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중략)…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1∼8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온 인류를 대신한 것
부활하신 예수님 바로 지금도 살아 역사하셔
믿고 시인하면 부활의 기적과 영광 함께 누려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가을과 겨울을 지내는 동안 생수가 다 마르고 생기가 그쳐 죽음 같은 황량함이 산야를 덮습니다. 그러나 봄의 계절이 다가오면 새로운 생수와 생기가 넘쳐나고 그 가운데서 부활의 생명과 아름다움이 소망의 노래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M. Luther)는 “부활의 약속은 성경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움트는 풀 한 포기에도 약속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회에 있어 4월은 축복의 계절입니다. 지금부터 119년 전 1885년 한국 최초의 공식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부부와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제물포항에 도착한 날이 4월 5일 부활절 아침이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에는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간절한 기도문이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절의 아침에 그들이 드린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고 병원이 세워지고 이 나라가 역사상 유례없는 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1. 죄로 인한 사망
이 땅에는 왜 이렇게 죽음과 슬픔이 많습니까? 우리는 왜 죽어야 합니까?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삶의 소망을 잃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죽음은 원래 우리가 감당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셨을 때는 죽지 않도록 만들어진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을 몸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죽음과 사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한 죄의 대가로 사망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 전까지 죽음은 우리와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죽음이란 자연법칙이 아닌 죄 때문에 우리에게 들어온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원래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하였으며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고 지구에 사람이 꽉 들어차면 또 다른 지구를 만드시고 또 다른 지구를 만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값으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람들은 일반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일지라도 그 짧은 인생 동안에도 슬픔과 고통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가져온 원인인 죄를 청산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죄를 청산하시고 죽음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죄 없이 잉태되셨고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을 수가 없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을 까요? 그것은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2.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적이 없으므로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은 인류를 대신하여 죄와 사망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과 사랑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가정에서 죽음과 부활에 대한 논쟁이 나사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멀리 갈릴리에 가 계실 때 예루살렘에서 한 5리쯤 되는 동구 밖에 살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 불행이 다가왔습니다. 나사로가 병에 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신속히 소식을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것은 그 당시 하도 허다한 사건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3년 동안 사역한 온 이스라엘 땅의 의사요 병원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뛰어 오셔서 고쳐주실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 소문을 듣고도 그대로 갈릴리 땅에서 이틀 동안 더 머물렀습니다.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온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알도록 기다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달아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무덤에 장사 지내 썩은 냄새가 나는 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는 마음에 아주 한이 서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리가 병들었다는 소리만 들어도 뛰어오실 줄 주님이 기다리는 우리를 더 내버려 놓고 죽어서 냄새가 나도록 무덤에 파묻고 난 이후에 오셨습니까?’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울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아나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오라비 나사로가 바로 ‘지금’ 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급히 달려온 마리아도 언니 마르다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비통하시고 분노하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이 더욱 불쌍하셨던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흘 전에 예수님이 오셨으면 기적을 행해 주셨을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자신들 앞에 있는 예수님은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들에게 예수님은 나흘 전에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지금 죽음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그렇게 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부활의 날에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날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지금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들은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무력한 허물을 덮어 씌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녀들과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을 합니다. 과거에 예수님은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과거에 위대한 능력을 행한 예수님께서 오늘은 역사하지 않으십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구름타고 오시고 죽은 자를 다 살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올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오늘은 어떻게 행사십니까? 오늘은 모르겠습니까? 그러면 과거의 예수님과 미래의 예수님은 계셔도 오늘의 예수님은 없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큰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죽은 예수님을 모시고 무엇을 한다 말입니까? 오늘날 세계 모든 종교는 종교를 창시한 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종교는 남아있거니와 창시한 자들은 죽는데 예수님도 죽었다면 기독교도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은 과거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계실 분이지만 바로 지금 이곳에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시고 비통히 여기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몰인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참으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온 나라와 온 국민이 비통한 심정으로 아파하고 울고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함께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진실로 통곡을 하고 우셨고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그리고 이웃들이 자식을 잃고 슬픔 가운데 있을 지라도 우리 예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 어루만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3. 예수님에 대한 예언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600여 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에 대해 먼저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고통을 당하고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 죽음 우리 죽음! 예수 무덤 우리 무덤! 예수 부활 우리 부활! 예수 승천 우리 승천! 이 일을 이뤄내시기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예언한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 예언은 바로 현재 살고 있는 지금 우리를 위한 예언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7절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걸머지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당한 그 고통과 괴로움은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고통 받은 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미래는 오늘보다 영화로운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고 다음 달은 이번 달 보다 나아지고 내년은 금년보다 영원한 미래는 지금보다 나아지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고통을 다 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류 새로운 조상으로 오셨습니다. 옛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새로운 인류의 조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 와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용서를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영생복락을 주신 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노래로 예수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새로운 인류의 조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영원한 새로움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소식은 그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망과 죽음의 권세에 눌려있지 않습니다. 생명의 근원자로서 우리에게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감사하고 찬미할 때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생수가 넘쳐나고 생기가 넘쳐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8절에서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성령으로 살아계셔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 개종하여 예수님을 영접했던 한 그리스도인은 인터뷰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는 인생을 살다가 길을 잃어버려 방황을 하며 살았습니다. 한참을 방황하던 중 두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죽어 있었고 한 사람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길을 묻는데 죽어 뻗어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을까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살아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죠? 그 살아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과거에는 죽은 사람에게 내 인생의 길을 물었습니다. 그 전에는 마호메트에게 길을 물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살아 계신 분 예수님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살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예수님을 선택한 이유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기독교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창시자를 믿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절로 44절 그리고 58절은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기록합니다. 3차원의 세계는 우리 육체의 세계입니다. 육체의 세계는 먹고 입고 마시고 세상적으로 활동하나 기적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영혼은 4차원의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꿈을 가지고 있고 믿고 말을 통해 없는 것을 있게 하고 기적을 베풀고 영광을 성취하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영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잡혀 육신이 끌려 다니지만 큰 기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면 우리 생각 속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자유를 소유케 하십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그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으면 영이 그것을 이뤄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적을 믿게 되고 결국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우리가 바라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그 입술의 말을 통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생명을 바쳐 전하는 복음은 헛된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나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은 사기꾼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2013년 작년 한해 우리나라의 사망자 수는 26만 6500명입니다. 하루 평균 730명, 시간당 30명이 병원이나 집 그리고 거리에서 죽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 우리의 차례가 올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구원도 받지 못하고 살다가 지옥으로 쓰레기더미처럼 밀려간다는 것은 너무나 비참해서 생각하기조차 끔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므로 부활의 소망이 있는 우리는 남녀노소나 빈부귀천 할 것 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고통과 죽음이 다가와도 즐거히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승리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소망도 모두 끊어져 버림을 고백합니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긴 이 시간에 오직 참된 위로와 희망을 주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믿습니다. 부활의 능력과 권세로 모두 사망과 저주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물리쳐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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