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설 가정 예배
  •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은혜 베푸시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찬송가 570(통 453), 549(통 431), 405장(통 458), 542(통 340) 중 2∼3곡을 찬송한다. ⨀ 예배로 부르심(사회자) :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설 가정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 신앙고백(사회자) : 사도신경 ⨀ 찬송(다같이) : 304장(통 404) ⨀ 대표기도(맡은이) ⨀ 성경봉독(다같이) : 롬 8:35-39 ⨀ 설교(맡은이) : 넉넉히 이기느니라 ⨀ 찬송(다같이) : 546장(통 399장) ⨀ 주기도문(다같이) 넉넉히 이기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2026년 설 명절을 맞아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해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 가정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되새기며 풍성한 은혜를 나누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이는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는 우리가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받을만한 모습이 전혀 없는데도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크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새해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끊임없이 공격해 옵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유대인 가운데서 촉망받는 청년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 환난과 곤고, 박해와 기근, 적신과 위험과 같은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롬 8:35). 고난이 심했던지 그는 자신의 처지가 도살당할 양과 같았다고 고백했습니다(롬 8:36). 바울은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시련도 바울을 넘어뜨릴 수 없었던 이유는 그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고난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며 살아가도 때로는 힘든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고난에서 구해주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3. 주님이 주시는 승리 로마서 8장 37절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넉넉히 이긴다’는 것은 겨우 이기는 승리가 아닙니다. 적을 완전히 정복하여 다시는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문제로 인해 쉽게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모든 환난에서 지켜주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결국 우리는 넉넉히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2026년 한 해도 이 믿음을 가지고 넉넉히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손을 굳게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6.02.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년 인터뷰] 엄태욱 부목사(목회담당)
  • 전 세대 말씀 묵상으로 삶이 예배 되길 새해 핵심 사역으로 강조된 ‘예배’의 본질 회복을 위해 교회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려는 예배 관련 사역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목회 방침에 따라 주일예배와 수요말씀강해, 금요성령대망회, 새벽예배 등 모든 예배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성도들이 『감사QT 365』를 통해 삶의 자리에서도 예배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성도들이 새벽예배에서, 또 각자의 처소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일상이 예배가 되고, 그 은혜가 다시 공예배의 감격으로 이어지는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수 있도록 교역자들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도와 구역·공동체 활성화를 통한 균형 있는 부흥을 위해 2026년에 계획 중인 주요 과제는 무엇입니까? 건강한 구역 공동체가 곧 전도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구역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갈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초대할 수 있고 새가족들도 편안하게 정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교역자들도 현장에서 수고하는 지·구역장들이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육과 지원에 더욱 힘쓰려 합니다. 장년 세대의 부흥과 참여가 지속되기 위해 교회 차원에서 필요한 사역과 지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 모두가 장년국과 대교구3450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서 든든히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장년 성도들이 남·여선교회 등의 교회 기관에서 봉사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장년 성도들을 직접 만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교회의 허리 역할을 하는 장년 세대를 위해 같이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순복음 성령 충만의 신앙을 다음 세대에 계승하기 위해 교회와 가정이 함께 실천해야 할 역할로 무엇이 있을까요? 부모 세대가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자녀들과 함께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또 가정에서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습이야말로 자녀들에게 가장 큰 신앙 교육입니다. 교역자들도 청년이나 청소년은 물론이고 어린이들까지도 성령 받고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회에서 받은 은혜가 가정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부모님들도 믿음의 울타리가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새해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비전을 세우고 적용하도록 돕기 위해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실까요? 올해 우리 교회는 『감사QT 365』를 활용해 성도들이 말씀과 동행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이 책을 길잡이 삼아 같은 말씀을 읽고 묵상한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안에서 가정이 하나 되고, 넘치는 감사로 삶을 채워갈 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정리=오정선 / 사진=김용두 기자
  • 2026.01.09 / 오정선 기자

    [신년 인터뷰] 최경래 장로회장
  •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섬기겠습니다” 2026년을 맞이하는 장로회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2026년 장로회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기도와 섬김’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장로회는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성도들을 섬겨, 교회 안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도록 힘쓰고자 합니다. 섬김의 본을 보이는 장로회가 되어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아보며 교회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살피겠습니다. 교회 부흥과 발전을 위해 올해 장로회가 중점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장로회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목회사역을 적극 지원하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기초 위에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사역이 더욱 힘있게 열매 맺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데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를 통한 성령 충만한 신앙의 기초를 회복하도록 뒷받침하고, 교회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을 세심하게 살피겠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지속적인 부흥을 이루도록 헌신 하고자 합니다. 성도들의 하나 됨을 위해 장로회가 펼쳐갈 사역이나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장로회는 교회 각 기관이 연합하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 회복을 위해 기도로 함께하는 공동체를 세워가고자 합니다. 특별히 소외되거나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을 살피며, 교회 안에 사랑과 회복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 되어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신앙 생활하도록 돕는 것이 장로회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 부흥, 청장년층 활성화, 이웃 섬김 등 교회의 사명과 역할이 중요합니다. 교회 발전을 위한 장로회의 구체적인 방향은 무엇인가요? 다음 세대와 청장년층이 교회의 미래라는 마음으로, 이들이 신앙 안에서 든든히 세워지도록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또한 교회가 지역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장로회가 앞장서겠습니다. 국내 선교뿐 아니라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와 헌신으로 동역하겠습니다. 교회 제직과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은 당부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2026년 새해에도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을 통해 전도에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세워가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장로회도 성도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으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제직과 모든 성도님들이 새해 주님 안에서 더욱 강건해지고, 마음에는 평안이 넘치며, 모든 일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정리=이미나 / 사진=김용두 기자
  • 2026.01.09 / 이미나 기자

    Hello, Israel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 메시아닉 유대인,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새 신자들 이스라엘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를 묻는다. “거기 위험하지 않아요?” 그리고 “거기도 교회가 있어요?” 두 번째 질문이 더 흥미롭다. 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필자는 먼저 이스라엘의 종교 지형을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형은 단순하지 않다. 전체 인구 약 990만명 중 유대인이 73%, 무슬림이 21%, 기독교인이 약 2%다. 숫자만 보면 소수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스라엘 기독교인의 75% 이상은 나사렛과 갈릴리에 뿌리를 둔 아랍 기독교인으로 비잔틴 시대부터 이 땅을 지켜온 공동체들이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사람들이 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이다. 메시아닉 유대인이란 유대인이면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어로는 ‘예슈아를 믿는 자들’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유대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를 기념하고, 히브리어로 예배한다. 다만 그 예배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메시아닉 유대교를 기독교 종파로 판결했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면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역사는 놀랍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이 땅에 살던 유대인 60만명 중 예슈아를 믿는 이는 단 23명이었다. 메시아닉 회중은 하나도 없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미국의 ‘예수 운동’(Jesus Movement)으로 유대인 회심자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첫 번째 성장 동력이 됐다. 2022년 카스파리 센터 연구에 따르면 20년간 세 배 이상 증가했고, 2025년 현재 보수적 추산으로 약 3만명이 이 땅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마냥 낙관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 대비 여전히 1퍼센트에도 한참 못 미치는 소수다. 취업 등에서 차별을 경험하고, ‘귀환법’(Law of Return)에 따른 이민권도 메시아닉 신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경우가 있다. 어려움은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다. 메시아닉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더 깊은 무게를 짊어진다. 학교에서 이들은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서 있다. 유대인 친구들에게는 배신자 취급을 받고, 기독교 세계에서는 완전한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명절이 되면 그 간극이 더 선명해진다. 유월절 세데르 식탁에서 예슈아를 고백하고, 크리스마스 대신 하누카 촛불을 켠다. 그런데 유대인 친구들은 그 세데르를 이단의 식탁이라 하고, 교회 친구들은 하누카를 낯설어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 정체성의 긴장이 메시아닉 2세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신앙의 현실이다. 이들 중 많은 청소년이 그 긴장을 도망치지 않고 끌어안는다. 나는 유대인이면서 예슈아를 믿는다. 이 두 가지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들의 소명이 됐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화가 왔다. 2020년 코로나 봉쇄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최대 케이블 방송사 HOT의 메시아닉 채널 ‘쉘라누’(우리의 것)의 시청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히브리어로 전하는 예수 이야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으로 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과 불확실성이 삶을 두드리는 시간에 오래된 질문이 다시 살아났다. 메시아는 누구인가. 10월 7일 하마스 공격 이후에도 변화는 이어졌다. 전쟁으로 피난 온 세속적 이스라엘 가족들이 메시아닉 공동체 야드 하쉬모나에 머물면서 믿는 유대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게 됐다. 밥을 나누고 아이들을 함께 돌보면서 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 땅에서 10년째 살면서 이 공동체를 곁에서 지켜보는 필자는 한 가지를 확신한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단지 ‘이스라엘에 사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들은 로마서 11장이 말하는 ‘남은 자’이며,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에게 숨이 들어오기 시작한 첫 번째 증거다. 이스라엘 인구의 0.3퍼센트.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숫자가 성경이 약속한 가장 큰 이야기의 서막이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을 떠올릴 때, 성지의 풍경이나 전쟁의 뉴스만이 아니라 이 땅에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고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길 바란다. 그 기도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가장 가까이 닿는 자리일지 모른다. 김요셉 목사
