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열전
(36)소피아 프릭(1886∼1912)
  • 양화진에 안장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 한국서 복음전하다 4개월 만에 급성 뇌염으로 사망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은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다. 프릭과 함께 한국에 입국한 제1진 선교사는 코흘러, 울선 등으로 이들은 1911년 12월 24일 한국에 첫 발을 내딛었다. 이중 프릭은 한국에 파송된 구세군 선교사 중 최초로 1912년에 양화진에 묻혔다. 191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국 땅을 밟은 프릭 선교사는 서울 평동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익혔다.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거리로 나가 쪽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눠주며 문서전도에 힘썼다. 프릭 선교사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기도와 성경 공부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7시에는 뒷산에 올라가 한국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간구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복음 전파에 힘쓴 프릭 선교사는 “오직 한국인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녀의 이런 다짐이 있기까지는 본국인 스웨덴에서 받은 선교 훈련의 영향력이 컸다. 프릭 선교사가 파송될 때 스웨덴의 연대장 뷔버는 프릭의 한국 파송을 격려하며 “프릭이 한국으로 갈 수 있음이 무한히 기쁘다”고 말했다. 뷔버는 “본래 프릭은 성령이 충만한 젊은 여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위하여 좋은 사업을 크게 이룩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평하기도 했다.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복음전파를 위해 일평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던 프릭 선교사는 한국에 오자마자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열정적인 복음을 전했던 프릭 선교사는 사역 중 1912년 4월 18일 급성 뇌염으로 앓아눕게 됐다. 의사의 극진한 진료와 호가드 사령관 부인 등 여러 사관들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프릭 선교사는 1912년 4월 29일 오전 4시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프릭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던 본영 총무서기관 크리스핀은 프릭 선교사의 삶과 죽음에 대해 “나는 프릭 사관과 한 대문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인을 구원해 주님의 빛을 발하도록 하려는 생각만 간절했다. 한국말은 잘 하지 못하지만 구세신문과 마가복음을 자기 돈으로 사서 여러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등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전했다. 또 프릭 선교사가 4개월 남짓 한국에서 선교사역한 것을 회상하며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며 모든 선교사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아름다운 삶과 열성은 본보기가 됐다”고 말했다. 프릭 선교사의 유해는 현재 양화진에 안치돼 있으며 양화진에 안장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로 기록되고 있다. 주의 소명을 받고 구세군 선교사가 됐던 소피아 프릭 선교사는 1886년 8월 16일 스웨덴 텔례북에서 출생했고, 스톡홀름 구세군 성경대학교에 입학해 1911년 11월 20일 참위 직분을 받은후 곧바로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선임됐다.
  • 2014.12.07 / 오정선 기자

    (35)말콤 펜윅(1863∼1936)
  • 한국침례교의 토대를 세운 선교사 찬송가·성경 번역 통한 복음전도 만주 블라디보스톡까지 한인 위해 교회 세워 말콤 펜윅 선교사는 186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펜윅이 5살 때 열 한 자녀를 남기고 사망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펜윅은 주일 봉사를 하는 등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난 건 어머니의 사고 이후였다. 이 일로 펜윅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나길 원했고, 기도에 매진했다. 그리고 26세 되던 1889년 한국 선교에 대한 소명을 처음 받았다. 한국을 조그마한 섬나라로 이해했던 그는 당시 철물 도매업을 하면서 저녁마다 나이아가라 사경회 성경공부에 참여했다.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아 마음에 부담이 컸던 그는 처음에는 선교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인도에서 사역하던 한 형제가 성경공부 모임에서 한 간증을 듣고 마음을 돌이켰다.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물이다” 복음의 본질이 말씀에 있음을 깨달은 펜윅은 즉시 주변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넉 달간의 항해 끝에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에 도착한 펜윅 선교사는 처음 열 달은 한국어를 배우는데 집중했다. 한국 사람들과 부딪히는 삶 속에서 한국어를 익힌 그는 몇몇 한국 친구들과 함께 황해도로 향했다. 그때가 1890년이었다. 초대교회인 소래교회에서 펜윅 선교사는 소년반을 만들어 사역했고,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 ‘나는 참 기쁘다’ 등을 한국어로 번역해 불렀다. 