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린도전서 13장 1~8절)
우리 사회가 최근 무척 차갑고 몰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옛날보다 엄청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과 길을 메우는 자가용, 우리가 먹는 식탁 등 옛날에 비하면 참으로 풍요롭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그 삶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1. 사랑의 척도를 가지고 바라보라
우리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사랑의 척도를 가지고 모든 사태를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 속의 들보와 티에 관해서 이렇게 말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41절로 42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누가복음 6장 41절)라고 말씀하셨는데, 티와 들보는 크기가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티는 눈 속에 들어갈 만큼 작은 것이지만, 들보는 집을 지을 때 기둥으로 쓸 만큼 큰 목재인 것입니다. 티는 안과 의사가 눈을 뒤집어 특수 렌즈로 보아야 겨우 찾을 수 있는 티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작은 티를 쉽게 찾아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물으시자 아담은 모두 하와가 잘못했지,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아내의 잘못된 탓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를 주신 하나님까지도 은근히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 비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사물을 판단해야 됩니다.
마가복음 10장 43절로 4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5장 1절로 2절에도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평론할 때,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경 삼아서 이웃을 평론하고, 자기 마음대로 평론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우리가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로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역사를 나타내야 되는 것입니다.
2. 사랑에도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하라
사랑은 역시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늘 바라봄으로 그 사랑의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이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사랑을 적은 천을 애들 방 벽에 붙여놓고, 매일같이 읽으라고 했어요. 사납고 부모 말을 잘 안 듣던 애들인데, 그 방에 아버지가 사랑을 가르치는 성구를 적어놓고, 보고, 읽고, 자고, 깨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로 7절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그대로 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변화를 시켜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합니다.
바라봄의 법칙에 고개를 들어 이 사랑의 말씀을 읽으면,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자기 아들들이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변화되지 않았는데, 사랑을 적은 천을 바라보고 늘 읽고 들어오고 나가고 한 그 결과 인격이 변화되었다’고 간증합니다. 부모의 꾸지람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말씀이 가슴속에 들어와서 변화된 것입니다.
한 동리에 한 사람이 뒷산에 있는 큰 바위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고 늘 그 바위를 바라보았는데, 나중에 자기가 나이를 먹어서 거울을 들여다보니깐 바로 그 바위가 자기 얼굴을 변화시켜 놓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봄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 말씀을 바라보면 그 말씀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면, 예수님의 그 언약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연약할 때 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죄인 되었을 때 사함 받은 의인이 되게 만들어 주시고, 원수 되었을 때 화목하게 만들어 주시는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 사회에 분노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말을 안 듣는다고 교사가 유치원생을 때려죽이기도 하고, 끼어들어 줄을 섰다고 칼을 휘두르고 있으며, 심지어 아무 이유도 없이 길 가는 사람을 해치고, 상처를 입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생겨나는 겁니다. 분노 범죄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보면,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함으로 인한 분노가 가득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 줄어들면 분노가 늘어납니다. 분노가 우리 사회에 가득해지면,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운 사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용서하고 사랑하라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따르는 용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신 말씀은 용서와 사랑의 모범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절로 7절에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들이 젊은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치고 ‘예수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우리에게 잡혔습니다. 변명할 것 없어요.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한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주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때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글을 썼다는 말은 성경에 기록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글을 쓰니깐 그거를 따라서 손가락 가는 곳을 주의해서 보고, 무엇을 적는가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다른 사람 모르게 지은 죄를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야 내가 이 여자를 돌려 쳤다간 그 다음엔 내가 돌에 얻어맞아 죽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글을 자꾸 써 내려 가는데, 큰 자로부터 작은 자까지 돌을 살며시 땅 위에 놓고 그들은 자기들 집으로 가버리고 만 것입니다. 한참 후에 예수님이 울고 있는 여자에게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를 참소하는 자가 있느냐?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주님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가서 다시 죄 짓지 마라.’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아닙니까. 용서와 사랑이 그를 변화시키는 것을 봅니다. 참된 신앙은 용서만 해 주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해주었으면 사랑을 베풀어서 변화를 받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용서받고, 사랑받아서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을 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종교창설자들의 태도를 보면 대조가 참으로 됩니다. 어떤 종교창설자는 점잖게 앉아가지고 있는데, 주변에는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이 끓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 볼 필요 없다. ‘본래 무일물하사,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라. 