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열전
34-엘리사벳
  • 그리스도인들이여 선한 영향력을 끼쳐라 한 개인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어떠한 사회조직에서 태어나 성장했는가에 따라 인격과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다. 심지어 어떠한 자연환경에서 출생하여 성장했는가에 따라 인격과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보다 나은 환경이 보다 자녀들을 보나 나은 인격체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한 개인이 사회조직이나 심지어 자연환경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사람의 생각으로 인해 사회가 혁신 또는 파멸되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생각으로 인해 자연환경이 보존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디모데는 외할머니 유니게와 어머니 로이스의 영향으로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반면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회심한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해 세계 복음화의 길이 앞당겨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사람을 하나님이 보다 더 기뻐하시는가? 전자보다는 후자의 사람일 것이다. 엘리사벳도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준 영향은 첫째, 그가 가졌던 의로운 모습이었다. 누가복음 1장 6절은 엘리사벳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하는데, 그 의로운 모습이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평생 흠이 없이 지키던 모든 계명과 규례로 인해 늙은 나이에 수태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후대를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귀감이 되었다. 둘째, 그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기적이 다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기적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데 선한 영향을 주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 수태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도 하나님이 태문을 열어 주셔서 침례 요한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기적은 마리아에게 임한 기적을 이해하게 하는데 선한 영향을 주었다. 천사는 자신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던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을 예로 들면서 이해시킬 수 있었다.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좋은 예가 되어 이후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엘리사벳은 여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후세의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여성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해 주목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마태복음에서는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반면 누가복음은 사가랴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인 엘리사벳도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누가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돕되 자비를 털어 도운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는데, 모두 여성들이다. 이러한 모습은 누가복음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에서도 이어지는데, 도르가 즉 다비다가 대표적인 사람이다(행 9:36). 필자가 이전에 기고한 성경인물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비다는 많은 과부들에게 일터를 제공한 훌륭한 신앙인이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이와 같이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행적에 대해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누가복음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엘리사벳이 좋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 혹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산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 심지어 환경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훌륭한 신앙인이란 다른 사람 또는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 또는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일 것이다. 환경이 좋아서 신앙이 좋기 보다는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좋은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적인 사람이 아닐까? 이영호 교수(한세대학교)
  • 2013.03.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33)사가랴
  • 무엇이 부끄러운 삶인가 신앙적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봐도 사가랴는 매우 행복한 삶을 산 사람, 매우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그에 대해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한 언급(눅 1:6)과 주의 사자가 그의 앞에 나타나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라고 말한 것(눅 1:13)을 통해 그가 참으로 경건한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아비야 제사장 반열에서 태어나(눅 1:5), 제사장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보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신앙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직위로 사회적으로 매우 존경받는 성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가 개인적으로도 매우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의 아내가 좋은 가문에서 성장한 사람일뿐만 아니라(눅 1:5), 늦은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상당 기간 동안 어려운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는 있지만 아들을 낳고 난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행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특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가랴는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행복한 삶,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들을 낳았을 때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는 고백을 하였다.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는 삶을 산 그가 왜 이러한 고백을 하였을까? 이는 아마도 부끄러움의 정의 때문일 것이다.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많이 접해 본 서양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 부끄러움(혹은 수줍음)을 많이 탄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부끄러움이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전통에서의 부끄러움은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였을 때 부끄럽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든지, 사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든지, 선비로서 글 읽는 일에 게으른 행위 등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가랴가 말하는 부끄러움, 성경이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이를 정의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가랴의 아들 침례 요한의 일생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침례 요한은 생활에 있어서나 신앙에 있어서 비난 받을 어떤 일을 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모범을 보이며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하나님의 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린 사람이다. 사가랴는 비록 자신의 아들이 하나님의 의를 위해 목 잘려 죽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광스러운 일이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가랴가 말하는 부끄러움, 성경이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그가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힘써서 했는가?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실천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비록 초라한 형색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힘껏 하면서 살았다면 그는 부끄러운 삶을 산 사람이 아닐 것이다. 반면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를 일구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권세 있는 삶을 산 사람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면 그는 부끄러운 삶을 산 사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마지막에 남긴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도 마지막에 하신 말씀들이 아닐까? 성경은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하셨다는 사실을 전한다. 전도하지 못하는 삶, 그것은 부끄러운 삶이다. <이영호 교수, 한세대>
