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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위력
2017.03.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

  혼자 사랑하는 것을 짝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짝사랑에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나 행복 같은 것은 없습니다. 고통만 들어찼습니다. 사랑은 그 최고의 존재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최고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또 사람들이 그 사랑에 회답하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크신 은혜와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한스 요하임 마츠 박사는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들은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결핍을 채우려는 잘못된 방법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개인의 인생을 망치며, 심지어 인류 역사에도 위협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결핍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이 세상의 사랑으로는 그 사람의 결핍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동기에든지, 막다른 골목의 인생에 처해있다고 생각이 나고, 모든 인간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때, 마음의 황량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무엇 때문에 이 고통을 당하는가, 큰 괴로움이 당할 때, 그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마음속에 폭 받아들이고, 하나님 가슴에 기대고, 하나님 사랑을 하게 되면, 마음의 텅 빈 공간이 사라지고 흡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흡족한 삶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사랑을 드리고, 받고 하는 그 이외에 다른 데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누구나 마음에 그 빈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갖가지 애를 써보지만, 이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마음의 빈 공간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신앙에 열심히 한다고 하여도, 사랑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코 신앙의 꼭대기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1.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데 있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빈손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독생자를 주심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없는 사랑은 증명할 수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 증명을 하라고 하면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를 건지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렸다. 그 사랑의 증거가 크지 않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목숨을 바쳐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 말씀하십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전부와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산 제물로 드려라. 묶어서 목의 생명 핏줄을 끊고, 팔다리를 다 잘라내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라’ 아주 너무 엄청난 말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보통 신앙을 가진 사람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이 너와 내가 모리아 산에 가서 제사 드리라고 한다”고 말하고, 그 아내 사라에게도 그렇게 말한 뒤 모리아 산으로 출발합니다.

  사흘 길을 가는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 제사에 쓸 장작은 내가 걸머지고 있고, 짐승을 잡을 칼도 들고 있고, 불도 가지고 있는데 제물로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제물은 하나님이 직접 준비한다고 하시더라” 그래 둘이 올라가서 제단을 만듭니다.
  돌을 쌓고, 제단을 만들고, 그 다음에 아버지의 얼굴이 싹 변하더니 아들을 붙잡습니다.
  “손, 발을 내 놓아라.”
  “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이 너를 잡아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다”,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아들 이삭도 대단합니다. 순순히 아버지의 명령에 따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어서 장작 위에 얹어놓고 칼을 뽑아가지고서 찍으려고 하는데, 그때 하늘에서 하나님이 고함을 치십니다.

  창세기 22장 11절로 12절에 “야훼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증명을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죽이는 행동까지 하며 증거한 것입니다. 사랑은 증거돼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없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빈손으로 사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상담가 게리 채프먼 박사는 사랑을 표현하는 다섯 가지 방법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첫째, 인정하는 말이 사랑을 증명합니다.
  둘째, 함께 있는 시간이 사랑을 증명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 선물입니다. 사랑하면 선물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봉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스킨십입니다. 서로 포옹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방법 중 사람마다 선호하는 것은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무엇을 줌으로써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을 그 아들 예수님을 주심으로 증명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심으로 사랑을 증명하셨다

  하나님이 그냥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만하고 다른 말은 안 했다면 구원까지는 이르지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증명으로 그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내보냈는데, 몰인정하도록 세상 사람을 위해서 죽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쳐도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아 목마르다”고 말할 때도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 아들에게 물 한 컵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철저히 여러분의 죄, 나의 죄 짊어지게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장난삼아 매달린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철저히 죄를 짊어지셨는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가 하나도 남지않고 예수님에게 맡겨져서 청산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종으로 팔려서 하나님에 속해 모든 인류를 종으로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놓고 우리를 값 주고 사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종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은 철저히 하나님 소유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행위뿐 아니라, 인격도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팔려간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께 팔려갔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이 세상에 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팔려가서 하나님 소유물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용서를, 의로움과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주시고, 의로움을 주시고, 구원을 주셨다는 증거가 그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통해서 치료를 하시고, 치료하심으로 우리 육신의 생활조차도 돌보신다고 한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에 보면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범사에 잘 되며, 하나님 앞에 즐거움을 드리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난하게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참 잘못된 생각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11장13절)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형통해서 하나님 이름으로 많은 사랑과 구제를 베풀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축복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2절)라고 했습니다. 잘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못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잘될 뿐 아니라, 범사에 잘되고 건강하기를 원하셔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해서 승천하신 것은, 부활은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고 이겼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은 우리 대신해서 부활한 것이므로 이제는 죽어도 사망과 음부로 끌려 내려가지 않고, 낙원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강림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의 증거로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보혜사이시고, 성령은 다른 보혜사입니다. 이는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님과 꼭 같은 인격을 갖고, 같은 일을 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보혜사가 온 것은 예수님이 오심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는 바람과 같이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봐도 무슨 보혜사에 대해 모릅니다.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므로,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와 계신 줄 알고, 또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계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장 17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바람처럼 계시고, 우리를 성전삼고, 우리 속에 계신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시므로 영육간에 막대한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십니다. 사람이 못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같이 계시면 능히 하고도 남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5천명의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성령님도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이 같이 계시면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박한 일이 닥쳐와서 성령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같이 계심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3. 사랑을 받은 사람은 변화된다