마음에 없다고 생각하고, 초연하여 도를 닦아라.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자기 마음속에 평안을 가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한 매를 맞고, 찢어진 옷을 입고,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계십니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는 기독교 신앙의 근원이라고 우리가 말을 합니다. 처참하게 맞고 극악한 형벌을 받아 죽어가는 예수님이 부처님하고 뭐가 다릅니까? 부처님은 수양과 도덕으로 모든 주위와 환경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된 수양과 환경을 뛰어 들어가서 전신으로 짊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사야 53장 4절로 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철저히 우리 죄악과 저주를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4.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한다”(데살로니가전서1장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냥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라는 말을 썼습니다. 수고는 ‘코포스’라는 헬라어 단어인데, ‘몸이 녹초가 되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노동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만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고달픈 일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엄마가 밤잠을 못 자고 아기를 돌보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도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외삼촌의 집에서 노동을 하는데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세기29장20절)고 했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보스턴의 한 정신병원에 애니라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성격이 매우 난폭하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자원봉사자가 애니라는 아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아이가 아무리 난폭해도 계속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 자원봉사자의 관심과 사랑으로 애니는 변화가 되어서, 정신병원에서 퇴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수술을 받아 눈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애니라는 아이는 바로 헬렌 켈러를 돌보았던 앤 설리번 선생님입니다.
앤 설리번은 한 자원봉사자의 사랑으로 회복된 이후,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를 48년 동안 돌봐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사랑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나 한 사람이 베풀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고, 그러한 사랑이 모여서 이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떠한 허물이라도 벗기지 않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추억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밤에 내가 이부자리를 발로 찬 채 잠을 자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기겁을 합니다. 그리고 이불을 목 있는 데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 손으로 다독거려 주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사랑이 마음속에 따뜻하게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름철에 할머니께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할머니 곁에 누워서 배꼽을 다 내놓고 잠을 자고 있으면 할머님이 기겁을 하시고 ‘할매 따라와서 감기 걸리려고 그러냐?’며 홑이불 개던 것을 내 배 위에까지 덮어주시면서 ‘이렇게 벗고 자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가 나의 모자란 점을 덮어주지 ‘이 자식 이불 안 덮을 바에는 덮지 말고 저 구석에 가서 혼자 자라!’고 벗기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를 꼭 덮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덮어주는 것이지 벗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이 있다고 큰 소리를 해도, 허물을 덮어주지 아니하면 사랑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 10장 12절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잠언 17장 9절은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덮어주고 용서하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요, 예수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결론
성경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근사한 말을 하고, 잘 지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싸우고, 허물을 들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지은 죄악을 덮어주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의 옷으로 우리들을 덮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서 ‘주님 나를 심판하시옵소서.’ 그러면 예수님은 ‘심판은 무슨 심판?’, ‘내가 너무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내가 네 죄를 다 청산했다. 내 의로운 예복을 네가 입어라. 내가 다 이루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 의인이 되고, 더러운 자가 깨끗한 사람이 되고, 믿지 못할 사람이 믿을 사람이 되고, 미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 변화를 받아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모든 말은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 사회에 사랑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미움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몇 사람만 모이면 온 천지를 뒤덮어버릴 정도로 서로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최후의 순간에도 사랑으로 강도였던 사람을 구하는 것을 봅니다. 흉악한 강도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주님, 주의 나라에 임하시거든 저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그 때 예수님은 그 강도의 죄를 지적하기보다는 죄를 덮으시고,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며 용서와 사랑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덮어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가지고서 피를 흘리고 가죽 옷을 입혀서 내보낸 것입니다. 이 상징적인 것입니다. 쫓겨나갈 때 ‘벌거벗고 그냥 얼어 죽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짐승을 대신 죽여서 가죽을 벗겨서 입혀서 내보낸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입혀서 내보내느니라. 주님은 여러분을 입히는 옷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끌어안고 “나를 옷 입어라. 내가 피를 흘려서 십자가에서 네 옷을 만들었으니 나를 옷 입어라.” 예수님 사랑에 의지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을 덮어서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성령이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서 그 흘리신 보혈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사랑으로 덮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늘 감사하며 살게 하시고 이제는 늘 주님께 받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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