상 밤 10시 이후에만 방송할 수 있는 ‘19세 이상 시청가’ 등급이 거꾸로 제작자들에게 유해한 내용을 만들어도 좋다는 면죄부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일부 드라마 PD들은 프로그램 등급제를 은근히 반기고 있다고 한다. 일선 PD 중 일부는 ‘19세 이상 시청가’ 판정을 받으면 과거 금기시되었던 표현의 폭을 확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를 걸기도 한다는 얘기까지 들릴 정도다. 프로그램 등급제를 둘러싼 각종 잡음들은 필요성과 명분에 쫓겨 세밀한 준비 없이 등급제가 시행된 원죄로부터 기인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이 시행되기에 앞서 사회 전반, 특히 이해집단간의 컨센서스는 필수적이다. 그동안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정책기관의 제도적 보완의지, 방송사의 어린이 및 청소년에 대한 보호의식 제고, 그리고 무엇보다 개별 가정에서 등급에 따른 자녀 시청지도 교육 강화 등이 맞물려야 많은 장점을 지닌 프로그램 등급제는 우리나라에 연착륙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 (wpark@kbi.re.kr)
  • 2004.06.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미디어속의 웰빙
  • < a> 웰빙+상업주의=물질·개인화 진정한 웰빙 전형은 성경에 명시 ‘긍정적 사고’ ‘성령 충만’이 첩경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욕이고 악담이었다. 하지만 이젠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른바 웰빙(Well-Being) 열풍 때문이다. 웰빙이란 말은 동양권에서 덕담으로 오래 사용되어온 ‘무병장수’의 서양식 버전이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하는 소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이들의 바람이 되어왔고, 이것이 다양한 형태로 상품화된 것이 현대판 웰빙 문화이다. 웰빙과 관련된 가장 뚜렷한 흐름은 식품류에서 나타난다. 값은 좀 비싸더라도 믿을 수 있는 농산물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각 백화점의 유기농 코너 매출이 2배 이상 커졌다. 식품회사들도 이런 흐름에 편승해 검은콩 우유, 천연 효모빵 등 건강을 생각하는 상품들을 내놓아 재미를 봤다. 특히 검은콩 우유는 웰빙 붐 이후 2배 이상 매출이 늘어났다는 후문이다. 생활환경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공기청정기, 연수기 등 이른바 ‘환경가전’ 시장도 700% 급성장하였다. 이제 ‘은(銀)나노’ 코팅기술이 적용된 공기청정기 아니면 신제품이라는 명함도 내밀 수 없게 되었고, 수돗물인 경수(硬水)를 피부보호 효과가 뛰어나고 세척력이 좋은 연수로 바꿔주는 연수기가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건설업체도 돈이 된다는 소문에 웰빙 시장에 뛰어들었다. 주택 개념이 ‘단순 주거’에서 ‘건강·레저 공간’으로 전환되면서 건설업체들은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 친환경 인증 마감재에 테마공원을 꾸미거나, 최첨단 정보통신 시스템을 갖춘 첨단 아파트를 경쟁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웰빙에 대한 관심이 다이어트로 옮아가면서 헬스클럽마다 살을 빼려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고, 백화점 문화센터에는 웰빙과 관련된 강좌들이 줄을 잇고 있다. 흡연습관도 변화하고 있다. 웰빙 붐 이후 우리나라 20세 이상 성인 중 담배를 피우는 인구는 30%대로 떨어졌고, 타르 함유량 1mg의 초저타르 담배의 판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트레이닝패션이 유행하는가 하면 명상과 요가를 즐기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여유롭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대표되는 와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아예 와인만을 위한 전용냉장고가 100만원이 넘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제 웰빙은 우리 삶 전체, 그리고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는 문화코드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보도록 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웰빙의 유행을 무조건 비판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웰빙의 의미가 지나치게 상업화되면서 본래의 선한 목적을 상실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본래 원래 자족하는 삶으로 대변되는 무형의 웰빙 개념이 특정 제품을 소비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상품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이는 불황을 타개하려는 기업들이 웰빙문화를 마케팅 측면에서 적극 활용하면서 빚어진 부작용이다. 극심한 내수시장의 불황을 뚫기 위해 기업들은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했고, 웰빙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소비습관 변화는 이들에게 재기를 위한 해결책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즉 기존 소비시장이 포화된 상태에서 새로운 사업모델이 필요했고 이를 웰빙 마케팅으로 포장한 것이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웰빙의 개념이 ‘물질화’되면서 본래 뜻과는 달리 사치스런 삶의 상징이나 귀족문화의 일부분으로 변질되었고, 공동체적 삶보다는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는 지극히 ‘개인화’된 의미로 제한되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이렇듯 웰빙의 의미가 본질을 벗어나고 있는 데에는 기업이외에 미디어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늘 기사거리에 목말라하는 미디어는 새롭게 감지된 트렌드에 환호하며 앞다퉈 이를 기사화 혹은 프로그램화했고, 기업의 홍보와 기자들의 취재가 상승작용을 하며 웰빙 열풍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특히 방송은 웰빙을 소재로 한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며 ‘웰빙 전도사’로 나서고 있지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본래의 의도를 한참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일상에서 자족한 삶을 지향하는 웰빙의 의미가 천박한 미디어 상업주의와 만나 그 본래의 좋은 뜻을 상실한 채 심하게 일그러져 가고 있는 모습들이 참으로 안타깝다. 