  • 2026.07.24 / 김용두 기자

    종교와 전통의 굴레
  • 이스라엘 사회 안의 유대교, 그 빛과 그림자 이스라엘 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검은 모자에 검은 정장, 양쪽 귀밑으로 길게 늘어뜨린 구레나룻, 두꺼운 경전을 들고 예루살렘 골목을 걷는 남자들. 우리가 흔히 ‘유대인’이라고 상상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이들이 하레디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초정통파 유대교도들로 현대 문명과 거리를 두고 토라와 율법을 삶의 중심에 놓는 공동체다. TV도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제한한다. 남성은 평생 토라 연구에 전념하고 여성은 가정을 지킨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들의 시계는 멈춰 있다. 외부에서 보면 경건해 보이고 때로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건 아니다. 이 나라 안에는 지금 두 개의 균열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하나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또 하나는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마을에서. 이스라엘 대법원은 2024년 하레디 병역 면제가 위헌이라고 최종 판결했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군은 하레디 남성에게 징집 명령을 발송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징집 대상 하레디 남성 약 7만9000명 중 실제로 입대한 인원은 2100명에 그쳤다. 나머지는 거부했다. 예루살렘 도심은 검은 모자와 검은 정장의 시위대로 뒤덮였다. 이들의 구호는 간단했다. “토라 공부가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하레디의 논리는 분명하다. 레위 지파가 다른 지파와 달리 성직만을 수행하며 전쟁에 나가지 않았듯이, 자신들은 토라를 연구함으로써 나라를 영적으로 지킨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군 복무는 국가적 의무가 아니라 신앙적 타협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세속 시민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이란과의 전쟁이 한창인 지금, 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병사의 어머니가 묻는다. 왜 내 아들은 가고, 저 아들은 토라를 읽고 앉아 있는가. 신앙의 언어와 희생의 현실 사이에서 이스라엘 사회는 깊이 갈라지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 초대 총리 벤구리온이 홀로코스트로 거의 전멸한 유대교 학통을 살리기 위해 불과 400명의 토라 연구자에게 병역을 면제해 준 것이 출발이었다. 그런데 그 400명의 후손이 지금은 전체 유대인 인구의 14%, 약 130만명으로 불어났다. 한편, 2025년 한 해 동안 서안지구에서 극단주의 유대인 정착민들의 팔레스타인인을 향한 공격 건수는 전년 대비 27% 증가한 867건에 달했다. 총격, 방화, 폭력을 포함한 중대 사건은 무려 50% 이상 늘었다. 2025년 한 해에만 하루 평균 다섯 건의 공격이 기록됐고, 3만7000여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강제로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 공격들의 중심에는 ‘힐탑 유스’(Hilltop Youth)라는 극단주의 그룹이 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마을을 습격해 집을 불태우고, 올리브 나무를 뽑고, 모스크와 교회에 혐오 낙서를 남겼다. ‘프라이스 태그’(Price Tag), 즉 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보복 테러다. 그러나 2017년부터 2025년 9월까지 1500건의 살해 사건 중 이스라엘 당국이 수사를 개시한 것은 112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단 1건이었다. 종교의 이름 뒤에 법도 멈춰 섰다. 토라를 붙들고 징집을 거부하는 하레디와 하나님의 땅을 지킨다며 팔레스타인 마을을 불태우는 극단 정착민. 두 집단의 언어는 모두 종교다. 그러나 그 종교가 가리키는 방향은 정반대다. 하나는 국가적 책임을 신앙으로 회피하고, 하나는 신앙을 폭력의 도구로 삼는다. 그리고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평범한 이스라엘 시민들은 지쳐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장면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필자는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이 문제 앞에서 눈을 감을 수 없다. 종교는 인간을 자유케 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특권의 언어가 되고, 폭력의 명분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가장 날카로운 말씀을 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 이스라엘의 위기는 밖에서만 오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닥칠 가장 큰 위기는 군사적 위협이 아니라 극단주의 종파 인구의 급증과 세속주의 유대인 국가라는 정체성의 상실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종교가 국가를 삼킬 때 그 국가가 어디로 가는지를 역사는 이미 보여준 바 있다. 한국 교회는 이 장면을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을 향한 기도가 막연한 응원이 아니라 이 내부의 균열을 알고 드리는 중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 안에는 이 어두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요셉 목사
  • 2026.06.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시대를 읽는 교육 하부르타의 진실
  • 질문과 토론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삶의 방식 요즘 한국 교회와 교육계에서 ‘하부르타’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유대인 교육법, 노벨상의 비결, 토론식 논술 교육의 원형으로 소개되면서 학원가와 기독교 교육 현장까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예배하고 공부하는 필자로서 솔직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 소개되는 하부르타는 원래의 하부르타가 아니다. 하부르타는 아람어에서 온 단어다. 어원은 ‘우정’, ‘동료됨’을 뜻하는 아람어 하부르타(ħavruta)이며, 히브리어 ‘하베르’ 즉 ‘친구’와 같은 뿌리를 가진다. 이 단어는 예시바(Yeshiva)와 콜렐(Kollel)이라는 유대교 전통 학문 공동체에서 소수의 학생들이 함께 텍스트를 분석하고 토론하며 논쟁하는 탈무드 학습법을 가리킨다. 단어 자체가 이미 말하고 있다. 하부르타는 ‘공부법’이기 전에 ‘관계’다. 논술 기술이 아니라 함께 앉아 삶과 신앙과 텍스트를 나누는 동반자 관계인 것이다. 탈무드는 이렇게 선언한다. “토라는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획득된다(하부라).”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두 학자는 서로를 날카롭게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타아닛 7a). 두 사람이 텍스트를 앞에 두고 마주 앉는 것, 질문하고 반론하고 다시 질문하는 것, 그 과정에서 혼자서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깊이에 이르는 것. 이것이 하부르타의 본질이다. 그것은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교육은 학교가 아닌 가정에서 시작된다. 안식일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묻는다. “오늘 토라에서 무엇을 배웠니?” 아이가 답하면 아버지는 다시 묻는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것이 하부르타다. 성경과 탈무드의 텍스트를 가운데 두고 부모와 자녀가 마주 앉아 신앙과 도덕과 삶을 이야기하는 것. 지식 전달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법, 하나님 앞에 서는 법을 세대에서 세대로 넘겨주는 것이다. 유대교 전통에서 교육(히누크)은 고대로부터 가정에서 시작되었으며, 종교적 텍스트와 가치와 전통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하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바로 여기서 한국의 하부르타 열풍이 놓치는 것이 있다. 하부르타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베이스를 가지고 있다. 탈무드라는 텍스트,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하나님 앞에 선 공동체라는 세계관이 없으면 하부르타는 껍데기만 남는다. 질문과 토론의 형식을 가져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형식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 누구 앞에서 질문하느냐는 신앙적 토대다. 논술 기술로 수입된 하부르타는 유대인 교육의 결과물만 따라가면서 그 뿌리는 버린 셈이다. 현대 이스라엘 교육은 흥미롭다. 전통 예시바의 하부르타와 첨단 기술 교육이 공존한다. 종교적 유대인들은 오늘도 탈무드 텍스트를 앞에 두고 하베르와 마주 앉지만, 세속적 유대인 가정에서도 식탁의 대화 문화, 질문을 장려하는 분위기, 권위보다 토론을 중시하는 태도는 살아있다. 그것이 수천 년 하부르타 전통이 문화 안에 새겨놓은 흔적이다.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 남은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하부르타의 기술이 아니라 하부르타의 정신이다. 성경을 가운데 두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앉는 것,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교인들이 서로 텍스트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 신앙이 지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대화 속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전수되는 것. 신명기 6장 7절은 오래전에 이미 말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이것이 하부르타다. 유대인의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그의 백성 모두에게 주신 교육의 방식이다. 김요셉 목사
  • 2026.05.29 /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I. 죄론(Hamartiology) - 4
  •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위한 기준 제시
    죄와 율법 죄론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죄와 율법의 관계이다. 죄와 율법의 관계에 분명한 명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죄의 선재성(pre-existence)이다. 죄가 율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율법은 광야시대에 성문화 되었다. 성문화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예를 들면 십계명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이 열 가지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유대 공동체 내에 우상숭배, 살인, 간음, 절도, 위증 등과 같은 죄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것에 대한 죄 의식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죄들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모세의 율법을 통해 문자화 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십계명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출애굽기 20장 22절~23장 33절로 대표 되는 계약법전이 있고, 레위기 17~26장의 성결법전이 있다. 이것을 종합하고 보완한 신명기법전(신 12~26장)이 있다. 이 외에 율법의 행동지침과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장로의 유전과 규례가 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셨던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과 규례이다. 1. 율법의 본질 바울은 율법의 한계와 은혜의 법 사이의 긴장관계를 그의 서신 거의 모든 곳에서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회심 이전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목숨을 다해 신봉해 왔던 율법에 대한 무한 신뢰를 파기하고 율법을 ‘초등학문’(골 2:20)과 ‘초등교사’(갈 3:24)로 평가절하시킨다. 바울은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convenantal nomism)를 포기하고 은혜의 법에 기초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과 윤리, 도덕적 가치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이 버려도 되는 것 혹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본질 때문이다. 율법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다. 율법의 제사법은 인간의 범죄와 정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죄를 가지고 그 앞에 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성결법전의 내용과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의 옹호자는 아니다. 그러나 파괴주의자도 아니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a)라는 말로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항변하고 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율법의 한계성 바울의 율법에 대한 의도는 율법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 그 자체만으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거나 의롭게 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당위성(롬 1:17)과 율법의 한계성을 역설하고 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는 기능은 있으나 죄를 사하는 권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율법)을 대조시키고 있다(롬 8:2). 히브리서 또한 율법의 불완전성과 대제사장의 유한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3. 율법의 목적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분별한 반율법주의(antinomism)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반율법주의를 넘어 극단적 율법파괴주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목적과 효용가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인간들이 그것을 다 준수할 것이라고 기대하셨을까? 물론 아니다.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율법이 없다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2) 율법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목적이 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유용한 가치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8.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3 
