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근 목사의 4차원의 영성과 삶
신앙의 모범이신 예수님
  •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대상일 뿐 아니라 우리 신앙의 모범이시기도 하다. 예수님은 4차원의 영성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부정적인 생각을 책망하셨다. 예수님께서 4차원의 영성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풍성하게 나타나셨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과 생각이 달랐다. 예수님은 ‘안 된다’거나 ‘절망적이다’는 생각을 하신 적이 없다. 공생애 시 예수님께서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이 아니라, 절대 긍정적인 생각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었다. 광야에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먹일 것이 없었을 때 제자들은 4불가지론을 내세웠다. 장소가 광야이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떡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떡이 없기 때문에 그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생각이 달랐다. 능히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먹이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 결과 제자들이 떡을 나누어주어서 무리들이 배불리 먹게 되었다(마 14:16,19).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데도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으셨다. 예수님은 기적이 결코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기적에 대한 생각이 절대 긍정적이었다(마 7:7∼11). 예수님은 그 생각이 절대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아멘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과 믿음이 달랐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믿음만 있으면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제자들도 행할 수 있다고 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이 말씀은 “나는 야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는 예레미야서 32장 27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셨다. 다시 말하여,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종종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 8:13),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9:29)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데 믿음의 중요성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4차원의 믿음을 겨자씨로 주신다(막 17:20). 그리고 기도하면 그 믿음이 자란다(막 9:29). 셋째,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분명한 꿈을 가지셨다. 예수님 혼자서 어떻게 그 큰일을 감당하겠느냐고 절망하지 않으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꿈을 가지셨다(요 12:24). 성령을 부어주시면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신앙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꿈을 가지셨다(눅 13:6∼9). 예수님은 꿈을 이루시기 위해 제자들을 기르셨다. 제자들이 비록 우둔하였지만 성령을 받으면 그들이 온 세계에 나아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셨다(행 1:8). 성령이 오신 후 불과 30년 만에 복음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인도에까지 증거됐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인류 구원의 꿈을 꾸셨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꿈의 산물이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 세계복음화의 꿈을 꾸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꿈이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이루어졌듯이, 우리가 지금 꾸는 세계복음화의 꿈은 멀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믿음을 입술의 말로 고백하고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하게 나타내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실 때 당신 자신이 입술의 말로써 믿음을 선포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먼저 드리셨고(마 14:19),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하늘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먼저 드리셨다(요 11:41,42).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때도 최종적으로 입술의 고백을 듣고 기적을 베풀어주셨다(마 8:10; 막 7:29; 막 10:51). 4차원적인 생각, 꿈, 믿음은 최종적으로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현실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써 잘 쌓아놓은 믿음의 탑을 무너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고쳐먹고, 꿈을 변화시키고,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입술의 고백을 바르게 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다 체험하게 될 것이다. 임형근 목사(동대문성전 담임)
  • 2011.12.11

    성령 충만해 하나님의 꿈 이루자!
  •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4차원의 영적 세계를 잘 아는 자였고 그의 인격이 4차원의 영성으로 잘 훈련된 자였다. 바울 서신에서 바울 사도의 4차원 영성을 살펴보자. 먼저 에베소서 3장 20절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데 생각과 말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입술의 말과 생각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과 말이 하나님과 코드가 맞아야 한다. 하나님께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렘 32:27), 우리의 생각과 말이 하나님과 코드가 맞아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실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어떠한 형편이나 상황에서도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빌 4:12).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고백했다. 우리가 주님을 섬겨서 행하는 모든 일은 주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택해서 일을 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입술의 말과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맞아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기적이 능히 일어난다는 믿음을 입술로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도구로 쓰신 것처럼 우리도 도구로 쓰실 것이다. 두번째 생각해 볼 구절은 로마서 6장 11절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기독교인의 믿음은 4차원적인 믿음이다. 지금 현재 내 자신을 볼 때 여전히 죄 가운데 있지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끄러운 자이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고 했다. “여기다”는 것은 ‘어두운 심리로 느낄 수는 없지만 믿음으로 그렇게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즉, 현재의 사실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 관한 사항이다. 4차원적 믿음이란 현재적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기초한다.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인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하셨으면 나도 내 자신을 의롭다고 해야 한다. 