특히 웰빙의 의미가 외모지상주의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은 천민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할만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웰빙의 전형은 성경에 명시되어있다. ‘떡’만 추구하는 삶을 ‘지양’하고, 하나님과 벗하는 삶을 ‘지향’하라는 말씀 속에는 참된 건강이 무엇인지 탐구해보라는 예수님의 바람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긍정적 사고방식’과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는 ‘활력과 에너지’는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웰빙을 경험하게 해주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요즘의 미디어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 (wpark@kbi.re.kr)
  • 2004.03.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몰래카메라 공해(公害)
  • < a> 시청자 사로잡기 위해 사용되는 취재는 금물 선진국 경우 취재활동 규범서 ‘몰카’사용 제한 우리가 매일 시청하는 뉴스나 시사고발 프로그램 등에서 익숙하게 발견되는 몇 가지 장면이 있다. 상반신 혹은 하반신만 촬영된 사람이 변조된 음성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장면, 화질이 매우 거칠고 흔들림이 많으며 우리가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장소, 쉽게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버젓이 공개되는 장면. 이른바 ‘몰카’ 기법에 의해 취재된 화면들이다. 어느 누구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다면, 이는 결코 유쾌한 경험일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이 은밀하게 녹화되어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을 경우에 당사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아무리 정당한 목적을 지닌 취재행위라 할지라도 몰래카메라의 사용에는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선 사례와 같이 우리나라의 취재관행을 보면 이러한 취재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일선 기자들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가진 영상을 얻기 위해 몰래카메라의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며 이른바 ‘몰카’ 저널리즘에 대한 옹호론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 자체가 선하다할지라도 불법적인 과정에 의해 그곳에 이른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선택이라고 강변할 수 없다. 방송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몰래카메라를 이용한 취재기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일반 ENG 카메라나 6mm 카메라를 전원을 껐다고 말한 뒤에 실제로는 켜놓고 촬영하는 경우이다. 이는 주로 공무원이나 기업체 직원 등을 인터뷰할 때 많이 사용된다. 취재원들은 기자가 “촬영하지 않는다”고 한 말을 그대로 믿고 비교적 편안한 상태에서 솔직하게 인터뷰에 응하게 된다. 과거에는 카메라가 녹화중일 때 빨간 불이 켜졌지만 최근에는 이를 꺼놓을 수가 있어 더욱 눈치 채기 어렵게 됐다. 이렇게 녹화된 인터뷰 내용은 대부분의 경우 취재원의 동의 없이 전파를 타게 되는데 기자가 사후에라도 방송을 내보내겠다고 할 경우 허락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추후에 인터뷰를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 음성변조나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취재원의 신분을 감춰주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취재원으로부터 민·형사상의 소송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몰래카메라 취재기법의 두 번째 사례는 첩보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방이나 안경 등에 초소형의 고성능 카메라를 부착, 고객 등을 가장하여 취재장소에 잠입하여 원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이다. 이는 주로 사이비 종교단체, 퇴폐나 도박현장 등의 폭로성 취재에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다. 초소형 카메라의 렌즈는 직경 5mm 내외에 불과하여 취재진의 와이셔츠 소매나 작은 손가방의 틈새정도면 부착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때 ‘몰카’ 촬영 전문배우가 동원되기도 한다. 잠입취재의 경우 배짱과 함께 자연스러운 연기 또한 중요하기 때문인데 한 일선 PD에 의하면 이를 위해 방송국마다 경험 많은 ‘몰카’ 전문 엑스트라들을 확보하기도 하며, 취재원들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여성들이 나서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방송사들이 몰래카메라 취재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 지를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신문보다 유독 방송뉴스에서 몰래카메라 사용이 빈발하고 있는 이유는 두 매체가 가진 속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신문은 아무런 장비 없이 맨몸으로도 잠입취재가 가능하지만 방송뉴스의 경우 기사가 갖는 텍스트적 가치와 함께 화면, 즉 ‘그림’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생생한 ‘그림’이야말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재편의를 위한 속임수인 ‘몰카’는 법의 보호를 받지는 못한다. 방송선진국인 미국에서도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몰카’ 프로그램이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미국 3대 네트워크 중 하나인 ABC방송이 잘못된 ‘몰카’ 사용으로 인해 대규모의 피해보상금이 걸린 재판에서 패소한 이후 방송사측은 몰카를 사용하기 전 반드시 회사측의 승인을 받도록 제작지침을 바꿨다. 우리나라의 유명 시사고발 프로그램인 <추적60분>의 모태가 된 <60minutes>를 제작하는 CBS방송도 100여 쪽에 이르는 취재활동 규범서에서 ‘몰카’사용은 물론 비밀녹음기를 사용하는 것도 제한하고 있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 (wpark@kbi.re.kr)