  • 201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32) 문제 해결을 위해 세워진 집사 빌립
  • 집사 빌립이 성경에 등장하게 된 원인은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였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는 과부로 등록된 사람들에게 매일 음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식 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히브리파 과부들은 항상 음식을 제공받는 반면 헬라파 과부들은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는 아마도 당시에 모든 과부들에게 풍족하게 제공할 수 있는 음식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모든 원망이 음식을 제공하는 사도들에게 집중된 것 같다. 사도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반 성도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해 안수하여 일꾼을 세웠는데, 그 중의 하나가 빌립이었다(행 6:1∼6). 이와 같이 빌립이 성경에 등장한 것은 일곱 명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후 사도행전의 내용에는 일곱 집사 중 스데반과 빌립의 활동만 적고 있다. 이는 그만큼 빌립이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빌립의 행적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마술을 행하는 시몬을 회개시킬 만큼 강한 믿음의 역사가 빌립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시몬은 상당히 오랫동안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 사람은 크다”는 칭호를 받고, 또 많은 사람들이 따르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시몬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그가 행하던 마술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가 빌립으로부터 침례를 받는다. 성경은 이에 대한 원인이 빌립이 전도 할 때 더러운 귀신을 내쫓고 많은 중풍병자와 못걷는 사람을 걷게 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행 8:8). 우리는 이러한 기사를 통해 빌립이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표적과 이적을 행하는 능력의 사역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 빌립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복음이 에디오피아에까지 전파될 수 있게 한사람이다. 간다게의 내시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던 중 이사야의 글을 읽고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빌립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복음을 들은 내시는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게 하고 침례를 받음으로 에디오피아 최초의 기독인이 되었다(행 8:26∼39). 셋째, 바울 일행이 가이사랴를 거쳐 로마로 갈 때 자신의 집에 들러 그들이 묵어 갈 수 있게 함으로 기독교 지도자들의 복음 전파를 도운 사람이다(행 21:8). 성경은 이러한 빌립의 행적에 대한 보도를 마치면서 그에게 딸 넷이 있는데 모두 처녀로 예언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빌립에 대한 모든 성경의 언급들을 통해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빌립이 한 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빌립은 평소에 사도들을 도와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빌립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그 문제를 잘 해결했다. 빌립은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면서 능력을 행하였으며 자신의 딸들 또한 복음 전파에 종사하는 하나님이 일꾼이 됐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곳은 교회이다. 이렇게 세워진 각 교회는 항상 크고 작은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꾼은 문제없는 교회에서 문제없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한 곳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일들을 잘 담당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더 귀한 일에 사용하신다. 더 나아가 그의 자녀들까지 아름답게 사용하신다. 사람들은 지금 한국교회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꾼을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아닐까. 이영호 교수(한세대)
  • 2013.01.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마음이 따뜻하고 생명을 존중한 시므온
  • 대선의 열풍이 지나갔다. 국민 각자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서로 다른 후보를 지지하였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다. 반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못한 사람들은 실망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신이 지지하여 당선된 사람이 국정을 운영해도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뽑은 “그가 그럴 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옛 속담에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사실 한 사람에 대해, 특히 그 사람의 미래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상대방을 잘 알고 부부가 되면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인재를 알아보고 그를 잘 교육한다면 이보다 더 보람된 일은 없을 것이다. 국정을 운영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여 모든 국민들을 품을 수 있는 후보자를 유권자들이 알아보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는다면 국가가 번영할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은 5년 동안 만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사람을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혜안을 가진 사람 또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시므온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을 때에 유대의 관습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가 안고 들어온 아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고 하나님을 찬송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러한 혜안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그에 대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고 묘사한다.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에서 ‘의’라는 단어는 주로 사람의 행위가 아닌 성품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말이다. 이 말은 마태복음에서 요셉에게 처음 적용되어 사용된다.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가만히 끊고자 했고, 성경은 이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마 1:19). 그가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마리아와 공개적으로 파혼하면 마리아는 간음한 것이 되어 투석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평생 간음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된다. 반면 이러한 사실을 숨긴 채 파혼하면 마리아는 비록 결혼에는 실패할지라도 간음했다는 죄는 면죄 받을 수 있다. 요셉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임신한 마리아를 자신의 신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그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 주고자 하는 착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착한 요셉에게 성령이 임하여 마리아가 잉태한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이 전달된다. 그러므로 시므온에 대해 의롭다고 표현한 것은 곧 마음이 따뜻하여 사람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건이라는 말은 신앙적으로 흐트러짐이 없는 생활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말은 위로를 사모하되 개인에게 위로가 임하는 것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게 위로가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므온이 이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령이 계셨고, 그 결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단 번에 알고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이다. 시므온은 마음이 따뜻하여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죄로 인해 척박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땅에서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위로가 임하는 것을 바라며 사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에게 성령이 임하였으며,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한 겨울이다. 차가운 바람이 단지 차갑지만 않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빛으로 오신 성탄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건하여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따뜻한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한 시기이다. 이영호 교수(한세대학교)
  • 2012.12.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30) 끝까지 주님을 닮아간 ‘스데반’