  • 성경은 죄와 인간의 필연적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아무도 죄를 피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 죄의 삯(wage, 급여, 보수)은 사망이라고 단언하고 있다(롬 6:23). 인간의 수고와 이마의 땀으로 얻게 되는 급여는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선고이다. 한글성경에서는 복수와 단수를 구별하지 않고 ‘삯’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본에서는 복수형을 써서 ‘옵소니아’, 즉 ‘급여들’, ‘보수들’이라고 복수형을 쓰고 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죄의 종류와 가지 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부과될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4) 죄에 대한 형벌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죄에 대한 형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이해했다. 그는 인간의 창조를 세 단계로 이해했다. 첫째, 인간은 땅의 먼지(KJV, dust)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 먼지로 지음을 받은 육체에 네페쉬(혼, 생명)를 가지게 되었으며, 셋째,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이 분리되는 죽음 맞게 되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죽음,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을 낳게 된다. (1) 영적인 죽음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를 허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인해 죄를 품은 인간은 그의 임재 가운데 공존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이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영혼은 생명력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적인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상태가 되었다(창 6:5). 이것이 죄의 형벌로서의 영적인 죽음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죄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다(롬 3:20; 7:7). 이런 영적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2) 삶의 고통 타락 이후 고통은 인간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인간의 삶은 쉽게 무너지고 각종 질병의 포로가 되었으며 불안과 고통을 늘 겪게 되었다. 풍족했던 에덴동산의 삶은 사라졌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더해 졌으며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창 3:16, 19). 창조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복은(창 1:28) 인간의 타락 이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뜻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인간의 삶 곳곳에 돋아나는 것이었다(창 3:18). (3) 육체적인 죽음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최초 인간 아담이 죽음을 전제로 한 유한한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죽음을 전제로 창조하셨다는 근거는 창조역사 속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주후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첫 사람 아담이 죽을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아담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상관없이 아담이 죽은 것은 죄의 삯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육체적인 죽음, 즉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언급되었다(창 3:19). 육체적인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함께 불순종한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인 것이다. 이 육체적인 죽음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영원한 죽음 유물론자들은 죽음을 존재의 소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유물론적 사관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은 삶의 종결, 혹은 죽음의 완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은 벗어 날 수 없는 고통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말한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 지옥편에 보면 지옥문에 쓰여 있는 글귀가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마치 이 표현처럼, 영원한 죽음은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즉 죽음의 소망조차 품을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1:26). 이 말씀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이며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죄는 형벌을 동반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형벌은 영생의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7.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2
  • 현대의 논쟁
    타락한 이후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순자(荀子)가 주장한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는 성악설(性惡說)과 맹자(孟子)가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性善說)이 팽배하게 대립하고 있다. 성경은 이 두 학설 중 성선설에 가깝다. 전도서 7장 29절은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힛솨본’인데 영어 성경(NKJV)은 ‘계략, 음모’(scheme)로 번역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이후 수많은 악한 꾀를 내는 존재가 됐다는 의미이다. 죄론에 대한 현대적 논쟁은 죄의 본질과 인식, 죄의 본편성과 전가성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론에 대한 논쟁과 죄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죄의 본질 죄는 단지 인간이 행하는 그 무엇일 뿐만 아니라 죄가 인간 안에서 행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죄는 단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너머로 오기도 한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근원적 죄는 인간 내면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탄이라는 외부적 유혹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서 죄에 빠졌다. 죄에 대한 웨스트민스터의 대요리문답은 ‘죄란 하나님께서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삶의 기준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치의 결여 또는 위반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 죄의 인식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실존적 일치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떨어진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목표점으로 지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 살며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자신도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이 죄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죄를 인식 할 수 있을까? 선은 악이 있을 때 선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악은 선이 있을 때 악을 인식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인이 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죄를 인간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생각했다. 이 감옥은 안에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밖에서만 열 수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만 그 열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없다면 죄를 인식할 수도 없고 죄에서 나올 수도 없다는 말이다. 3) 죄성(the nature of sin)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기회가 주어지면 죄를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죄의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것은 환경과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신약성경은 죄(Sin)와 죄들(sins)을 구별 짓고 있는데, 보통 전자는 죄의 본성을 말하고 후자는 죄성의 결과 및 표현들을 의미한다. 죄의 속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나 죄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죄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기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1) 죄의 보편성 성경은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선언한다(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롬 3:10~12; 롬 3:23; 요일 1:8).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욕구라고 할 수도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예외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피조 세계의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롬 5:19). (2) 죄의 전가성(the imputation of sin) 구약시대의 제사를 보면 죄인은 제사장에게 번제물을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번제물에게 전가하기 위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했다(레 1:4). 이 행위를 통해 죄인의 죄가 희생 제물에게 전가 되었다. 번제물은 죄인의 죄를 위해 희생되었고 죄인은 죄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죄는 이런 전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죄의 전가성은 제물에게로 국한된다는 점이다. 나이든 부모가 자식의 죄를 대신해서 처벌을 받겠다고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듯이 성경에서 죄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전가되지 않으며 오직 제물에게만 전가된다. 죄의 전가에 대한 제한적 적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오직 희생제물에게만 적용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5.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하나님께서 관리하시는 미생물