믿음이란 영적 세계의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이 보시는 방식대로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비록 지금 내가 죄를 짓고 있더라도 죄인으로 보지 않고 의인으로 보신다. 비록 지금 내가 병들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치료받은 것처럼 보신다. 비록 지금 현재 내가 가난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부요한 자로 보신다. 그러므로 4차원적인 믿음이란 십자가를 통해 나 자신에 대한 변화된 자화상을 갖는 것이다. 실제적인 변화는 그런 다음에 일어난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변화된 자화상을 가지라고 교훈한다. 이것이 곧 그가 깨달은 4차원적인 믿음이다. 세번째 생각해 볼 구절은 사도행전 20장 23∼24절이다. 바울 사도는 꿈과 목표가 분명한 인생을 살았다. 바울 사도는 성령이 주시는 비전에 취해서 살았다. 성령께서 바울 사도에게 주신 비전은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것과(행 9:30), “결박과 환난이 바울 사도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행 20:23). 바울 사도가 성령께 받은 비전은 ‘성공’이 아니라 ‘사명’이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은혜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힘은 성령께서 주신 ‘사명’ 때문이었다. 바울 사도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가졌던 소원은 바울 개인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다. 그리고 그 사명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꿈과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명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임형근 목사(동대문성전 담임)
  • 2011.11.13

    말씀대로 물 위를 걸은 베드로
  • 베드로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면 그는 4차원의 영성으로 가득한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 첫째,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생각이 달랐다. 인간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라고 하였다.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하면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난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생각이 바뀔 수 있다고 믿은 것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이른 아침에 깊은 데에서 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어부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는 말씀이 자기의 가슴에 와 닿자 그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어부의 경험과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와 닿자 그의 머리와는 달리 발걸음이 바다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생각의 차이가 역사를 일으킨다. 인간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실제로 물 위를 걷는 역사가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많은 귀중한 발견과 발명들은 인간의 생각 속에서 먼저 일어났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면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일들이 현실로 가시화돼 나타날 수 있다. 둘째, 베드로는 말의 능력을 믿고 또 사용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는 것을 많이 보았다.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후 성전으로 올라가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보았을 때 예수님이 생각났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소경을 고치시고, 간질병 들린 젊은이를 고치셨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래서 미문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고 선포하였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서 그 앉은뱅이 걸인이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임하자 베드로는 그것을 입술의 말로 선포했다. 입술의 말로 선포하면 듣는 자에게 믿음이 생겨나고 선포하는 선포자에게도 믿음이 더해진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선포되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 셋째, 베드로는 믿음의 중요성을 많이 체험했다. 베드로가 믿음의 사람이었다기보다는 믿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체험한 제자였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실 때 종종 하신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말씀이었다(마 6:30, 8:26, 14:31, 16:8, 17:20, 눅 12:28). 그러므로 베드로 역시 믿음이 적은 제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한 제자 몇 명을 가까이서 데리고 다니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체험하게 해 주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칠 때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고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들어가셨다(막 5:36,37). 중요한 영적인 체험을 할 때도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변화산 상에서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있었다. 직접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나의 믿음을 키우는데 중요하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어라”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훈련받았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생기자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다(행 3:16). 우리가 4차원의 영성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입더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잘 훈련 되어 있지 않으면 충실한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없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후 총을 지급 받는 군인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잘 이해하고 깨달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께 쓰임 받는 훌륭한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임형근 목사(동대문성전 담임)
  • 2011.10.09

    긍정적 생각·말·행동의 요나단
  •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영성은 그의 아버지와는 많이 달랐다. 사무엘상 13∼14장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4차원적 영성을 소유한 자임을 알 수 있다. 첫째, 요나단은 생각이 달랐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히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당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블레셋의 병력은 병기가 3만이요 마병이 6000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다(삼상 13:5). 그런데 사울을 따르는 군사는 6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삼상 13:15). 게다가 칼을 든 자는 사울 왕과 요나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병력과 화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요나단은 그러한 전쟁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나단은 자기의 부관 한 사람을 데리고 적진 속으로 쳐들어갔다. 적진 속에서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 20명 가량을 죽이자 갑자기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들을 치기 시작했다(삼상 14:20). 그래서 전쟁에 대승을 거두었다. 