  • 비록 그것이 큰 문제인지 아니면 작은 문제인지에 대한 차이는 있지만 세상의 모든 단체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한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발생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초대교회에도 문제는 늘 발생했다. 그 중 하나가 과부들을 어떻게 공궤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초대교회에서는 과부로 등록된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5장 9절 이하를 통해 초대교회에서 과부들을 돌보는 방식이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에서는 유대계 유대인 과부들과 헬라계 유대인 과부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서로 다른 대우를 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문제는 곧 사도들을 원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사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택한 방식은 자신들의 직능 일부를 분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양하는 방식이었다. 성경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7명을 택하여 공궤하는 일을 맡겼다고 보도한다. 그리고 임명된 7명 중 스데반을 맨 처음에 언급한다. 이들이 처음에는 초대교회의 공궤를 담당하기 위해 임명되었지만 임명된 이후에 이들이 맡았던 임무는 더 확대됐다. 이들 중에 스데반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게 행했다. 그러던 중 세계 각처의 회당에서 올라온 사람들과 논쟁이 벌어졌고, 이 논쟁은 곧 대제사장이 참여한 많은 군중 앞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발전되어 흥분한 무리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스데반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성경의 본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우선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보도이다. 성경은 스데반이 공회에서 변호할 때에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전한다(행 6:15). 이러한 보도는 스데반이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 특히 율법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군중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스데반의 이 기도가 누가복음 23장 34절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기도와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스데반은 죽을 때까지 주님을 닮은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스데반에 대한 이러한 성경의 보도를 통해 우리는 스데반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추정할 수 있다. 스데반은 헬라계 유대인으로 초대교회를 섬기는 일에 충성하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때에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의 한 명으로 신임을 받아 사도들의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과 복음에 대해 변호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열심은 곧 순교로 이어졌는데, 그는 순교를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과 닮은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비록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죄악과 사망이 다스리는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문제가 발생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데반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이 중요하다. 그는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지혜를 가진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지혜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을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닮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 죽어가면서까지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한세대
  • 2012.11.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자, 침례 요한
  • 침례 요한은 신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예언을 하였고, 헤롯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목이 잘려 죽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 11장 2∼6절에서 또 다른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의 의미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아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대답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인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앞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실족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신 6가지 일들 중 사람들을 실족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소경이 보게 된다거나 앉은뱅이가 걷는 것, 문둥이가 치료되어 깨끗하게 되는 것과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기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남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실족거리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들 중에는 사람들이 이해하여 동의하는 것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여 동의하지 않는 것도 있다. 가령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동의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귀감이 되어 다른 사람들 또한 열심히 공부하게 되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학생이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갖게 되었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기 보다는 그가 그렇게 된 배경에 대해 궁금해 하며, 그가 가진 지위와 권력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것을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 또한 같은 원리이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어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것은 많은 사람의 동의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측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것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그 가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또한 실족거리는 아닐 것이다. 필자는 이 원인을 침례 요한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침례 요한에게 한 답변은 사실 이사야서가 담고 있는 메시아 예고를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중,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인용하지 않으셨다. 구약에 정통한 침례 요한이 예수님의 행적을 들었을 때 한 가지 예언만 더하면 그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이었다. 중요한 것은 침례 요한에게는 다른 예언보다는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는 악한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을 인용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까지 심판은 연기되어 있다. 그 이유는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침례 요한이 기다리는 악인에 대한 심판이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자신을 가둔 헤롯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은 곧 목이 잘려 죽게 될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여러 종류의 신앙 형태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역사이다. 그중에는 질병을 극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 성도가 있는가 하면, 주님 주신 능력으로 귀신을 쫓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불의와 맞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에 이른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보며 실족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침례 요한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여자가 낳은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침례 요한은 가장 비참하게 살았으나,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낸 사람이다. 이영호 교수(한세대)
  • 201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리더십의 모범을 보인 바나바