  • <사진: 흑국균(흑색곰팡이)과 페니실린 곰팡이, 금화균(관돌산낭균) 배양 사진> 하나님의 창조세계 중에 눈에 보이는 생명체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가 더 크고 다양하다(롬 1:20). 이들을 한정된 배양공간에 두면 영양분과 서식지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만의 고유한 전략을 갖는다. 같은 조건이라면 이들은 가능한 빠르게 성장하고 증식을 통해 자원을 선점하려는 ‘속도 경쟁’을 한다. 나아가 이웃에 존재하는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항진균물질이나 항생물질을 만들어 체외로 분비하고 특정 미생물이 성장하지 못하게 자신만의 화학 무기까지 동원한다. 이렇게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려는 모습을 보면 강력한 힘을 가진 특정한 미생물이 승리한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배양하는 유익한 반려진균(伴侶眞菌) 중에 세 종류를 예로 들면 흑국균(검은누룩곰팡이)과 페니실린 곰팡이(푸른곰팡이) 그리고 발효흑차에서 발견된 금화균(관돌산낭균)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관찰하면 가장 먼저 검정색 흑국균이 자신의 지경을 빠르게 넓혀간다. 이에 질세라 대응하는 푸른색의 페니실린 곰팡이가 강력한 항생물질을 분비하며 상대의 접근을 막는다. 두 강자가 전선을 형성하며 팽팽한 화학전쟁을 벌이는 사이에 ‘황금빛 꽃’을 피우는 금화균은 앞에 두 종류의 강력한 힘에 밀려 열세임에도 자신만의 독특한 생존력을 발휘한다. <사진: 흑국균(검정색)과 금화균(황금빛)이 경계를 이루면 전선을 형성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뻗어 나가는 흑국균> 자신이 만든 안전한 보호막인 폐쇄적 포자낭이라는 튼튼한 주머니를 만들어 차세대를 위한 유전자인 많은 포자를 담는다. 만일 이들을 그대로 같은 조건으로 방치한다면 결국은 흑국균이 승리하고 배양공간을 가득 채운다. <사진: 금화균(관돌산낭균) 포자낭 주머니 안에 보호받는 수많은 포자(spores)>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성장 환경을 바꾸어 수많은 종류의 미생물 중에 특정 종류만 살아남지 않도록 기후나 날씨 등 자연환경을 바꾸거나 변화시켜 공존의 균형을 이루어내신다. 현미경적 크기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보여주는 자신만의 생존과 전략은 최종적으로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관리자가 되심을 깨닫게 한다(시 104:24). <사진: 페니실린 곰팡이와 황금빛 금화균의 경계면으로 전선이 형성되고 전투 현장>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6.07.21 / 이미나 기자

    구유와 나귀에 담긴 예수님의 겸손
  • 나귀는 고대부터 전쟁이나 경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큰 말보다는 작지만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장시간 지치지 않고 험한 길을 이동하는 운송에서 주요한 동물이다. 때로는 거친 말보다는 순한 성질이라서 사람들에게 위협적이지 않고 친근하다. 장점으로 거친 먹이라도 가리지 않고 잘 먹으며 각종 질병에도 강할뿐더러 지구력이 좋아서 농경문화에서 때로는 소 대신에 나귀가 역할을 했다. 한편,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귀는 세상의 권력과 군사력을 상징하는 군마(軍馬)와 대조를 이루며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알리는 겸손의 표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던 때에 탐욕에 눈이 먼 발람 선지자를 책망하며 영적 무지를 깨우쳤던 나귀는 인간의 무지와 오만함을 질책하는 존재였다.(민 22:26~34) 이러한 구약의 상징적 흐름은 신약에 이르러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代贖)의 여정 속에서 구속사의 주요한 표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시작과 끝에서 지극히 낮고 소외된 자리와 맞닿아 있었으며 겸손과 섬김의 삶을 몸소 보여주셨다. 성육신하신 탄생의 순간에도 방을 얻지 못하고 태어나신 예수님은 가축이 사는 마구간에서 짐승의 밥통인 구유를 첫 보좌로 삼으셨다.(눅 2:7) 이는 장차 자신을 인류의 영적인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낮아짐과 동시에 거룩한 예표였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을 위해 높은 보좌와 화려한 침상을 바라지만 평화의 왕은 가축의 구유를 첫 자리로 택하셨다.(눅 2:12) 이 낮아짐의 영성은 공생애의 절정인 예루살렘 입성으로 다시 한번 증거가 된다. 예수님은 정복자의 웅장한 군마(Equus) 대신에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한 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Pony) 새끼에 몸을 싣고 군중 앞에 나타나셨다.(스 9:9) 나귀는 전쟁이 아닌 평화와 섬김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예수님은 군사적 힘으로 세상을 억압하는 왕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화평을 이루실 평화의 왕임을 나귀를 타심으로써 친히 선포하셨다. 결국 베들레헴 마구간의 구유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성육신의 시작이라면 예루살렘 길 위의 나귀는 십자가의 길을 완성하는 순종의 영광이었다.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했으나 미물의 구유는 그 분을 품었고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씀 한마디에 매여 있던 나귀는 풀려나 만왕의 왕께 쓰임 받았다(막 11:3). 이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도 주님의 손에 붙들릴 때 위대한 구속사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증거한다. 구유와 나귀는 오늘날 화려함과 권력을 좇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참된 겸손과 평화의 복음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이학박사)
  • 2026.06.26 / 이미나 기자

    두 번째 꿀을 생산하는 벚나무
  • 대부분 꿀은 개화된 꽃에서 얻지만 다른 부위에서도 꿀을 만든다. 예를 들어 벚나무는 두 번이나 꿀을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밀원(蜜源)이다. 첫 번째는 4월 중순에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벚꽃 군무에서 얻어지는 다량의 꿀, 즉 은은한 향과 단맛을 내는 ‘벚꽃꿀’이다. 벚꽃꿀은 일반 꿀과 다르게 포도당이 농축되면 어두운 주황빛 결정체로 굳어지는 특성이 있다. 이때는 꿀병을 뒤집어도 쏟아지지 않으며 숟가락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는다. 두 번째 꿀은 벚꽃이 진 후, 새순이 나고 잎이 자라면서 잎에 있는 꿀샘에서 볼 수 있다. 꿀벌은 초여름에 자란 잎에서 두 번째 꿀을 얻을 기회를 맞이한다. 벚나무 잎사귀를 자세히 관찰하면 잎자루 윗부분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두 개의 노란색 돌기를 볼 수 있다. (첫번째 사진) 이곳은 벚나무의 또 다른 밀선(蜜腺)으로 ‘꽃 밖에 위치한다’하여 ‘화외꿀샘(Extrafloral nectary)’이라 부른다. 잎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이와 같은 밀선을 가진 나무는 벚나무 외에도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등이 있다. 이들 식물은 잎자루 위의 꿀샘과 잎, 줄기 등에서 미세한 이슬방울처럼 진액을 분비한다. 여름철 승용차를 벚나무 그늘에 오랫동안 주차했을 때 나뭇잎에서 떨어진 미세한 수액 때문에 차량의 표면이 끈적거렸던 경험을 한 운전자가 많다. 잎의 밀선은 열매를 맺는 꽃의 밀선과 다른 역할을 한다.(사진) 이는 식물들의 영리한 생존 전략이다. 보통 꽃에 있는 꿀은 벌과 나비를 유인해서 수분(受粉)을 위해 분비하지만 잎사귀에 있는 밀선은 주로 방어 작용을 위해 존재한다. 잎사귀에서 달콤한 진액을 분비하면 이를 좋아하는 개미들이 모여든다. 개미들은 꿀을 얻는 대신에 벚나무 잎을 갉아 먹는 해충인 각종 나방이나 곤충의 애벌레 같은 천적을 퇴치하거나 공격한다. 나무를 보호하는 일종의 ‘보디가드(Bodyguard)’ 역할을 하는 셈이다. 벚나무는 한자리에서 자라 이동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곤충을 유인하여 영리한 상리공생(Mutualism)을 이어가는 대표적인 식물이다. 이 밀선에서 분비되는 끈적한 수액은 진딧물 등의 곤충이 내보내는 감로(甘露)와 유사하다 하여 ‘제2의 꿀’로도 불린다. 꽃꿀과 마찬가지로 자당, 과당, 포도당 등이 주요성분이지만 여기에 벚나무 고유의 향과 아미노산, 미네랄이 더해져 있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숲에 사는 다양한 곤충들에게도 훌륭한 에너지원이 된다.(레 20:24) 수액 분비는 주로 잎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나 왕성하게 자라는 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가장 활발하다. 이때가 해충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벚나무도 이에 맞춰 방어 물질로서 진액을 집중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면 잎이 노쇠해지면서 꿀샘의 기능도 점차 떨어지고, 돌기만 흔적으로 남게 된다.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6.06.17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쇼팽의 녹턴에서 힙합의 고백까지
  • 율법의 두려움을 넘어 세상을 품는 넓은 신앙으로 “방학에 넷플릭스를 보고 가요를 듣는 제 모습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않은 걸까요?” 성경을 읽고 반주 봉사를 하면서도 세상 문화 앞에서 멈칫거리는 지혜 자매의 고민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요즘 핫한 드라마나 음악을 즐기면서도 “믿는 사람인데 괜찮나?”라는 찝찝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친 여름날, 이는 우리 모두가 영혼 한구석에 품고 있는 진솔한 질문이다. 폭염 속 ‘무기력’이라는 몸의 고백 유난히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거실에 누워 영화나 음악에 몰입하다 보면 “나만 나태해진 것은 아닐까?”자책하곤 한다. 그러나 혹독한 기후 앞에서 느끼는 피로감은 불신앙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섭리다. 성경 속 갈멜산에서 불을 내렸던 대선지자 엘리야 역시 극심한 영적·육체적 고갈 속에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 깊은 무기력에 빠졌다. 이때 하나님은 그의 영적 상태를 질책하지 않으셨다. 대신 천사를 통해 떡과 물을 주시고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허락하셨다(왕상 19:5~6).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하나님이 피로에 지친 사역자에게 사역을 독촉하기보다 몸의 회복을 먼저 선사하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무더위 속 무기력함은 자신을 자책할 이유가 아니며 영혼을 잠시 숨 고르게 하시는 거룩한 ‘쉼표’의 시간이다. 결국 핵심은 ‘마음의 동기’와 주체 “세상 음악에는 창작자의 사상이 담겨 있어 멀리해야 한다”는 배움과, 힘들던 시절 대중가요에서 느꼈던 온기 사이의 충돌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정직한 고민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도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영적 상태’와 ‘마음의 동기’다. 똑같은 칼을 쥐어주었을 때 한 사람은 복수하기 위해 날을 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손님을 대접할 회를 써는 도구로 연마한다. 도구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누구의 손에 들려 어떤 동기로 쓰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 래퍼 비와이(BewhY)처럼 거친 힙합을 도구 삼아도, 구원받은 사람의 입술을 통과할 때 그 가사는 당당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된다.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Karl Barth)가 매일 아침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창조 세계의 선함을 누렸듯, 구원받은 성도가 감사와 사랑으로 문화를 접할 때 그 문화는 지친 삶을 보듬는 따뜻한 도구가 된다. 중요한 것은 도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내 마음의 동기가 어디를 향하느냐다. 세상을 품는 ‘일반은총’의 시선 성경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는 다 야훼의 것이로다”(시 24:1)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구원의 ‘특별은총’ 외에도, 온 인류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듯 문화와 예술을 즐기고 발전시킬 ‘일반은총’(General Grace)을 허락하셨다.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중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시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없다”며 문화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했다. 예수님 역시 거룩함을 이유로 세상과 담을 쌓지 않으셨다. 저잣거리 잔치에 참석해 포도주를 만드셨고, 농부의 씨 뿌리기나 잃어버린 드라크마처럼 친숙한 일상의 언어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다. 따라서 파괴적이거나 음란한 문화는 분별하여 멀리하되, 인간의 보편적 애환을 담은 건전한 대중문화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함이다. 마음을 살피는 지혜와 세상을 보듬는 품 우리는 이 뜨거운 여름날의 여백을 어떤 마음으로 채워가야 할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라고 말한다. 음악이나 영상을 즐길 때 마음에 평안과 온기가 도는 느낌이 든다면 선물로 감사히 누리면 된다. 반대로 불필요한 욕심이나 어두운 마음을 일으키는 콘텐 츠라면 조금 거리를 두는 지혜면 충분하다. 특히 이웃을 사랑해야 할 신앙인들에게 세상 문화는 이웃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따뜻한 대문이 된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문화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질문이자 울음소리라고 말했다. 세상 이웃들이 어떤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위로받는지 이해하려 할 때 비로소 그들의 아픔에 다가갈 수 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 때, 우리는 외롭고 지친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다정한 성도로 살아갈 수 있다. Think! ---------------------- 내 손에 쥐어진 문화라는 도구를 어떤 마음의 동기로 사용하고 있는가. Thank! --------------------- 구원받은 은혜 안에서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선하게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자유와 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6.08.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하늘의 계산법! 장미와 가시 
