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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나
2017.04.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장 1~8절)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확실히 죽으시고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처형은 로마 시대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고문을 당하는데 이때 받는 태형은 매우 끔찍했습니다. 채찍에 뼛조각을 박아 넣어서 한번 때렸다가 채찍을 당기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왔습니다. 많은 죄수들이 이 채찍으로 맞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형벌도 받기 전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서 그 제자들이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리려고 할 때, 로마 군인이 와서 창을 가지고 예수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성경에 보면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이미 세상을 뜨신 예수님의 시체에 창을 찔러서 물과 피가 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폐와 심장에서 물이 고였다가 흘러나온 것으로 주님이 죽으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확실함 (확실히 죽으시고 확실히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 확실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또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의 손에 잡혀 처참히 고통을 당하시고 만인이 보는 가운데 갈보리 산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기가 죽으면 들어려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장사한 지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선뜻 믿지 못했습니다. 또 제자들 중에 도마라는 제자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기가 막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어떻게 온갖 조롱을 받고, 핍박을 받고 원수들에게 잡혀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았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보지도 못하고 떠도는 소문으로만 들었다면 순교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가짜임을 증명하고자 했던 미국의 리 스트로벨이라는 사람이 실화를 담은 영화를 제작해서 내놓았습니다. 리 스트로벨은 미국의 예일대학 법대 출신으로 시카고 트리뷴지의 법률 담당 기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독교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가요 베스트셀러 작가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생활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 증인들이 참 많습니다.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증인들이 예수님 부활하신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1절로 14절에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20장 15절로 1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제일 처음 만난 분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와 여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 모이는 곳에 뛰어가서 알리는데 제자들은 믿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곁에 와서 그들하고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로 16절에 보면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두 제자가 걸어가는데 곁에 와서 함께 걸어가는데 예수님인줄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누가복음 24장 29절~31절)

  주님이 그들과 헤어지려 하자, 제자들은 예수님 함께 이야기를 좀 더 하기 위해서 여관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쉬고 같이 가자고 권유하고 예수님을 인도해서 여관에 들어가서 식탁에서 밥 먹으려고 할 때 예수님이 떡을 떼어 축사를 하고 나누어 주니 떡을 받자 예수님인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을 두려워해서 또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이 모여있던 곳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한복음 20장19절~20절)

  그러나 그곳에 없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를 않습니다. 며칠 수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다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20장 24절로 28절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마는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동분서주 하시면서 제자들을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있은 이후에도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다른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 바다로 갑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요한복음 21장 1절~4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새 그물질을 하던 제자들이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 해변가에서 흰 옷 입은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거기에 뭐 고기가 있느냐?’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때 물고기가 심히 많이 잡힙니다. 그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다. 저 음성이 예수님의 음성 아니냐?’라고 외칩니다.

  제자들이 빨리 배를 저어서 해변에 나오니까 예수님께서 장작불을 펴 놓으시고 고기와 떡을 구워놓고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디베랴 바다에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시 감격하는 모습을 봅니다.

  갈릴리의 산 위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날 처소를 예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태복음 28장16절~17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일시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 바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7절로 8절에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팔삭둥이 같은 자기에게도 주님이 나타났다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을 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500명 이상 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장 9절로 11절에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본 것이 아니라 수 백 명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했다는 것은 부인하려고 달려들면 부인할 수 없고, 긍정적으로 살아난 사실은 너무 증인이 많아서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2. 죄책감에 짓눌린 베드로를 용서하심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신 큰 일이 있습니다. 제자 중에 수제자라고 자랑하던 베드로가 이제 주님을 따라다니던 삶을 중지하고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면서 디베랴 바다에 어부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알고 그를 만나 주시고, 치료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을 받을 때 두 번은 모른다고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결단코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생애에서 제자들의 격려를 가장 필요로 할 때가 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그 곳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려는 말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제자들은 다 떠나고, 심지어 두 번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도무지 그를 모르노라.’고 변명을 합니다.