기독교인에게 생각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각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있거나,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신다. 요나단은 자기의 부관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야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삼상 14:6)고 했다. 요나단은, 병력이 350 대 1이 넘고 화력이 18만 대 1이 넘는 블레셋을 앞에 두고 하나님이 일하시면 능히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했다. 기적의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기적을 꿈꾸고 상상하여야 한다. 우리의 생각 속에 꿈꾸고 그리는 그것이 현실 속에 나타난다. 둘째, 요나단은 입술의 말이 달랐다. 요나단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대로 입술로 선포했다. “야훼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들으시고 그 고백을 따라서 역사하신다. 요나단은 환경을 바라보고 말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이스라엘에게는(요나단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입술의 말로 고백하고 선포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적의 하나님을 증거하시 되 최종적으로 입술의 말을 통하여 증거하신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 딸의 귀신 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차갑고 냉정하게 대답하셨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그러자 여인은 대답하기를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절)라고 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말을 들으시고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고 하셨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병 고침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아셨지만 입술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리고는 최종적으로 입술의 고백을 들으시고는 병을 고쳐주셨다. 입술의 고백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최종적인 단계이다. 셋째, 요나단의 뛰어난 영성은 확신 있는 행동이었다. 요나단은 단순히 멋있는 말만 하는 말쟁이가 아니었다. 구원과 능력과 기적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요나단은 그의 부관에게 말하기를 “야훼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실 테니까 우리가 적진 속으로 건너가자”(삼상 14:6)고 했다. 기적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믿음의 발걸음을 옮겼다.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믿음이다. 요나단에 관한 기사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을 준다. 하나님은 전쟁에서 승리를 주실 때 많은 이스라엘 군대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기적의 하나님을 확신하는 한 사람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에 하나님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늘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는 한 사람을 찾으신다. 4차원의 영성이 잘 훈련되고 길러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임형근 목사(동대문성전 담임)
  • 2011.09.11

    꿈과 목표의 사람, 다윗
  • 다윗은 영적인 원리를 잘 깨달아 아는 자였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면 현실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아는 자였다. 어릴 때 사무엘에게 사울 다음의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다윗은 하나님의 영이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삼상 16:13). 특히 하나님의 영은 악기를 타고 찬송할 때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의 이러한 체험은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래서 사울이 악신이 들어서 괴로워할 때 수소문하여 다윗을 불렀다. 4차원의 영성이란 성령의 임재와 함께하심의 중요성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하자 다윗의 생각이 바뀌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면서 “너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하자, 다윗은 그때부터 자기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은 꿈과 목표가 분명해진다. 하루는 블레셋이 골리앗을 내세워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러 갔다. 다윗은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렸다.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윗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절호의 기회다. 골리앗을 죽이면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의 사위가 되면 왕도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사울 왕 앞에 나아가서 “내가 나가서 저 골리앗과 싸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울 왕이 보고는 “너는 너무 어려서 안 된다. 상대도 안되니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는 곰도 때려눕히고 사자도 때려눕혔으니 싸움을 붙여달라고 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겠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목표가 있으니까 그 목표에 목숨을 걸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정해놓았으니까 그냥 우연히 이스라엘 왕이 된 것이 아니었다. 다윗은 왕이 되겠다는 목표에 목숨을 걸었다. 성령과 함께한 다윗은 꿈과 목표의 사람이었다. 성령이 함께 한 다윗은 한 번도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할 때 큰 형 엘리압이 무시하고 화를 내면서 꾸짖었다. 사울 왕 역시 다윗의 용모를 보고 돌아가라고 했다(삼상 17:33). 그러자 다윗은 대답하기를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 17:36)라고 고백했다.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이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생각이 달랐고 입술의 말이 달랐다. 4차원의 영성은 자기 최면이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하여 자기 속에 있는 잠재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4차원의 영성이 아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담대한 믿음을 갖고 생각과 말을 바꾸는 것이 4차원의 영성이다. 4차원의 영성으로 무장된 사람은 환경을 바라보고 주눅 들지 않는다. 체구를 비교해보면 다윗과 골리앗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가진 무기를 비교하더라도 다윗이 가진 물매와 골리앗의 거대한 칼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의 외모를 바라보지 않았다.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골리앗 앞에서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고 선포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환경에 주눅들지 않고 환경을 다스리고 변화시키는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한 가지 우리가 성령의 임재의 중요성을 안다면 성령이 우리를 떠나는 것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다윗은 밧세바와 범죄한 후 하나님 앞에 가장 두려워한 것이 성령이 자기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간청했다. 4차원의 영성의 핵심에 있는 것은 성령이다. 꿈과 환상을 주고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주고, 믿음의 말을 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순복음의 성도들은 늘 성령 하나님을 경외하는 4차원의 사람이 돼야 할 것이다. 임형근 목사(동대문성전)
  • 2011.08.14

    믿음은 순종에서 생긴다