  • 삶의 습기를 걷어내는 사유의 힘 약속의 무지개를 바라보는 신앙 7월 장마가 시작됐다. 매년 찾아오는 계절이기에 예상은 했지만 결코 반갑지는 않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다. 삶이 늘 장밋빛일 수만은 없다.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이 비켜 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는 견딜 수 있어도 지루하게 이어지는 긴 장마 앞에는 장사가 없다. 인생길에도 원치 않는 고난의 장대비와 마음을 찌르는 가시가 불쑥 찾아와 신앙의 걸음을 무겁게 만들곤 한다. 메마른 영혼을 깨우는 인지적 갈등 교육학에는 ‘인지적 갈등’(Cognitive Conflict)이라는 보편적인 학술 개념이 있다. 인간은 편안하고 익숙한 인지 상태가 흔들리고 결핍을 느낄 때, 비로소 뇌가 자극을 받아 새로운 발달과 성장을 이뤄낸다는 이론이다. 안락함에 안주하려는 성향을 깨뜨리기 위해 외부의 강한 충격과 흔들림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삶에 장마 같은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조금 먹고살 만해지면 우리는 안락함 속에 안주하려 든다.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져 단단하게 굳어버린 마음의 밭을 깨우기 위해,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거룩한 ‘인지적 갈등’을 던지시는 것이다. 뙤약볕 아래 방치되어 메말라가던 영혼은 고난의 세찬 빗줄기를 맞고서야 비로소 자신을 낮추며 영적 갈증을 깨닫는다. 그리고 시편 104편의 노래처럼, 주님이 베푸시는 결실을 통해 내면의 갈급함을 채우는 은혜를 입는다. 평탄한 일상에서는 결코 피워내지 못했을 깊은 성숙의 열매가 시련을 통과하며 맺히기 시작한다. 나를 보호하는 불편한 울타리 넷플릭스 드라마 <김부장> 속 주인공은 소중한 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몸이 부서져라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몸에 새겨진 숱한 흉터들은 단순한 고통의 흔적이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해 낸 치열한 헌신의 흔적이자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받아내 준 삶의 ‘방어선’과 같다. 신학에서는 이를 고난이 가진 ‘보존적 은혜’ 측면으로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평생의 육체의 가시처럼,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거두어주지 않으시는 삶의 아픔과 찔림이 존재한다. 우리도 인생의 짓눌림 속에서 ‘왜 하필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차라리 그냥 모른 척하셨으면 좋겠다’는 서글픈 마음이 불쑥 들기도 한다. 당장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고 통증만 가득한 영역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덫이 아니라,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꼭 붙드는 영적인 안전장치다. 가시의 통증 덕분에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절감한다. 나를 아프게만 했던 가시가 오히려 나를 보존하시려는 최고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폭우 속에서 확인되는 회복탄력성 여름철 세차게 쏟아지는 장맛비는 대지의 약한 흙을 쓸어가고 결국 가장 단단한 바닥과 깊은 뿌리만을 남겨 땅을 더 견고하게 다져놓는다. 심리학과 교육학에서 강조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 역시 평온할 때가 아니라 역경과 강한 스트레스의 터널을 통과할 때 비로소 길러지고 그 진짜 가치가 확인된다. 우리 신앙의 진짜 뼈대 역시 평온하고 맑은 날이 아니라 인생의 폭우가 쏟아지는 장마철에 비로소 증명된다. 환경이 좋을 때는 누구나 좋은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거센 풍랑 속에서 진짜 믿음의 깊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장의 말씀처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 부딪치되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진 신앙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먹구름 너머에 이미 시작된 약속 기독교 신학의 위대한 핵심은 역사와 인간의 모든 서사를 궁극적 승리로 이끄시는 ‘종말론적 관점’(Eschatological Perspective)에 있다. 장마가 아무리 길고 영원할 것 같아도 먹구름 뒤에는 언제나 찬란한 태양이 숨어 있으며 때가 되면 하늘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인 무지개가 반드시 떠오른다. 우리가 지금 눈물로 겪고 있는 7월의 폭우는 인생 절망의 서막이 결코 아니다. 머지않아 펼쳐질 하나님의 위대한 회복과 반전의 드라마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은혜의 배경일 뿐이다. 이미 구름 너머에 완벽하게 예비 된 승리의 결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절망의 빗소리 속에서도 다가올 찬란한 계절을 기대하며 고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선제적 감사’를 드리자.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에서 대지를 살리시려는 하늘의 깊은 뜻을 가만히 묵상할 때 비로소 원망은 거룩한 사유로 이어진다. Think! ----------------------- 원망의 장마에 갇힐 것인가, 영혼을 깨우는 거룩한 초청에 응할 것인가. Thank! ----------------------- 인생의 폭우 속에서 내 믿음을 반석 위에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6.07.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혼의 숨구멍 ‘제3의 공간’
  • 일상과 거룩한 가면을 벗고, 하이터치 영성 회복하기 기도원부터 바다까지… 야훼와 독대하는 거룩한 피난처 하루 종일 시달리다 돌아온 집은 산더미 같은 집안일과 부대끼는 식구들에 짓눌려 온전한 휴식처가 되지 못할 때가 많다. 오죽하면 쉴 곳 잃은 현대인들이 자조적으로 ‘집구석’이라 부르겠는가. 영혼의 피난처가 되어야 할 교회마저 때로는 직분과 체면 때문에 ‘믿음 좋은 척’ 거룩한 가면을 쓰고 연기해야 하는 숨 막히는 공간이 되곤 한다. 6, 7월이면 수많은 기독교인이 기도원으로 향한다. 일상의 짐과 껍데기만 남은 종교적 형식을 훌훌 벗어던지고,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영적인‘제3의 공간(Third Place)’이 미치도록 절실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잣대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위로받고 영혼의 숨을 고를 수 있는 거룩한 피난처를 찾아야 할 때다. 1. 4070, 안전지대가 필요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는 가정과 일터 외에 목적 없이 머물며 사람들과 교류하고 쉴 수 있는 비공식적인 장소를 ‘제3의 공간’이라 불렀다. 평생교육의 관점에서도 성인들이 팍팍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고 내면을 치유하는 곳은 딱딱한 교실이 아니라 바로 이런 편안한 공간이다. 특히 가족 뒷바라지와 무거운 책임감에 소진된40~70대 우리 세대에게 집은 종종 또 다른 출근지가 된다. 부모, 아내, 남편이라는 역할의 껍데기도 모자라 교회에서조차 거룩한 척 연기하느라, 존재 자체로 편히 숨 쉴 수 있는 안전지대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2. 심야식당이 주는 위로 영화<심야식당>에 등장하는 밤12시의 허름한 식당은 철저한 ‘제3의 공간’이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마음의 소리에 묵묵히 귀 기울여 주는 곳. 지친 하루를 끝낸 사람들은 이곳에 들러 남몰래 흘린 눈물과 징글징글한 세월의 무게를 따뜻한 밥 한 끼의 온기로 위로받는다. 고도화된 하이테크(High-Tech) 세상일수록 사람들은 이처럼 사람 냄새나는 하이터치(High-Touch) 공간에 목말라한다. 세상 사람들은 심야식당이나 동호회를 찾아 헤맨다는데, 뻔한 정답과 형식에 지쳐 영혼이 찢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참된 위로를 얻어야 하는가. 3. 영적‘제3의 공간’, 예수님의 빈 들 예수님은 공생애의 치열한 사역과 제자들과 부대끼는 일상 속에서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빈 들)’을 찾으셨다. 메시야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온전히 성부 하나님 품에 안겨 숨을 쉬는 날것 그대로의 안식 자리였다. 구약의 모세 역시 백성들의 불평과 소음이 닿지 않는 진영 밖 ‘회막’에서 창조주와 독대했다(출 33:7). 세상의 스위치를 끄고, 남의 시선을 의식한 얄팍한 연기를 멈춘 채 오직 야훼 하나님께만 주파수를 맞추는 은밀한 회막, 영적인 빈 들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4. 영혼의 닻을 내리는 피난처 사수하기 영적인 제3의 공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식을 벗고 아픔을 나누는 소그룹, 깊은 산속 기도원뿐만 아니라 하루 일과를 마친 주차장 차 안에서의 10분, 전철 안 짧은 기도 시간도 훌륭한 회막이 될 수 있다. 여름에는 탁 트인 바다로 달려가 목청껏 외칠 작정이다. 가슴속을 갉아먹던 미움과 원망, 어깨를 짓누르던 지독한 스트레스 그리고 거룩한 척하느라 얹힌 영적인 체증까지 거친 파도에 다 토해내 버릴 것이다. 체면 따위 던져버리고 날것 그대로의 찌꺼기를 쏟아내는 그 바다가 바로 야훼와 독대하는 제3의 공간이 된다. 먼저 참된 쉼을 누리고 회복되어야 지긋지긋한 ‘집구석’도 메마른 교회도 다시금 따뜻한 생명력을 얻는다. 세상의 짐과 종교적 허울을 훌훌 벗어던지고 야훼 하나님의 은혜에 영혼의 닻을 내리는 거룩한 피난처를 반드시 사수하자. Think! 오늘 하루, 숨 막히는 일상에 지쳐 야훼와 독대할 영혼의 ‘빈 들’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Thank!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찾아갈 때마다, 아무것도 묻고 따지지 않고 완벽한 피난처이자 제3의 공간이 되어 주시는 야훼 하나님, 감사합니다!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6.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밥 버포드 『하프타임』
  • 전반전의 ‘성공’을 후반전의 ‘의미’로 삶의 궤도를 숨 가쁘게 달려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것이 내 삶의 전부인가?’라는 실존적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특히 어느 정도 사회적 성취를 이룬 중년에 접어들면,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공허함이 찾아오곤 한다. 밥 버포드(Bob Buford)의 저서 『하프타임(Halftime)』은 바로 이 치열한 인생의 변곡점에 선 이들에게 삶의 지향점을 ‘성공’에서 ‘의미’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는 탁월한 영적 지침서다. 성취 그 자체가 폄하될 수는 없으나, 성공이 삶의 맹목적인 우상으로 자리 잡을 때 영적 위기는 시작된다. 저자는 인생의 전반전이 저물어갈 즈음, 세속적 성공만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 갈증이 필연적으로 찾아옴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렇기에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놓인 ‘하프타임’은 단순한 휴식이나 여락(餘樂)의 시간이 아니다. 이는 삶의 항로를 재조정하고 내면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는 거룩한 탐색기다. 자신의 영적 DNA와 고유한 기질을 객관적으로 진단하며, 창조 본연의 목적을 깨닫는 치열한 자기 대면의 시간인 셈이다. 에베소서 2장 10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 버포드는 기존의 전문성을 유지하되 시간과 재정의 흐름을 조율하여 의미 있는 사역에 투자하는 ‘병행 경력(Parallel Careers)’이라는 현실적이고도 지혜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씨 뿌리는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가 말하듯,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지식은 결국 풍성한 결실을 맺어야 할 영적 자본이다. 따라서 인생의 후반전은 더 이상 세상의 지표로 자신을 증명하는 소모적인 시간이 아니다. 축적된 모든 것을 이타적으로 흘려보내며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거듭나기 위한 위대한 모험의 무대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은퇴는 결코 생산성의 종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속의 잣대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진 이 시기야말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헌신할 수 있는 인생 최고의 르네상스다. 이 책은 ‘자기만족적 성공’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영원히 기억될 사명’이라는 광활한 영적 영토로 우리를 안내하는 정교한 나침반이 되어준다. 폭염을 피해 시원한 계곡, 한 손에는 달콤한 수박을, 다른 한 손에는 『하프타임』을 쥐어보는 것은 어떨까. 지친 일상에 쉼표를 찍고 영혼의 갈증까지 온전히 해갈하는 실로 지적이고도 멋진 여름의 피서법이 될 것이다.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 2026.08.06 / 이미나 기자

    폴 히버트의 『선교와 문화인류학』
  • 여름 단기선교! 이 책은 꼭 읽고 가자. 밭작물을 잘 생육시키기 위해서는 추비(웃거름)가 필요한데, 물에 잘 녹는 비료를 주어야 한다. 선교도 그렇다. 낯선 문화권에서 어떻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 폴 히버트의 『선교와 문화인류학』은 인류학적 통찰을 통해 그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선교가 단순한 열정이나 신학적 지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타문화와 접촉시 관계와 의사소통을 위한 인류학적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통찰 중 하나는 복음과 인간 문화의 명확한 구분이다. 복음은 어느 특정 문화에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그것이 전달되고 이해될 때는 반드시 인간의 문화적 형태 안에서 성육신되어야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격언처럼 말이다. 저자는 문화를 인식적, 감성적, 평가적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하며, 선교사가 이러한 문화의 심층에 자리 잡은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심각한 오해와 의사소통의 단절을 겪게 된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처럼, 배우는 자의 자세로 현지인들과 동일화되어 신뢰를 쌓는 ‘성육신적 선교사’의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마치 물과 기름 양쪽을 다 아우를수 있는 계면활성제의 성능을 요구한다. 또한, 이 책은 선교지에서 마주하는 전통 관습과 문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비판적 상황화(Critical Contextualization)’를 제시한다. 자신의 문화만을 우월하게 여기며 현지의 옛것을 무조건 거부하는 ‘자문화 중심주의’나, 반대로 모든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문화 상대주의’의 한계를 모두 지적한다. 현지 성도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전통 관습을 성경적 기준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성경적인 교훈에 맞게 새로운 기독교적 방식을 창출해 내도록 이끄는 것이 건강한 상황화임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자립을 넘어선 ‘자기 신학화(Self-theologizing)’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현지 교회가 단순히 선교사가 전해준 신학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자신들의 문화적 상황에 맞는 신학을 발전시킬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진정한 자율성을 가지고 현지 문화 속에서 생동감 있게 자라나도록 돕는 성숙한 선교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 책은 단순히 해외로 나가는 선교사들만을 위한 실무 지침서가 아니다. 복음의 절대적 진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다가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적, 지적 도전을 주는 훌륭한 안내서이다.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 2026.07.09 / 이미나 기자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
