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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대기암교회
2016.08.21 / 오정선 기자

1896년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에 세워진 장로교회

채명신 장군 외조부 박진준 장로가 설립
민족정신, 금주·금연 등 절제 운동 적극 전개


 대기암교회는 평안남도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에 세워진 장로교회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평양시 대동강 남쪽으로 위치했던 교회다. 대기암이라는 이름은 ‘마을에 물이 솟아나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기암교회는 1896년 세워졌다. 대기암리에 살던 박진준과 김영백 등 여섯 명의 주민이 예수를 영접하고 박진준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박진준은 1903년 대기암교회 장로가 됐다. 박진준 장로는 자신의 토지를 교회에 기부해 그 땅을 기반으로 3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건립됐다.

 교회 부흥에 있어 헌신적으로 나선 박진준 장로는 바로 초대 파월군사령관을 지낸 고 채명신 장군(2013년 11월 소천)의 외조부이다. 독실한 신앙인(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신앙은 바로 외가에서 비롯됐다. 구한말에 하나님을 영접한 외조부 박진준 장로는 복음전파는 물론 일대 주민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미신을 타파하고 주민들 사이에서 금주·금연 등 절제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외조부의 영향으로 채명신 장군은 목회자를 꿈꾸기도 했으나 공산주의 체제로 들어서면서 북한을 탈출, 군인이 됐다.

 박진준 장로 등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초기 그래함 리 선교사(한국명 이길함)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부터는 조사(장로교에서 목사를 도와 전도하는 교직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었다. 1904년에는 채정민 조사가 시무했는데 그는 이후 목사가 됐다. 채정민 목사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지도한 인물 중 하나로 한국 사회와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경고해 ‘회개를 외치던 선지자’로 불리우기도 했다.

 대기암교회는 1914년부터 오능조 조사가 시무했다. 중화군 출신인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다닐 당시 일어난 3·1운동 때 평안도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또 1919년 10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성립 축하문을 발표할 때 30인의 대한민족대표의 명단이 적힌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축하문’에도 그 이름이 올라있다.

 대기암교회는 계속되는 부흥 속에 1913년에는 교인 수가 200명에 달했고, 1915년에는 지교회로 중화군 신흥면에 성천리교회를 설립해 박진준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대기암교회는 지교회 설립 뿐 아니라 학교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하지만 교회가 침체기를 겪으면서 교인이 떠나고 학교마저 폐교되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또 교회의 기둥으로 부흥에 힘쓴 박진준 장로가 병으로 고생하면서 교인이 한 때 30명으로 줄어드는 아픔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꾼들로 인해 다시 부흥을 맞으면서 일대 복음화를 위해 힘썼다.

 대기암리는 1952년 북한의 군면리 대폐합 정책에 따라 강남군이 구성되면서 신흥면 간산리, 상삼리, 대기암리가 병합해 상암리로 변경됐다. 강남군은 현재 강남읍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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