펜윅 선교사는 남달리 글쓰는 재주가 있어 당시의 한국 풍습과 사정을 기록하는 한편 초기 한국선교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기술하기도 했다. 그는 사역 틈틈이 근처의 버려진 땅을 개간해 밭을 일구기도 했다. 선생이나 선비는 노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이러한 모습은 주민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선교사역이 쉽지 않았던 펜윅 선교사는 1893년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며 재충전의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 후 교회가 없는 원산으로 사역지를 옮겨 복음 사역에 전념했다. 1900년 남감리교 선교사인 하인즈와 결혼한 뒤에는 원산에서 과수원과 농사를 하면서 남녀 성경공부반을 조직해 전도활동을 했다. 1903년에는 충청도 지방의 전도 사업을 이양받아 신명균 성도를 첫 한국인 동역자로 세웠다. 신학교를 세워 한국인 조사(문서순회전도자)들을 대상으로 성경교육과 영적훈련을 시킨 펜윅 선교사는 캐나다 교회의 지원을 통해 1920년까지 36개의 가정교회를 설립했다. 조사들을 각처에 파송하고 순회전도를 통해 교회가 생겨나자 펜윅 선교사는 교단 조직의 필요성에 절감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1906년 충남 강경침례교회에서 최초의 침례교단 총회에 해당하는 대화회를 창립하고 ‘대한 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orea)를 조직했다. 1914년에는 제9회 총회를 원산에서 개최하고 9년간 역임해 오던 감목직을 이종덕 목사에게 위임하기도 했다. 펜윅 선교사가 설립된 교회들은 처음에는 ‘대한기독교회’로, 후에는 ‘동아기독교’로 불리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침례교회의 전신에 해당된다. 펜윅 선교사를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 수는 1920년 162개처로 늘었으며 펜윅 선교사가 사망한 1936년에는 교회수가 250여 개처로 확장됐다. 펜윅은 생전 정기적으로 이들 교회들을 순회하며 사역했고, 장로교 감리교가 한반도 선교지를 분할할 때 만주 일대는 물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까지 그의 조사들을 보내어 한국인들을 찾아 교회를 세우기까지 했다. 펜윅 선교사는 또 1919년 10월에는 신약전서(원산 번역)를 출판했으며 1899년부터는 복음찬미도 발행해 그 후 증보판을 계속 발행했다. 젊은 시절 복음을 들고 한국에 들어와 46년간 한국 땅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던 말콤 펜윅 선교사는 72세를 일기로 원산 자택에서 하나님의 품에 고이 잠들었다.
  • 2014.11.02 / 오정선 기자

    (34)조지 매큔(1878∼1941)
  • 한국인에게 참된 신앙 심어준 선교사 독립운동 돕고, 일제 신사참배 반대 두번 추방 당하면서도 한국 사랑 남달라 조지 매큔(George Shannon McCune)은 일제강점기 한국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미국선교사이다. 그는 일제시대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던 진실한 선교사였다. 미북장로교에서 파송된 한국 선교사인 조지 매큔의 한국이름은 윤산온(尹山溫). 미국 미주리주에서 출생해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로 1905년에 한국에 입국해 부인과 평양에서 4년간 한국어를 공부하며 교회 일을 도왔다. 1909년에는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부임 즉시 미국의 독지가 오닐(Hugh Oneil) 부인으로부터 1만5000달러를 기부 받아 학교의 급속한 발전에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시위참가 학생들을 숨겨주는 등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보수적이었지만 그가 1912년에 있었던 데라우치 암살미수사건 혹은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그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열정에 일정한 공감을 가졌다. 조지 매큔 선교사는 1921년 한국에서 추방됐다가 1929년 5월 제4대 학장으로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기독교 교육에 집중했지만 30년대 중반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일제의 전체주의 체제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35년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요구 거부로 그의 시련은 시작됐다.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 타다오(安武直夫)는 11월 14일 공·사립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하고, 참석자 전원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1935년 12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부가 조지 매큔 선교사의 집에 모여 밤늦도록 회의를 한 후 이런 행사는 이전에 없던 일이며 자신들은 교장인 동시에 선교사이므로 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지 매큔 선교사는 시내 27개의 교회와 협의한 결과 “신사에서 일본 신을 참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며 “나의 기독교 양심으로 신도에 참배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했다. 1936년 1월 총독부 평남지사 야스다께는 60일간의 기한을 주고 신사참배 여부를 회답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숭실학교의 조지 매큔 교장과 숭의여중학교의 스노크 교장을 파면하고 미국으로 강제 추방했다. 그는 결국 1936년 교장직에서 파면됐고 두 번째로 추방됐다. 한국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들을 지원했고 한국에 대한 연구자료로 두 아들과 함께 저작물을 발간했다. 조지 매큔 선교사의 저서로는 한글로 된 ‘그리스도의 전기’ 등이 있다.