 사랑은 사랑을 받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고도 옛사람 그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받는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속에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으면, 언어, 심사, 행동이 하나님 닮은 사람이 되고, 변화된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로 31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예수님 안에 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었어요. 의로움이 되고, 거룩함이 되고, 구원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혜있는 사람이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 구원에 이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막 노력하고 애써서 변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변화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심으로, 우리가 변화돼 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10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다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예비해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 주님께 기도하면 주님이 그 예비한 것에서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것입니다.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내가 잘나서 되지를 않습니다. 나와 같이 계신 예수님, 내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님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행동하면 여러분 속에 성령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하면 마귀도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날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마시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2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린도후서4장7~12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 죽인 것이 뭡니까? 죄가 예수를 죽이고, 병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가난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멸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짓밟아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힘이 예수님을 결국엔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죽은 예수를 모셔드리면, 우리 속에 들어와서는 부활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와 건강과 축복과 영생을 우리에게 벗어놓는 것입니다. 우리 사망의 옷은 주님이 받아 입고, 예수님 부활의 옷은 벗어서 우리에게 입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예수 신앙생활이란 매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이 관계 속에 산다고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날 위해서 죽은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날 위하여 부활한 것입니다.

  보배를 담은 그릇은 보배로운 그릇입니다. 우리 선교 초창기에 재미있는 일이 많이 있었는데, 어떤 성도가 외국인 선교사님이 와서 고생을 하는데, 고생 중에 제일 큰 고생이 선교사들 이야기를 들으면 화장실 고생이랍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보지만, 미국 사람들은 앉아서 편안하게 뒤를 보는데, 우리 한국 교인 중에 잘 사는 사람이 선교사를 도와준다고 놋으로 만든 요강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래 영어를 못 하니깐, 요강을 가지고 와서 이것을 방에 가져다 놓고 “쉬~쉬” 그랬더니 선교사가 고맙다고 이마를 끄덕끄덕해요.
  그 다음에 그 선교사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한국인들 앞에 요강을 내놓아요. 거기 보니깐 요강 안에 과자를 잔뜩 넣어가지고서 먹으라고 하더랍니다. 요강인 줄 아는 한국 사람들은 못 먹고 한쪽 구석에 모여서 웃고 하는데, 서양 사람은 그 요강에 손을 넣어가지고서 꺼내 먹고 참 맛있다고, 한국 사람들 대단한 사람이라고, 과자를 이 좋은 그릇에 넣어서 먹는다고.
  그러므로 그릇이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도자기라도 그 안에 쓰레기를 담으면 뭐가 됩니까? 쓰레기통이 돼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거기에 쓰레기같은 일을 하면 쓰레기통입니다. 그러나 그 요강 안에 보물을 넣어놓으면 보물단지가 돼요. 우리 안에 천국의 보물인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다 보물단지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값없이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건강하게 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얻게 되고, 부활영생 얻게 되고, 또 우리 속에 하나님의 보화인 예수님이 와 계시므로 보통사람이 아니라 보물단지에요. 보배로운 사람이에요. 귀하고 귀한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를 비하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이 손가락질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용물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안에 내용물을 따라서 그릇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향수를 담아놓으면 그릇이 가는 곳마다 향기가 자꾸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천국의 향내가 자꾸 나는 것은 여러분 속에 예수님을 담아놓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사랑으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는 독생자 아닙니까?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가지고서 그 끝없는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의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을 샀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 끊으려면 끊을 힘이 없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었다 부활하신 그 끈끈한 사랑의 밧줄로 묶어 놓았는데, 누가 여러분을 멸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예수님을 말미암아 영원히 하나님께 묶여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결과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모두 다 천당에 가게 돼 있는 것입니다.

결론

  모든 것 중에 무엇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면, 여러분 속에 텅 빈 공간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울증이 걸리고, 마음이 텅 비어서 슬픔이 끝이 없어 괴로울 때도,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찬송하면, 마음속에 보혜사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여러분 마음속에 오시면, 마음이 후끈 후끈 후끈 해지면서 아주 말할 수 없는 만족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을 아무리 가지고 있을 지라도, 파도를 만나게 되면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이 당하는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에 모든 것이 박살이 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성령의 충만이 거한 사람 이 외에는 마음에 영원한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부자는 여러분입니다. 가장 성공한 사람도 여러분입니다. 천지의 주재가 아버지이고, 여러분 우리의 신랑 되고, 형님, 오빠 되는 분이 예수님이시고, 우리 어머니같이 우리를 돌보아주는 이가 보혜사 성령이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정말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영으로 역사하여 주셔서, 이 세상사람 상상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세계를 우리는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사랑 때문에 이 모든 아름다움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사랑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 참 만족이 마음속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들을 한없이 사랑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증명하셨듯이 우리들도 사랑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랑을 받은 사람은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을 닮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주의 사랑을 온 천하에 전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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