  • 2004.01.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장금’과 청지기 정신
  • < a> MBC 드라마 <대장금> 열풍이 거세다. 시청률 조사기관인 닐슨미디어리서치사는 <대장금>이 올 한해 최고 시청률(37.8%)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1일 방송분은 무려 52.9%에 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이 이 프로그램을 시청했다는 의미인데 이는 실로 경이적인 수치임에 분명하다. 자연히 연장방송에 대한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애초 50부작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10부 정도 늘릴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반면 같은 시간에 편성되어있는 SBS 대하사극 <왕의 여자>는 ‘대장금 열풍’에 한껏 울상을 짓고 있다. 매니아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조기종영을 결정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대장금 열풍’은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아니 신드롬을 넘어 하나의 트렌드를 만들어 가고 있는 듯하다. 컴퓨터에서는 요리게임이 뜨고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는 대장금쌀도 출시됐다. <모래시계>나 <야인시대>처럼 신드롬을 불러온 드라마가 예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장금>처럼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라이센스로 부가가치를 창출한 경우는 처음이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달라는 남편들의 성화에 주부들은 ‘월-화병’에 걸릴 지경이라 하고 인터넷에는 등장인물을 빗댄 정치풍자가 즐비하다. 재밌는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우선 힘든 경합을 거쳐 최고상궁 자리에 올랐지만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여러 상궁들에게 왕따당하는 한 상궁(양미경 분)은 노무현 대통령에 비유된다. “천민 출신을 최고 상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과 “상고 출신의 노 대통령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장금(이영애 분)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연결된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생하는 장금과 이혼하고 남편 빚까지 떠안은 적이 있는 강 장관이 비슷하다는 분석도 곁들여진다. 훗날 어의가 되는 장금과 여성 최초 법무장관이 돼 금녀의 벽을 깬 강 장관의 모습이 일맥상통한다는 게 네티즌들의 평가다. 성경 속에도 장금이를 닮은 사람은 존재한다. 바로 아브라함과 요셉이다. 조선시대에 일개 궁녀가 임금으로부터 ‘대(大)’라는 칭호를 받기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한 인간이 만유의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친구’라는 칭호를 받는 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하지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영광된 축복이 주어졌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고향땅을 떠나 하나님이 명하신 미지의 땅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아브라함은 수많은 고난을 만나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그는 성공자의 삶과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광된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요셉의 삶도 장금이의 그것에 닿아있다. 권력을 취하려 들지도 않고 로비를 벌일 줄도 모르며 소위 ‘백’도 없고 영재교육도 받지 못한 ‘헛똑똑이’들이었지만 청지기적 사명을 가지고 그저 바르게, 열심히 살아 결국 영광된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운명은 비슷하다. <허준>, <상도>에 이어 <대장금>을 연출하는 이병훈 PD가 담아내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모두 요즘 세상 기준으로 보면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양심을 지키려 애쓰며, 인생의 목표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일 뿐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크리스천 직업인들이 따라야할 전형을 발견하게 된다. 가진 것 없이, 실력 하나로, 당당하게 난관을 헤쳐 나가고 있는 장금이가 경기침체, 구조조정, 실업 등으로 얼룩진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말한다. “제가 한 것은 노력뿐이었습니다…비법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거기에 들어간 땀과 정성만이 비법이었습니다”라고.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wpark@kbi.re.kr)
  • 2003.12.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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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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