  • 2014.10.05 / 이미나 기자

    (33)헨리 먼로 브루엔(1874∼1959)
  • 대구 경북 선교의 아버지, 부해리 선교사 1899년 대구에서 한국 최초 야구 가르쳐 부해리 선교사의 원래 이름은 브루엔(Henry Munro Bruen)이다. 부해리는 25세 총각의 몸으로 대구에 도착한 브루엔이 그의 애칭인 해리 브루엔에 발음이 가장 가까운 말을 딴 것이었다. 부해리 선교사는 1874년 미국 뉴저지주 서미트에 위치한 중앙장로교회의 담임목사 제임스 브루엔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2세 때 어머니의 별세로, 할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할아버지 또한 목사였으며, 할머니는 당시 저명한 성경학자이자 교회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선교 악단을 조직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브루엔은 1896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그의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1899년에 졸업하고 그해 목사 안수를 받은 브루엔은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대구로 파송됐다. 2년 후인 1901년 그는 약혼자이며 동창생인 마샤 브루엔(부마태)과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서 이듬해 5월 대구로 함께 돌아왔다. 대구에 온 부해리는 선교사들 간의 경북지방 선교 구역 분할로 경북 서부지방, 즉 김천 선산 군위 고령 성주 상주 칠곡 등지의 선교를 담당하여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1903년 부해리 선교사는 대구 제일교회를 담임했다. 1904년에는 대구 성경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같은 해에 의료 선교사들과 함께 1916년까지 나환자 선교위원으로 활약했다. 1915년에는 대구 남산교회를 세워 담임목사로서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했다. 부해리 목사의 부인 부마태 여사는 대구에 오자마자 제일교회 구내에서 신명여자소학교(현 종로초등학교)를 세웠다. 이후 1907년에는 신명여자중학교를 설립해 교육 선교활동에 힘썼다. 그러나 그녀는 1930년 10월 유방암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55세의 나이로 28년 동안의 대구생활을 마감하고 소천했다. 그녀의 유해는 동산의료원 구내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부해리 선교사는 부인 부마태가 별세한지 4년만인 1934년 9월 부마태의 친구이며 동산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클라라 헤드버그(하복음)와 재혼했다. 하복음 여사는 동산 기독병원의 간호 선교사로 18년 동안을 동산병원에서 근무했다. 부해리는 평소 매우 성품이 소탈하고 한국어로 유창하게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과 그 문화에 친숙한 사람이었다. 부해리 목사와 가깝게 생활했던 교인이나 선교사들은 그를 ‘천사’라고 표현할 정도로 인품이 좋았고 두터운 정을 나눴다고 한다. 송천교회의 창립 이후 1938년까지 당회장을 지낸 부해리 선교사는 일제의 진주만 침공 전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으로 1941년 한국을 떠난후 1959년 캘리포니아 산타 크루즈에서 85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한편 부해리 선교사의 부인 하복음은 ‘40 Years in Korea’(한국에서의 40년)라는 제목의 부해리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초기 선교사가 남긴 일기 혹은 편지글들을 모아 자료집을 펴냈다. 여기서 부해리 선교사가 미국에 있는 약혼녀 부마태(브루엔의 첫 부인)에게 보낸 편지 중, 1899년 9월 부산항에 도착했을때 이미 야구 장비를 가지고 왔다는 내용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소년야구단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또 같은 편지에 제물포를 거쳐 서울로 입성해 선임 선교사인 마펫으로부터 야구와 관련한 질문을 받았다. 이렇게 동료 선교사들은 부해리가 야구광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부해리가 1900년 1월 31일자로 부마태에게 보낸 편지에는 한국의 설날 풍경을 그리면서 아이들에게 야구 게임을 직접 가르쳤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야구는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에 의해 전해졌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1899년 시작됐다는 기록이 공개되어 학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부해리 선교사가 처음 야구를 가르친 이들 가운데는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최연소자였던 대구 출신 이갑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흥미를 더한다.