  • 신앙과 세상 사이, 길 잃은 나를 위한 나침반 또 한권의 읽기 힘든 고전을 소개한다.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그리스도와 문화』는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주요 저술 중 하나로 꼽히며, 반세기가 넘도록 전 세계 신앙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전이다. 이 책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와 그 주변 환경인 ‘문화’ 사이의 관계, 즉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제기되는 신앙과 세상의 딜레마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니버의 탁월함은 이 복잡한 역사적, 신학적 문제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명쾌하게 분류한 데 있다. 단순한 과거 역사의 총괄적 정리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을 규정하는 실천적이고 정신적인 도구가 되는 유익함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은 세상을 배척하고 세속 문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으로, 테르툴리아누스와 톨스토이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이와 정반대의 대안으로서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이 제시되는데, 이는 아벨라르(Abelard)처럼 복음의 가치를 당대의 문화적 이성이나 자연법에 맞추어 조화시키려는 적응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양자를 조율하려는 세 가지 중간적 형태들도 존재한다. 우선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는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종합론적 입장으로, 자연적인 문화의 토대 위에 초자연적인 신의 은혜가 더해져 조화를 이룬다고 본다. 반면, 마르틴 루터는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를 주장하며, 타락한 세상과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왕복하는 역설적 삶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어거스틴과 칼뱅이 취했던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는 인간의 문화가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아래에서 재창조되고 갱신될 수 있다고 믿는 전환론적 비전을 제시한다. 니버는 이 다섯 가지 중 어느 하나만이 가치의 척도이거나 절대적인 정답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과 운동의 개별성을 존중하게 하고, 각 입장의 긍정적 기여와 한계를 동시에 통찰하게 해주는 거울 역할을 할 뿐이다. 이를 통해 성도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 도덕의 어떤 특징을 타협하거나 배격하고 있는지 성찰하며, 주체적이고 책임 있는 결단을 내리도록 도전한다. 이 책은 복음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면서도, 현실 사회 속에서 세상을 향한 책임을 다하려는 이들에게 분명하고 균형 잡힌 성경적 지혜를 제공하는 나침반이다. 헨리 소로우는 “참다운 정신으로 참다운 책을 읽는 것은 고귀한 수련”이라고 말했다. 느리고 진지한 독서에 도전하고 싶다면 이 고전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 2026.06.12 / 이미나 기자

    고민 Tick, 상담 Talk
    은둔형 외톨이 자녀를 돕는 방법
  • 하나님은 궁극적인 안전기지 애착 경험 신앙 발달에도 영향 끼쳐 공동체의 환대와 돌봄이 회복의 시작 고민 Tick : 은둔형 외톨이 자녀를 어떻게 교회 공동체로 다시 나오게 할 수 있을까요? 상담 Talk : 필자가 사역하는 교회 공동체에서 만난 한 청년이 있다. 그는 학교 폭력을 경험했고 세상을 위험한 곳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방 안에만 머무는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상담심리학 교수로서 청년부 사역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청년은 방을 나서서 혼자 전철을 타고 교회 청년부 예배에 참석했다. 성경 이야기식 설교를 전하는 필자와 따뜻한 셀 리더 형, 누나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주는 청년 공동체 안에서 환대와 지속적인 돌봄을 경험하면서 청년은 조금씩 사람들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전공생들과 함께 공연 무대에 서기까지 놀라운 변화와 건강한 사회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동갑 친구들에게 교회공동체 참여를 격려하는 신앙 모범생으로 성장했다. 또한 부모가 신앙인이 아닌 가정에서 성장한 청년들은 교회 안에서 신앙의 선배와 건강한 인생 멘토들을 만나 건강한 부모상을 경험하게 됐다. 그 결과 자신감을 회복하고 학업과 진로, 취업 등 여러 영역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교회가 단순한 신앙공동체만이 아니라 삶의 어려움으로부터 피하여 쉴 수 있는 안전기지(Secure Base)로 기능할 때, 불안정애착인 사람들도 새로운 애착경험을 통해 안정재애착으로 회복됨을 증명한다. 존 볼비(John Bowlby)의 애착이론은 인간의 심리발달과 대인관계, 그리고 신앙 형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그의 주장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인간에게 있어 친밀한 정서적 유대는 생물학적 기능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정서적 유대는 애착 대상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며, 중추신경계 안에서 내적 작동 모델(Internal Working Model)을 발달시키는 기초가 된다. 둘째, 부모 특히 어머니의 양육 태도는 자녀의 심리적 성장과 성격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모가 민감하고 일관성 있게 자녀를 돌볼 때 안정애착이 형성되지만 반복적인 거절과 방임, 학대는 불안정애착을 형성하게 하며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셋째, 인간의 발달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주장한 것처럼 특정 단계에서 고착되거나 퇴행하는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경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다경로적 발달 과정이다. 따라서 불안정애착 역시 건강한 관계를 통해 안정재애착으로 회복된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에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돌보면서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교회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상처 입은 치유자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치유 받은 성도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안정재애착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작은 안전기지(Small Secure Base)가 되어 줄 수 있는 선배 성도들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인간의 궁극적인 안전기지(Secure Base)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고통과 혼란으로부터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언제나 함께하시는 분이다. 리 커크패트릭(Lee Kirkpatrick)은 하나님과의 애착이 형성될 때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심리적 안정을 경험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단순한 종교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깊이 의지할 수 있는 궁극적인 애착대상이라는 것이다. 고든 카우프만(Gordon D. Kaufman) 역시 하나님 개념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애착의 형태라고 설명하였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이 밤낮으로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안정감을 누리며,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불안, 절망, 상실, 고통을 품어 주시는 궁극적인 안전기지(Secure Base)시다. 신앙은 단순한 교리의 수용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신뢰와 안정감이며 이러한 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위기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안전기지(Secure Base)가 되어야 하며 상처 입은 사람들이 회복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안정된 애착을 형성하도록 돕는 치유 공동체로 계속 세워져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 몸인 교회공동체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안전기지(Secure Base)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6.07.16 / 복순희 기자

    대화하면 오히려 싸우는 부부
  • 말로 상처 입히는 경우 대화법 바꿔야 이마고 부부관계 치료 ‘반영·인정·공감’ ◎고민 Tick :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데 저희 부부는 대화를 하다가 오히려 갈등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사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부부가 대화를 통해 사랑을 전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요? ◎상담 Talk :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헌신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 부부도 많지만, 한마디 말 때문에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하면 부부가 서로에게 따뜻한 대화를 통해 사랑으로 신뢰하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이마고 부부관계 치료(Imago Relationship Therapy, 이하 IRT)’에서 그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전 세계적으로 부부상담사들에게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는 IRT는 하빌 헨드릭스와 헬렌 라켈리 헌트는 데이브레이크 대학교 석좌교수 부부가 창안했다. 헨드릭스 박사는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 쇼에 17회나 출연한 부부상담계의 저명인사다. ‘이마고’(IMAGO)는 라틴어로 ‘이미지’(image)를 뜻하며 우리 마음속 깊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생각과 심상(心想)들을 말한다. 이마고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 우리를 돌봐준 주 양육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와 부정적인 이미지를 마음속 깊이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의 관계 경험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와 ‘심상’이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부부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채우지 못한 ‘미해결 과제’가 배우자를 통해 충족되기를 무의식적으로 소망한다. 이러한 무의식적 이끌림 때문에 실제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 부부가 되는 경우들을 임상 현장에서 많이 접한다. 그 이유는 발달단계의 같은 지점에서 상처를 입은 두 사람이 서로 반대쪽의 상처를 입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충족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IRT의 핵심은 부부가 각자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기억하며 잊지 못하고 있는지와 그에 따라 왜 지금처럼 행동하고 말하게 되었는지를 서로가 잘 이해하는 것이다. 이때 부부관계에서 ‘안전함’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 ‘안전함’은 두 사람이 서로의 경계를 늦추고 연약함을 드러내고 마음을 열게 한다. 그 결과 부부는 ‘지금 함께 존재함’이라는 상태가 된다. 이를 위해 부부는 서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다. 두 사람이 그 순간에 함께 존재함이 중요하다. IRT 대화법에서는 부부가 마음을 움직이려면 ‘반영하기, 인정하기, 공감하기’의 세 단계를 통해 서로 눈을 바라보면서 들어주고 인정하며 마음이 담긴 따듯한 말을 권하는 것을 강조한다. 첫째, ‘반영하기’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 말은…지요”라고 한다. 즉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은 나를 힘들게 해요”라고 말했을 때 남편이 ‘그래서 이혼하자는 거지?’라고 아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억측하여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말은 요즘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한다는 거지요?”라고 아내 말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복하여 되돌려 주라는 것이다. 둘째, ‘인정하기’는 “~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의 문장으로 실행가능하다. 앞에 ‘반영하기’의 대화를 이어간다면 아내가 “네, 요즘 혼자서 집안 대소사를 다 해내려니 많이 힘들었어요”라고 말할 때 남편이 “내가 요즘 일이 많고 바빠서 당신 혼자 집안 대소사를 맡았기 때문에 힘들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라고 ‘인정하기’를 실행할 수 있다. 셋째, ‘공감하기’는 배우자의 감정을 인정하고 손을 내밀고 함께 경험하려는 시도다. “당신 기분이 ~했을 것 같아요”라고 표현한다. 앞에 ‘반영하기’와 ‘인정하기’에서 나눈 부부 대화를 이어간다면 “혼자서 집안 대소사를 해결하느라 애쓴 당신의 기분이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 것 같아요”라고 남편이 말해줄 때 아내는 “네, 그동안 혼자서 많이 힘들었지만, 일 때문에 바빴던 당신이 그렇게 내 마음을 알아주니 눈 녹듯 풀리는 것 같아요”라고 화해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부모가 서로를 사랑하며 존중하는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자란다면 그 가정의 자녀들은 친구들과도 따뜻하게 소통하는 대화법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어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행복한 가정의 중심은 부부 사랑이며 이는 신앙인으로서 평생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6.06.19 / 복순희 기자

    따뜻한 공감으로 교회로 돌아오는 청년들