  • 필자가 이전에 바나바에 대해 한 번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소개하는 것은 바나바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인품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바나바에 대해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다(행 11:24)는 세 개의 형용사를 사용하여 소개하는데, 성경 인물 중 이러한 칭찬을 받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은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보도한다. 안디옥 교회가 성장하자 사도들은 신실하고 헌신적인 바나바를 파송하여 목회를 하게 하였다. 그런데 바나바는 나중에 바울로 불리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까지 간다. 그러면 바나바는 왜 그를 찾으러 다소까지 갔을까? 독자들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목회와 선교 능력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나바가 바울을 부르기 전까지 어떠한 탁월한 능력도 그에게서 나타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사용하는 언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안디옥 교회는 디아스포라 교회이다.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 밖에 사는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로, 이들은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지만 문화·언어적으로는 이방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 지역에 거주하면서 헬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바나바는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아람어가 모국어였다. 반면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헬라어에 정통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바나바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안디옥 교회의 성도, 특히 상대적으로 아람어에 익숙하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헬라어를 잘 구사하는 바울을 다소에까지 찾아가 청빙하여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성경의 진술을 통해 우리는 바나바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는 멀리까지 가서 인재를 청해오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도자 양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15년 전에 발생한 이공계 기피현상이 재앙으로 다가왔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태양광 산업에 올인 하고 있는 국내의 모 그룹이 독일의 태양광 업체 큐셀을 인수했는데, 그 이유가 국내에서는 태양광 인재가 없기 때문이라는 기사였다. 여기에 더하여 이 신문은 국내 중소기업이 이공계 인재 구인난에 처한 상황까지도 자세히 소개하였다. 보도에서 이러한 현상을 보도한 것은 이공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하면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면서 보다 쉬운 일, 보다 많은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는 산업으로 인재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며, 경제적 논리에 따라 발생하는 현상에 대해 국민들을 탓할 수 없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 혹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필자는 바나바와 같은 리더십이 이러한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나바는 자신의 교회의 현상과 미래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에 필요한 인재를 영입하였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자신보다 더 우수한 인재인 바울을 영입하여 해결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이나 화려하지 않은 이공계 인재가 없다면 여러 가지 유인책을 써서 이를 진작시키는 것이 조국을 사랑하는 어른들이 할 일이다. 필자는 교회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주의 종은 신학교 교육을 통해 양성된다. 최근 들어 각 신학교에 지원하는 입시생이 현저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떨어져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미국의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듯이 경제가 발전하면서 목양의 길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이 할 일은 찾아오지 않는 학생들을 보면서 한탄 할 것이 아니라, 바나바와 같이 인재를 찾아가서 청빙하는 것이다. 각 신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유인책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는 일이 다가오는 세기의 한국 교회를 섬기는 일이다. 바나바는 이러한 면에 있어서 리더십의 모범을 보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영호 교수 (한세대)
  • 2012.09.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하나님의 사람 선택해 기쁨 누린 ‘보블리오’
  • 구한말 우리나라가 개방에 적극 나서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서구 문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개화기에 서구 문물로 인해 웃지 못 할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가령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다든가, 자명종에 귀신이 붙었다고 푸닥거리를 한 것 등이다. 필자 또한 아폴로호가 달에 착륙하였을 때 동네 노인분들이 모여 미국은 달 착륙을 당장 그만 두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토끼가 놀라 이리저리 뛰면 달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분들이 목소리 높여 외치던 모습을 반영하면 이들의 이러한 생각은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에 대한 무지일 것이다. 산업화 되지 않은 조선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사진기는 영혼을 빼앗아가는 악귀일지 모르나, 산업화되어 있는 서구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담아둘 수 있는 문명의 이기이다. 산업화되지 않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자명종은 귀신의 장난으로 보이지만 산업화된 사람에게는 단지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사실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배척하는 가의 문제이다. 서구의 문물에 놀란 일본은 이를 적극 받아들인 결과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서구의 문물을 상것으로 보고 쇄국을 택한 조선은 상당히 오래 동안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고통은 지금도 일부 이어지고 있다. 성경도 동일한 진리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보블리오가 이러한 진리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보블리오가 멜리데 섬에 사는 야만인 중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묘사한다(행 28:1∼7). 보블리오가 비록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지만 야만인이라고 한 것은 당시 로마의 관점에서 볼 때 헬라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즉 멜리데에 사는 보블리오는 문명화된 로마 사회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사는 미개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어느 날 이들에게 파선된 배에 타고 있던 문명화 된 로마 사람들이 상륙하였다. 문명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뱀에게 물려도 죽지 않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보블리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것은 환영하여 이들을 도와주든지, 아니면 배척하여 살해하든지. 보블리오가 선택한 것은 이들을 환영하여 살려주는 것이었다. 파선으로 인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청하여 3일 동안이나 먹여주고 재워주는 친절한 대접을 하였다. 그 결과 자신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부터 고침 받는 기적을 경험하였다(행 28:7∼10). 성경이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눈에 기이할 수 있다. 남을 이겨야 하는 경쟁의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말씀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전혀 반대일 수 있다. 시간이 곧 금이 될 수 있는 바쁜 현대의 사회에서 주일을 정하고, 그날을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은 곧 경쟁에서 뒤처지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많이 쌓아야 나의 재물이 되는 현실 속에서 내 것 중 일부를 포기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나선다는 것은 현실에 동떨어진 가르침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또 다른 세상, 즉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전적으로 따르지 못한 가르침이나 그 가르침은 선진화된 천국의 가르침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기이한 가르침이나 천국에서는 일상적인 가르침에 불과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배척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배척하면 앞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땅에서 나는 괴로움으로 고생할 것이다. 반면 이 가르침에 따르면 새로운 세상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많은 복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보블리오는 바로 이러한 선택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택해 자신이 살면서 경험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린 사람이다. 이영호 교수(한세대)
  • 2012.08.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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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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