  • 2014.09.07 / 이소흔 기자

    (32)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 ∼ 1970)
  • 민족대표 34인 애국지사 석호필 제암리학살사건 카메라에 담아 세계에 알려 1919년 어느 날 수원에서 경성으로 가는 기차 안에는 ‘을사오적’ 이완용이 타고 있었다. 이완용은 자신의 자리 인근에 앉아 있는 외국인 선교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선교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교회에 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이천만 조선 동포들에게 사죄하기 전까지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오” 이완용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깜짝 놀라 당황하는 사이 외국인 선교사는 자리에서 홀연히 일어나 다른 칸으로 이동했다. 그 외국인 선교사가 바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였다. 일제의 두 번에 걸친 암살시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했던 그는 민족대표 33인과 더불어 민족대표 34인이라고 주장될 만큼 독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인물이다.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에 영국 워릭셔 주의 럭비에서 태어났다. 1905년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으나, 성적은 좋지 못하였고, 집안이 여의치 않아 진학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체셔 주의 한 농장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고용되었고, 이 무렵에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의 앞날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07년 캐나다로 이민했고,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 대학에 입학한다. 1910년에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를 짚게 되었지만 그는 열심히 공부한 끝에 토론토 대학교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6년 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올리버 알 에비슨으로부터 일제강점기의 한국으로 와 달라는 권유 서신을 받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가을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했다. 심지어 그는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했다. 또한 1917년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또한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의 성인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이름이다. 그는 3·1운동 거사 준비와 함께 해외 정세파악의 임무를 맡게 된다. 또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본의 시위자에 대한 탄압을 카메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기도 했다. 스코필드는 4월 수원의 어느 마을에서 일본군이 교회에 조선사람들을 몰아넣고 학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곳을 방문했다. 잿더미가 된 현장을 방문한 스코필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연신 카메라로 현장의 모습을 담았다. 그는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세계에 알렸고 이를 계기로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더불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수탈과 민족말살정책에 세계가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밖에도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여자 감방 8호실)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했다. 그가 활발한 독립운동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에서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0년 4월에는 강도를 가장한 스코필드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나 결국 그는 캐나다로 귀국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캐나다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의 노력과 더불어 맞이한 대한민국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스코필드를 초빙했다. 또한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훈장(1960)과 건국훈장 독립장(1968)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일하기를 자원하여 수의병리학을 맡아 대한민국 인재육성에 한 축을 담당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대한민국에서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학생들과 후세들에게 3·1운동의 정신을 전하는데 노력했다. 스코필드는 1970년 4월 12일 대한민국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소천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스코필드는 전 재산을 보육원과 YMCA에 헌납하고 후세들에게는 자신이 사용하던 지갑과 여권만을 남겼다.
  • 2014.08.03 / 정승환 기자

    (31)칼 귀츨라프(1803 ∼ 1851)
  • 한국 땅을 찾아온 최초의 서양선교사 주기도문 우리말로 번역, 한국교회사 큰 열매 배고픈 조선 백성위해 감자 씨와 재배법 보급 그는 1803년 독일에서 유태계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집안이 가난해도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귀츨라프는 18세가 되었을 때에 왕에게 자신의 비전을 담은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는 할레 대학(Halle University)에서 신학 교육을 받는 기회를 갖게 됐고 학업을 마친 후 베를린에 있는 선교사 양성소에서 훈련을 마칠 수 있게 됐다. 그는 1827년 1월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인도네시아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 해 8월에는 시암, 방콕으로 거점을 옮겨 태국에서 선교에 힘썼다. 그러나 처음부터 귀츨라프의 마음을 불타게 했던 것은 바로 중국 선교였다. 그는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을 만나 본격적인 중국선교의 행보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중국 동해안과 만주를 거쳐 6개월 동안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그는 이 여행에서 많은 열매를 얻고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 즈음 영국 동인도회사는 1000톤 급의 군함 로드 앰허스트를 무역선으로 중국, 한국, 일본 등지로 교역을 트기 위한 항해를 준비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무역선을 이끌고 동남아로 항해할 당시 통역관의 신분으로 동승할 수 있었다. 