  자기 선생님을 심적 도우심이 가장 필요한 때 격려하는 말 한마디 안 해주었으니 그 죄책이 베드로를 짓눌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떡을 주고 생선을 구워서 먹이고 난 다음에 베드로에게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 사람으로 사랑합니다.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잘 알았습니다. 자신은 이미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꿇어 앉혀서 ‘야 이 비린내 나는 고기잡이야, 나를 그들 앞에서 저주 하고 맹세해서 가로되 네가 나를 모른다고 그랬지? 내 얼굴을 쳐다봐. 알겠나? 모르겠나?’라고 말하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떡 다 먹이고 생선 구은 것 먹이고 난 다음에 “베드로야, 너는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 사람의 사랑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은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 때 주님이 “내 양을 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 세상에 자기처럼 못 믿을 행동을 한 사람을 보고 주님이 양을 치라는 것은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예수님이 두 번째 또 묻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 하느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다시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주님이 또 한 번 “내 양을 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한참 있다가 예수님이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람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할 때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언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했다가 세 번이나 부인한 저를 보고 지금은 인간적인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두 번 말을 했는데 이제는 진짜 인간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나도 몰라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또 다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배반한 아주 고약한 사람이라도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다시 재기할 수 있게 해주시는 은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던 제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잘못을 지적하고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넘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재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15절~1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해줄 뿐 아니라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자격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때문에 베드로로서는 그날이 재생하는 날보다 더 중요한 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인 이상 삶의 형편에 따라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신앙에 잘못된 행동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찾아와서 도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죄책에 눌린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 신앙을 회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청산해 버렸어요.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이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우리 죄의 값이 1천원이라면, 예수님은 1천원짜리 죄를 청산할 때 주님의 피 값은 1조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 평생 지은 죄를 다 값으로 치면 천 원입니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값은 1조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여러분 죄는 예수님 은혜 속에서 흔적도 없어집니다. 엄청난 은혜로서 우리를 씻어주고 용서해주고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내가 지은 죄를 내가 갚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가치 있는 예수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마귀가 우리를 참소할 수 있을 정도의 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죄를 지적당해서 심판 받는 일이 없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렇게 해방시켜 주셨으니 이제 내 팔자 좋게 죄 짓고 살아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속에 들어와 거하심으로 성령의 꾸짖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여러분에게 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팔 벌리고 서서 ‘이리 오라’고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줄곧 서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것처럼 우리를 찾아서 나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목자보다 더 먼 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신분에서 인간의 신분이 되기까지 죄인들을 찾아 무한히 먼 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우리를 찾기 위해 인간의 신분이 필요함으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일생을 뒤를 쫒아서 따라오며 여러분을 찾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여러분과 나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분과 나를 대신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여러분 대신에 짊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아닙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끌어 모아서 그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이 부활절 날 깊이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계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생명 내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은 죄 값으로 말미암아 내가 용서받은 의인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서 전신이 살이 떨어져 나가고 가죽이 벗겨지고 했는데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병을 앓고 있으면 주님에게 미안해서 못 견딥니다. 사실 주님은 여러분 병 때문에 자기가 얻어맞은 것입니다. 대신 채찍에 맞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 대신 병의 채찍에 맞았는데 이제 왜 또 우리가 병들어야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대속해주신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건강하기 위해서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대신하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죄를 대신 갚아주셨고, 여러분의 병을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셨고, 여러분의 저주를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서 여섯 시간 동안 피를 흘리셨는데 구약에는 ‘나무에 달린 자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저주를 받은 사람은 나무에 매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하나님이 땅을 저주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비극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가시와 엉겅퀴를 당신 몸에 받아서 대신 찔리고 이 고달픈 인생살이를 대신 살아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 병을 감당하셨으니, 주님이 갚아주신 것만 해도 한없이 감사한데 내가 무슨 자랑한다고 병을 짊어지고 돌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주님이 내가 너희 병을 대신 짊어졌다고 말씀하시니 믿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믿고 나가야 돼요. 건강의 꿈을 꾸고 그 꿈이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4로 7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살리는 현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살아났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미래에 있을 우리의 부활이 확실히 증거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성령께서 우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 그 능력으로 부활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지나간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사건으로서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해서 지금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봐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것입니다. 영으로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확신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주님 만나달라고 기도하면 여러분이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어려운 환경이 닥쳐올 때마다 이렇게 소리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살아계신다. 우리 주님은 살아계신다!”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앎으로 굉장한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살아계심으로 여러분은 죄에 대해서 질병에 대해서 저주에 대해서 대결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내가 이 원수들과 싸울 때, 용기와 힘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함으로 종교개혁이라는 과업을 완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장20절)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사 지금 살아계신 주님을 매순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바라보고 박수를 쳐야 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찬양을 불러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항상 우리가 같이 계시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1장 30절~31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일치가 되고, 예수님이 여러분과 일치가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안에 들어와서 우리 죄와 용서가 되시고, 우리 치료가 되시고, 우리 아브라함의 축복이 되시고, 우리의 부활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 원수들을 다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날 대신해서 나의 인생의 부정적인 세력을 멸하시고 예수님 당신의 부활을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용서 받은 의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치료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 승천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믿지 않는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완전히 거듭나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의로운 사람, 건강한 사람,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 부활을 얻은 사람, 성결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 그것을 우리가 알고 믿고 입술로 시인해야 예수님을 모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 정체성 속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질병을 담당하셨고, 몸이 찢어졌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나무에 매달려 저주를 청산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허락한 것입니다. 우리 대신해서 죽어 사망과 음부를 쳐서 멸하고 부활과 영생을 가지고 나와서 여러분에게 한없는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 것이 된 것을 스스로 알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을 꿈꾸어 보고, 힘껏 기도해서 기적이 일어난 체험을 해야 되고, 새사람이 된 것을 끝까지 믿고 여러분 생활에 그런 열매가 맺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 죄와 저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흑암에서 건지사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늘 이 사랑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제 더이상 죄와 저주의 노예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용서받은 의인으로, 성령충만하며, 복된 삶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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