  • 사무엘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생각, 꿈, 믿음, 말이라는 4차원의 영성을 도식화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무엘의 삶과 사역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생생하게 나타났다. 4차원 영성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나타나시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통로와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사무엘은 4차원 영성의 사람이었다. 사무엘의 4차원적 영성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에서 비롯됐다.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 생각이 바뀐다. 말이 바뀐다. 믿음이 달라진다. 사무엘이 능력의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어머니 한나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무엘 당시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드문 시대였다. 제사장들은 형식적으로 제사를 집행하는 종교인에 불과했다. 엘리 제사장은 기도하지 않아 몸이 비대해졌고,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삼상 2장).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때에 한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한나에게서 자녀를 기대하지 않았다. 서로가 사랑하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한나는 남편의 그러한 위로를 거절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으면 성전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주실 수 있다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결과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다. 사무엘을 낳고 난 다음 한나는 이렇게 신앙 고백을 하였다. “야훼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야훼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떠한 일을 행하시는지 알게 된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 한나로부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잘 교육받았다. 하나님은 능히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4차원의 영성은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4차원의 영성을 완전히 마스터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도 아니다. 4차원의 영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과정을 통하여 점점 자란다. 그러므로 4차원의 영성을 형성하는 밑바닥에 있는 것은 체험적인 신앙이다. 사무엘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믿음이 순종에서 생긴다는 것을 사무엘의 삶은 잘 보여준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순종이 몸에 배인 자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리에 누었을 때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모르고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다. 엘리 제사장은 자기가 부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돌아가 자리에 눕자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고 사무엘은 다시 엘리 제사장에게로 갔다. 이런 일을 세번 반복하였다. 4번째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들었을 때 사무엘은 자기를 부르시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엎드렸다. 그리고는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하였다. 사무엘은 하루 종일 일하고 몸이 피곤하였지만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들었을 때 즉시 일어나서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다. 이렇게 순종이 몸에 배인 사무엘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 함께 해 주셨다. 믿음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내 안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담대함을 주시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순종하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함께 계셔서 믿음을 주셨다. 사무엘상 3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무엘이 자라매 야훼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 3:19). 하나님이 사무엘과 함께 하시니 사무엘은 담대하게 믿음으로 기도하고 입술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선포했다. 그 결과 사무엘의 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4차원의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순종의 훈련이 필요하다. 불순종하는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한 사무엘의 말은 자신의 신앙적인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었다. 요약하면, 사무엘의 인생은 4차원의 영성을 갖추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과 순종의 훈련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임형근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
  • 2011.07.08

    기드온의 영성
  • 사사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물리치는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사사들 중 기드온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4차원의 영적인 사람이 되었던 것을 성경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 먼저 기드온의 자화상을 바꾸도록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원래 소심한 자였습니다. 그는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하여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야훼의 사자가 제일 먼저 한 말이 “큰 용사여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드온은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 6:15)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그만큼 소심하고 용기가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야훼의 영이 임하시니 기드온이 달라졌습니다(삿 6:34). 미디안 연합군 13만 5000명이 모였는데 불과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그들과 전쟁을 하러 나갔습니다. 능히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의 자화상을 바꾸어 줍니다. 용기와 힘을 주고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줍니다. 성령은 우리의 환경을 바꾸기 전에 먼저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 먹도록 하십니다. 기드온이 칼과 창을 가지지 않고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가진 300명을 가지고 13만 5000명의 미디안 연합군에게 나아간 것처럼, 성령의 은혜로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지면 빈 손으로 큰 기업의 경영주가 되고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담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이 주시는 담대한 믿음으로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여 거대한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의 변화를 보기를 원하는 분들은 성령으로 마음과 생각을 먼저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용하실 때 또한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미디안과 전쟁을 할 때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세번에 걸쳐서 병사를 모집하고 선별하였습니다. 