  • 교회 리더십, 영적 부모 역할 감당 공감은 ‘정신적 산소’, 적절한 좌절도 필요 ◎ 고민Tick 청년들이 교회와 멀어지고 교회를 떠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청년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이 있을까요? ◎ 상담Talk 교회로부터 멀어진 청년 중에는 진학과 취업의 이유로 가정에서도 독립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청년들에게 교회 리더십은 영적 부모의 역할을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지난 2년간 청년 담당 목사로서 목회 상담 집단 프로그램, 바울서신과 로마서, 잠언에 상담적 관점을 적용한 강해 설교, 금요 철야 예배 전 개인 상담과 진로 상담을 진행했다. 청년들은 다양한 목회 상담 사역 모델을 통해 공감 해주는 사역자를 건강한 자기대상(selfobject, 자기가 ‘자기의 일부로 경험하는 대상’)으로 경험하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청지기적 사명을 찾게 됐다. 한 청년은 본인 은사와 맞지 않는 전공의 대학을 졸업한 뒤 20대 후반까지 계속 취업에 실패했다. 그런데 청년 수련회 때 성격유형검사를 받고 필자와의 진로 상담을 통해 본인 은사에 맞는 전공으로 편입하면서 이 청년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일터에도 취업했다. 또 다른 청년은 많은 아동들이 꿈으로 이야기하는 소방관의 꿈을 청년기까지 이어왔다. 그러던 중 이 청년은 본인이 불을 무서워한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목회상담자인 필자에게 평생 처음으로 표현했다. 올해는 청년부 회장까지 맡아서 토요 청년 찬양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토요일에 쉴 수 있는 다른 문화재단으로 이직까지 하는 성숙한 신앙을 보여주었다. 청소년 시절 학교 문제로 힘들어하다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한 청년은 목회 상담을 받고 심리적으로 회복된 뒤 청년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음악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해 청년 예배 찬양단과 대학 공연팀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마음껏 펼치고 있다. 지역 교회에서 자신의 은사를 헌신적으로 발휘한 자기심리학자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자기대상과의 건강한 관계 경험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인간은 ‘응집적 자기’ 또는 ‘파편화된 자기’를 다르게 구축하게 된다고 했다. 코헛은 ‘응집적 자기’가 형성되기 위해 ‘정신적 산소’인 공감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꼭 산소가 필요하듯 유아는 심리적 산소인 공감과 반영을 자기대상으로부터 받아야 건강한 자기 구조가 구축된다. 유아는 자기대상과의 접촉, 목소리 등을 통해 자기대상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주양육자로부터 공감적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할 때 자기의 결핍이 발생하고 수치심을 경험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자기를 강화하고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공감적 자기대상과의 관계 경험을 통해서 재경험 되며 이는 건강한 자기 발달에 필수이다. 공감적인 자기대상과의 충분한 관계 형성은 심리적 좌절과 외상으로 오는 좌절을 견디고 조율하며 자기대상 관계 안에서 좌절의 경험과 공감의 경험을 반복하면서 현실을 내면화한다. 청년이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절망하고 있을 때 교회 리더십과 사역자의 진심 어린 기도는 청년에게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강함과 담대함을 부여할 수 있었다. 모세와 함께 했던 하나님은 다음 세대인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셨음을 청년들이 깨달아야 한다. 교회 리더십이 축복의 통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에 우리 모두의 기도 제목과 꿈도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수 1:5~6).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6.04.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앙으로 세상보기
    뉴스 가려보기
  •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어왔습니다. 학자들은 ‘말’의 발명으로 수렵, 채집 생활이 시작된 1단계, ‘글’의 발명으로 농경사회가 형성된 2단계, ‘인쇄’의 발명으로 산업사회가 본격화된 3단계, 컴퓨터와 결합한 ‘텔레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등장으로 정보사회가 펼쳐진 4단계로 역사 발전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등 인공지능, 블록체인, 가상현실과 같은 디지털 범용 기술들이 새로운 4차 산업시대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리라 예측됩니다. 되돌아보면 인터넷, 휴대폰 등 뉴 미디어의 확산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획기적 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우선 인터넷은 탁월한 개방성으로 공간의 제한을 무력화시키고 명실상부한 ‘지구촌 공동체’를 실현해 냈습니다. 또한 개인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을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은 IT기술과 접목된 뉴미디어의 등장이 ‘표현의 자유’에 있어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상당 부분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생겨났습니다. ‘가짜뉴스’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미디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막강합니다. ‘교과서’며 ‘재판관’이고 ‘세상을 향한 창’입니다. 실제로 영유아들은 부모나 교사보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먼저 세상을 배워 나갑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언론의 잣대에 의해 규정됩니다. 또한 개인들은 미디어가 설정해 놓은 프리즘을 통해 외부 환경을 파악하고 사회 현안을 해석합니다. 한 마디로 ‘가짜뉴스’란 ‘뉴스의 형태를 띠지만 실체는 사실이 아닌 거짓된 뉴스’(fake news)를 의미합니다. 이는 언론 매체에 대한 사회 일반의 기본적 신뢰를 숙주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조작해 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는 근래 SNS상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편집 통제권’(editorial control) 없이 ‘이용자 통제권’(user control)만 존재함을 악용해 가짜뉴스 제작 배포, 마녀사냥식 신상 털기, 테러 수준의 명예훼손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를 정치적 선동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가공된 뉴스를 활용해 주식시장을 흔들려 한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경우는 ‘조회’와 ‘구독자’ 수가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적 내용으로 꾸며진 괴담 수준의 가짜뉴스가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강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할수록 보상이 올라 간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됐고, “유명해진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노이즈 마케팅이 일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짜뉴스가 지닌 신속한 전파력입니다. 미국 MIT 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자극적인 가짜뉴스는 일반적 뉴스에 비해 전파 속도가 평균 6배 빠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의표를 찌르는 폭로성 뉴스, 험담과 막말이 섞인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에 더욱 솔깃해하는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를 신장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던 디지털 공간에서 이처럼 민주 질서를 위협하는 행태들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윤리와 규범을 바로 세우고 사용자들의 책임 의식을 거듭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밀려오는 정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변별력’을 길러나가는 일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도 효과적 방안이 될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같은 여과 능력의 함양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5:8~9). 온라인을 이용해 범람하는 온갖 반기독교적 정보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예리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 지면을 빌려 혼탁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의연히 기독 언론의 정도를 걷고 계신 <순복음가족신문>에 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신문은 저희가 온 마음 바쳐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이며, 곳곳에 고귀한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생생한 ‘교회행전’입니다. 지난 2년 이 귀중한 신문에 부족한 제가 신앙 시사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외람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올리며, 한결같이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신 신문사 여러분과 졸문을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 할렐루야!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한글, 빛나는 우리의 보물
  • 한국어 학습자가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0일 코리아헤럴드가 교육부 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세계 42개국 1806개 초 중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3년 만에 40%가 급증한 수치입니다. 온라인상에서의 한국어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5억 명 회원을 둔 글로벌 외국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최근 ‘2022년 듀오링고 언어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학습자는 10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29%가 증가, 수강자 수가 많은 언어 순위 5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향학열이 높아진 데는 물론 ‘한류 열풍’이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글’ 자체가 지닌 문자로서의 탁월성과 매력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여러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 네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어화 되어 있는 영어와 견주어도 효율성이 월등합니다.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다르며,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분되고, 꼭 글자대로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ㅣ’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뛰어난 한글의 편이성이 우리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과 선도적 기술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울러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특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정연하게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하게 쓸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점을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는 보다 실감 있게 설명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글은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적 실용주의가 투영돼 구성원리가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습득의 용이성’이라는 한글의 장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전도의 사명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역, 신분, 성별의 구별 없이 두루 보급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가며 전도했고,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한글이 진정한 우리 언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성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의 언급대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으로 한반도는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선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와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8년의 세월이 초래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절기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서 ‘설날’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명일(名日)입니다. 궁극적인 ‘남북통일’은 단순한 ‘제도적 통일’을 넘어 ‘사람 간의 통합’에까지 이르러야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시풍속의 존속과 공유는 통일 여정에서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은 다름 아닌 생각과 정신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민족공동체로서 기본적 공감대의 토대가 이미 마련돼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 기반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방지 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만 할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글은 빛나는 우리의 문화 자산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온 국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귀중한 소통 매체인 한글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가 역사와 문화의 창고를 여는 관건이듯이 성도들에게 한글은 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여는 소중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카타르의 낭보