로드 앰허스트 호는 1832년 2월 중국 마카오를 떠나 7월 한국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근해에 상륙했다. 그곳의 작은 섬에 상륙하여 한국인들과 접촉하게 됐지만, 마을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항해를 하다가 7월 25일 충청도의 고대도라는 섬에 도착하게 됐다. 한국 땅에 들어서는 순간, 귀츨라프는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건네주었다. 선장은 그 지방 관리들을 통해 국왕 순조에게 통상을 원한다는 청원서를 보냈다. 이 때 선장의 권고에 따라 귀츨라프가 전도용으로 갖고 온 한문 성경 두 권과 서양포, 시진표, 천리경 등의 선물을 함께 보냈다. 왕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는 고대도에 머물면서 많은 관리와 백성들에게 성경과 의약품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귀츨라프는 이 곳에 머무는 동안 주기도문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는 한국 교회사에 뜻깊은 일을 했다. 또한 섬 사람들이 굶주림에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그들의 식품으로 가져온 감자를 먹지 않고 100여 군데 심어주면서 한문으로 그 재배법을 써주었다. 이 감자는 늘 배고픔에 지쳐있던 백성들에게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고 충청도 일대에 퍼져 전국으로 보급됐다. 결국 왕의 회신을 받지 못해 곧 조선을 떠나야 했지만 귀츨라프가 조선에 머물던 약 20일간의 일정은 조선 사람들에게 영육간에 큰 열매를 남겨줬다.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1866)보다 34년, 직접적인 대 조선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1884)보다 52년이 앞선 것이었으며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인 프랑스인 신부 모방(Pierre Maubant)의 내한(1836)보다 4년이나 앞섰다.
  • 2014.07.06 / 이미나 기자

    (30) 윌리엄 얼 쇼(1890∼1967)
  • 한국을 세상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들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 이하 윌리엄 1세)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은 지극한 한국 사랑으로 선교와 교육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1890년 8월 22일 시카고에서 출생한 윌리엄 1세는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과 콜럼비아대학원을 졸업하고 1921년 한국으로 파송됐다. 선교지에 파송되기 전 윌리엄 1세는 애들린 H. 쇼 선교사와 1919년 7월 4일 결혼했고 한국에 온 이듬해인 1922년 외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이하 윌리엄2세)가 탄생했다. 윌리엄 1세는 미국 감리회의 파송으로 1921년부터 ‘서위렴’이라는 이름의 선교사가 되어 평양 광성학교 교사로 6년간 봉직했다. 또 10년간 만주와 해주 지방에서 교육과 전도사업을 펼치며 1938년 무어 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했고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의 단장으로도 봉사했다. 부인 애들린 쇼 선교사도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교육에 헌신했다.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박해가 극에 달했던 1941년 쇼 선교사는 강제 출국당했다가 해방 후 1947년 다시 내한했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윌리엄 1세는 미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피난 교역자 구호에 힘썼다. 특히 한국군 군종 창설에 크게 기여했다. 그때 아들 윌리엄 2세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 공부 중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 해군 대위로 재입대하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진격 해군 장교로 참전 후, 미군정청 소속으로 내한해 한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평양에서 마친 그는 한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다. 전쟁소식을 들은 그는 고향을 위해, 자신이 가르친 해군사관생도들을 위해 속히 입대를 결정하고 함선에 몸을 실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대위로서 맥아더 장군의 부하로 참가한 윌리엄 2세는 이후 서울수복작전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1950년 9월 22일 은평구 녹번리 전투에서 매복 중이던 공산군에게 저격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나이 29세였다. 외아들을 잃은 부친 쇼 선교사를 위로하고 윌리엄 2세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미국의 고향과 교회에서 기금이 모아졌다. 5955명이 1만4500달러를 기증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그 기금으로 1956년 5월 부활절 대전의 목산 언덕에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예배당이 준공됐다. 그 예배당이 바로 목원대학교 채플이 됐다. 윌리엄 2세가 보여준 사랑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0년 은평구 녹번동 은평평화공원에 추모공원이 조성됐다. 윌리엄 1세는 1961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귀국해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에 안장됐다. 부인인 애들린 쇼 선교사는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 후 양화진 남편의 묘 옆에 안장됐다. 윌리엄 2세의 부인인 조니타 로빈슨 쇼 여사는 1943년 윌리엄 2세와 결혼해 슬하에 두아들을 두었다. 사별 후에도 한국에서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며 세브란스병원에 사회사업실을 개설했다. 또한 서울외국인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했고 1968년 귀국 후에도 미국 코네티켓에서 사회봉사 사업을 마치고 은퇴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조니타 여사에게 충무훈장을, 미국정부는 은성훈장을 추서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큰아들 윌리엄 로빈슨은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내한해 훌브라이트 장학사업을 펼쳤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초빙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부인 캐롤 쇼 역시 저명한 미국의 작가로서 특히 한국대사관 기록보관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근대사 연구에 매우 소중한 저서를 남겼다. 윌리엄 2세의 둘째 아들 스테반 쇼는 오하이오 주 법원판사로 재직하며 어머니를 모셨다. 이들 가족의 한국사랑은 4대째로 이어져 로빈손과 캐롤의 큰딸 줄리는 오산의 공군기지에서 장교로 1990년부터 2년간 복무했으며 아들 데이비드는 연세 메디컬 스쿨의 편집자로 근무했다.