3만 2000명 중 두려워 떠는 자 2만 20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남은 만 명 중 물가에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300명이 남았습니다. 300명의 군사로 13만 5000명의 미디안 연합군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계획은 창과 칼을 지니지 않고 전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미디안에게 전쟁의 승리에 대한 용기와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한 밤중에 적진 속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미디안 진영에서 병사들이 하는 말을 듣게 하셨습니다. 미디안 진영에 몰래 들어갔더니 미디안 병사 한 사람이 그 친구에게 자기의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삿 7:13). 그 꿈 이야기를 들은 병사가 말하기를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삿 7:14)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기드온은 손이 강해졌습니다(삿 7:11). 그래서 조금도 주저함 없이 미디안 진영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병사가 꾼 꿈과 그 해석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꿈과 해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기드온은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격용 무기도 없이 소수의 병사를 데리고 적진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물론 전쟁에 승리를 주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기드온에게 승리를 꿈꾸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꿈은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통로가 됩니다. 성령께서 일하시고자 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 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인생의 전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승리와 성공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러한 꿈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더욱 더 성령 충만함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임형근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
  • 2011.06.10

    갈렙의 영성
  •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출애굽 1세대 중 한 사람이다. 열 두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탐지한 후 10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에 대하여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지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침공에 대하여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다.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가 선택되었지만 갈렙은 어떤 점에서 여호수아보다 더 뛰어난 4차원 영성의 사람이었다. 첫째, 갈렙은 말이 달랐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하자고 백성들에게 권유한 자가 갈렙이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의 말을 들으신 후 그들을 심판하실 때 갈렙만은 예외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죽고 2세대들이 모압 평지에 모였을 때 모세는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갈렙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야훼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신 1:36)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안 된다고 말할 때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고 된다고 말한 자가 갈렙이었다. 4차원의 영성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철저하게 믿고 그것을 힘차게 시인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순종하는 영성이다. 믿음-고백-순종-충성은 4차원 영성에서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갈렙을 칭찬하실 때,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다르다”고 하셨다. 입술의 말은 마음에서 나온다. 단순히 긍정적인 말을 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 4차원의 영성이 아니다. 4차원의 영성은 마음이 다른 영성이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영성이 4차원의 영성이다. 4차원의 영성은 또한 하나님께 충성하는 영성이다. 모세는 갈렙을 칭찬할 때 “온전히 야훼께 순종하였다”(신 1:36)고 하였다. 4차원의 영성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자기에게 강력한 최면을 거는 것도 아니다. 4차원의 영성은 자기가 대단한 무엇이 된 자임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져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종의 영성이다. 종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갈렙은 종의 자세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고 나중에 고백하였다(수 14:8). 그러므로 4차원의 영성의 사람은 믿음과 고백과 순종과 충성이 다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둘째, 갈렙은 확고한 꿈과 믿음의 사람이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할 때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헤브론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 나이가 이제 85세가 되었지만 “야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라고 하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꿈과 믿음을 가진 지 45년이 지나서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꿈과 믿음이 변하지 않았다. 절망적인 환경을 만나게 되면 꿈이 무너지기 쉽다. 마음에 가장 큰 절망을 주는 것은 나이이다. 그처럼 위대한 모세도 80세가 되어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을 때 5번이나 거절하였었다. 나이로 인한 절망이었다. 그런데 갈렙은 85세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가나안 땅에 거할 수 있다는 그의 꿈과 믿음이 변하지 않았다. 4차원의 꿈은 환경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갈렙은 85세가 된 지금도 야훼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므로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헤브론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꿈과 믿음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4차원의 꿈과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요셉은 형들이 절하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었다. 요셉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주신 것이었다. 요셉은 꿈이 부서지는 것 같은 체험을 여러 번 하였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령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 역시 갈렙이나 요셉과 같은 꿈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자에게는 나이와 환경과 신분과 지위가 꿈을 이루는데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다. 임형근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
  • 2011.05.06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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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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