  •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에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6월 4일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은 후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우승 후보 스페인까지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모두에게 축구는 ‘그냥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경기를 매개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춤추고 함께 함성을 질렀습니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자생적 ‘길거리 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스스로였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적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 열기는 IMF 경제위기 극복, 폭발적인 참여민주주의 확대, 창발적인 한류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의 ‘16강 진출 가능성 9%’의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 반전 드라마는 투철한 ‘원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과 27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형 ‘빌드업 축구’가 가능했고, 어떤 팀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뚝심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역시 돋보였습니다. 특히 주장 손흥민 선수의 리더십은 발군이었습니다. 그는 월드컵을 3주 앞두고 소속팀 경기에서 당한 안와골절로 안면 보호대를 착용한 채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계신 국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히 대답했습니다. 개막 전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며 부상 투혼을 예고했던 그는 약속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뛰었습니다. 실제로 H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팀은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황희찬으로 연결된 극적인 역전 골로 포르투갈에 2대 1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진출이 확정된 직후 권경원, 조규성 선수는 관중에게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뚜렷한 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본래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7수 끝에 세계 대회를 제패하며 했던 이 말은 다시 새롭게 부각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선 대회 내내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이 압축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흔들리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속 깊은 응원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팀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퇴전의 투혼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기간 특별히 우리 팀의 경기가 열렸던 13일간 축구 덕택에 대한민국은 모처럼 하나가 됐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표팀의 선전은 코로나 블루, 경제 한파, 잦은 사회적 갈등으로 침체돼 있던 한국 사회에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또 한 번의 ‘송구영신’의 시간을 맞으며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스타디움을 뛰고 달렸듯 성도들도 인생의 경기장을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인생행로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것은 이 신앙 노정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스타플레이어로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는 말씀대로 열렬한 서포터가 돼 뜨겁게 응원해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스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어주십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예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책소개
    2025년은 하나님의 말씀 가득한 『감사QT 365』 와 함께
  •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 위한 최고의 선물! 하나님과 동행하는 2025년을 기대하는 성도들의 필독서 『감사QT 365』가 출간됐다. 매년 업그레이 되는 『감사QT 365』는 절대 긍정, 절대 감사를 실천하는데 도움을 주는 QT(Quiet Time) 서적으로 각광 받아 왔다. 감사와 QT, 그리고 필사가 어우러진 2025년 판 『감사QT 365』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집필됐다.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예화를 선별하고 간략하게 요약하여 삽입했다. 특히 성경 말씀을 필사할 수 있는 지면과 말씀 묵상의 적용을 돕기 위한 질문을 추가해 일 년 동안 매일 하루하루를 말씀으로 채우고 영적 성장에 힘쓸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켜준다면 고난 중에도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에는 매일 QT를 생활화하여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삶을 살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예배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저자의 마음이 이 책 『감사QT 365』 곳곳에 녹아져 있다. 이영훈 목사의 감사 목회 철학이 체험적으로 녹아 있는 365편의 묵상의 글과 은혜로운 예화들을 읽고 ‘나의 감사’란에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적어보자. 매일 주어진 일독성경 범위 내에서 제시된 그날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필사하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QT를 하루하루 실천하다 보면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사람이 되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을 따라 매일 주어진 분량의 성경 말씀을 읽으면 2025년 한 해 동안 구약 1독, 신약 2독을 하게 된다.
  • 2024.11.15 / 복순희 기자

    2024년 『감사QT365』 하루 한 장으로 하나님과 동행
  • 매일 통독, 말씀 묵상, 말씀 필사, 감사 쓰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절대긍정, 절대감사하는 새해를 계획했다면 『감사QT365』 2024년 판을 추천한다. 이번에 발간된 『감사QT365』는 감사와 QT, 필사가 어우러져 일 년 동안 매일의 삶을 말씀으로 채우고 영적 성장에 힘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이 책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집필됐다. 본문을 예화 중심이 아닌 말씀 중심으로 편성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예화를 선별해 요약했다. 더불어 성경 말씀을 필사할 수 있는 지면과 말씀 묵상의 적용을 돕기 위한 질문을 추가했다. 또한 매달 시작점에 월별 계획표(monthly plan)를 수록해 매일 성경통독 진도를 표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영훈 목사의 감사 목회 철학이 체험적으로 녹아 있는 365편의 묵상의 글과 은혜로운 예화들을 매일 읽고 ‘나의 감사’란에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적어 나가다 보면 저절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영훈 목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23.12.15 / 복순희 기자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
  •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기독교가 우주 만사의 정답이 된다. 혼란한 시대를 사는 인생들에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이기창 공로장로(반석대교구)가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를 펴냈다. 저자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기록은 합리적이며 과학과도 합치하며 오히려 과학을 초월하고 있음을 깊이 있게 분석해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성을 논증했다. 이 책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내용을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면서 심도 깊게 해설하고, 기독교 교리와 신앙, 신학적 논리와 이론 및 사상, 우주의 창조로부터 역사, 종말 및 미래 발생할 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과학자인 저자는 과학과 철학의 논리로 신의 존재로부터 우주 만물 전체를 물질우주와 정신우주로 균형있게 조망하면서 과학-철학-신학을 통섭해 교집합의 우주론을 밝혀낸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인류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질문인 우주, 물질, 영혼, 생명, 죽음, 사후생, 세상종말 등 빅퀘스천 규명을 추구해 나간다. 응용과학인 전자통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공과대학 정교수를 역임한 이기창 공로장로는 교수 은퇴 후 10년간 물리학, 철학, 신학, 역사 등 인문학 연구에 몰두해 이 책을 만들었다. 그는 현대물리학에서 발견한 빅뱅 우주론과 부합하는 종교를 엄밀히 분석, 조사해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만이 현대과학과 부합하는 유일한 종교로서 진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기독교가 공학, 물리학 등의 과학과 철학에 합치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따라서 성경과 기독교는 ‘우주적 진리’라는 결론을 깨닫게 된다.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몰라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추천하는 필수 교양 인문서적이다.
  • 2023.04.07 / 이미나 기자

    문화계 소식
    [영화 소개] 천성가는 밝은 길이
  • 사형수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박효진 장로의 간증을 토대로 제작한 ‘천성가는 밝은 길이’ 영화가 지난 4월 유튜브에 올라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박 장로는 전직 교도관 출신으로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다. 그의 간증은 사형장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형수들의 처절한 영적 사투를 통해 복음의 진리와 영적전쟁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이번 영화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많은 기독교 영화를 제작한 홍의봉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박효진 장로 역은 이경영 배우가 맡아 열연했고, 신인 김양균과 유라성도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임동진(목사), 한인수 장로, 정욱, 정선일 등의 중견 배우들도 특별 출연했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제목 검색을 통해 볼 수 있다.
  • 2023.06.09 / 김주영 기자

    기독교 복음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 7월 5일 국내 개봉  
  • 전미 박스오피스 4주간 연속 TOP 10 하나님의 사랑과 진정한 믿음으로 감동 전해 하나님의 치유 능력과 사랑을 경험케 하며 대한민국에 진정한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릴 기독교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가 오는 7월 5일 국내에 개봉한다. 전미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들며 놀라운 흥행을 기록해 그 해 최고의 종교 영화로 떠올랐다. <기적을 믿는 소녀>는 기도로 믿음을 증명하는 어린 소녀를 통해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믿음의 불꽃을 키워가는 엔터테이닝 복음 영화다. 가족과 함께 호수에 놀러 간 평범한 어린 소녀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케 하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죽은 새와 강아지의 부활, 그리고 하반신 마비를 가진 친구가 다시 걷게 되는 등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목격한 믿음의 소녀를 통해 점차 변화해 가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강렬한 울림과 함께 감동을 전한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하는 스토리와 힐링을 선사하는 완벽한 케미스트리 등을 통해 종교인을 넘어서 일반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관람 후에는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듣고 계세요”라는 대사와 깊은 감동이 가슴에 남게 된다. 특히 <위대한 쇼맨> 오스틴 존슨부터 제68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미라 소르비노, 피터 코요테, 케빈 소르보까지 믿고 보는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해 막강 캐스팅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여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편, GOODTV 기독교복음방송(대표이사 김명전)에서는 개봉 전부터 <기적을 믿는 소녀> 교회 상영을 진행해 한국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많은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밝혔다.
  • 2023.05.25 / 이미나 기자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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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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