  • 2014.06.01 / 복순희 기자

    (29)젠센 선교사
  • 한국을 위해 헌신한 아름다운 부부 일제 추방령·북한 포로 생활 등 고난 연속 한국교회 재건 위해 끝까지 헌신하다 생 마감 미국 감리회 선교사인 젠센(Jensen) 선교사 부부는 한국교회 재건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한 이들이다. 숱한 고난 속에서도 한국을 사랑했던 부부의 선교 열정은 지금도 우리에게 선교 사명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먼저 남편인 앤더스 크리스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선교사는 1897년 3월 덴마크 네스보그에서 출생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자회사에서 일을 했던 A.K.젠센은 10대 후반인 1914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미 육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A.K.젠센은 1818년 비로소 미국 시민권을 받는다. 1924년 아이오와주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보스턴대학 신학부를 나온 A.K.젠센은 미국 감리회 국내선교부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1927년 8월에는 선교사로 한국 땅에 들어와 인천에서 7년 동안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1934년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다시 한국에 와서는 수원 인천 원주 서울 등지를 돌며 순회선교사로 사역한다. 이 때 일제의 추방령이 내려지면서 1940년 본국으로 갔다가 광복 후 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재개한다. 하지만 1950년 6월 개성을 방문했다가 6·25전쟁이 터지면서 포로로 잡혀 3년간 억류생활을 했다. 1953년 휴전으로 석방된 A.K.젠센 선교사는 모스크바를 경유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1954년 부인과 함께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한국교회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세대학 재단이사로 활동했던 A.K.젠센 선교사는 1956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고문단’ 일행과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회담을 마치고 귀가 하던 중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양화진에 묻혔다. 당시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A.K.젠센 선교사보다 1년 앞선 1926년 감리회 파송으로 내한한 매드 키스터 젠센(Jensen, Maud Keister. 1904∼1998)은 미국 태생으로 내한 초기 인천지방에서 선교하다가 감리회 초기 여성 목사로 안수 받았다. 1928년 A.K. 젠센과 결혼한 그녀는 한국에서 딸(Clair Lee)과 아들 필립(Philip) 낳고 남편과 함께 한국 복음화에 헌신했다. 감리회 서울 선교부에서 사역한 M.K. 젠센 목사는 사별 후에도 계속 한국에 남아 선교사역을 이어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후원받은 모금액으로 1958년 정동제일교회 옆에 젠센 기념관을 세웠다. 젠센기념관은 2년 뒤 정동제일교회 교육관으로 헌증 돼 여러 기독 운동단체들의 사무실로 활용됐다. 자녀와 함께 한국에서 생활한 M.K. 젠센 선교사는 1969년 미국으로 돌아가 선교사직을 퇴임한 뒤 1998년 10월 별세했다. 생의 마지막을 미국 뉴저지주에서 보냈지만 M.K. 젠센 선교사의 유해는 남편이 묻힌 양화진 외국인 묘원에 안치됐다. 한편 젠센 선교사 부부의 딸 클레어 리 젠센(Jensen, Clair Lee)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한 뒤 미국 뉴저지에서 사회봉사 사업가로 복지와 장애인을 위해 일했다. 부모님을 따라 평생 한국을 사랑하며 이 땅을 위해 헌신했던 클레어 리 역시 1996년 2월 별세 후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 2014.05.04 / 오정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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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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