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중략)…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린도후서 1장 1∼7절
어디에도 사랑과 위로가 없는 세상살이
헌신적인 위로는 큰 희생 감당케 하는 힘
교회는 주님의 참된 위로와 희망 얻는 곳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당해 살고 싶은 소망마저 끊어졌을 때, 세상과 마귀는 우리의 쓰러짐에 손뼉을 치며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오셔서 일으켜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지금도 성령을 통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기도해 주시며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시고, 그 받은 위로로 다른 고난당하는 사람을 능히 위로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위로는 언제나 상호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위로를 받으면 받을수록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통해 위로 받는 것은 우리도 위로자가 되어 고난당하는 사람을 도와주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1. 사랑이 없는 종교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위대한 설교를 듣고 방언의 은사를 활용하고 천사와 같이 말해도 교회에 사랑이 없고 얼음장 같이 냉랭하고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서 미래를 다 알고 모든 비밀을 알고 지식이 넘쳐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위로가 없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종교적인 장엄한 행사를 할지라도 사람들이 위로받지 못하면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상처입은 몸과 마음으로 교회에 와서 위로받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간다면 그 교회는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을 안고 교회에 와서 위로를 받고 변화를 받고 힘을 얻고 생기와 용기를 얻어서 나갈 수 있어야 그것이 온전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위로의 하나님이 계시고, 위로의 예수님이 계시고, 위로의 성령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만일 교회에 와서도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교회에 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는 매우 드뭅니다. 그렇게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였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던 하늘에 그가 기도하자 비가 내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선지자가 어떻게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공갈 협박 한마디에 형편없이 무너져 도망을 치고 좌절했을까요? 그것은 지나치게 과로를 해서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위로의 말이 아니고 공갈협박의 말을 듣게되니 무너진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과로하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위로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가 낙심해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이만하면 되었으니 내 생명을 거두소서”하며 하나님께 긴 탄식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낙심하게 되고 고통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충고나 꾸짖음이 아닙니다. 바로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쳐있는 엘리야를 꾸짖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천사를 보내셔서 어루만지셨습니다. “어루만진다”라는 말은 요사이 말로 “마사지를 해주었다”는 뜻입니다. 온 전신이 긴장되고 지치고 피곤하고 좌절되어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천사가 와서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 후에 떡을 구워오고 물 한 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고 잠을 자게 해주고 위로해 주고, 또 깨어나면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였더니 엘리야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 힘으로 엘리야는 40주 40야를 걸어서 호렙산에 이르렀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자기 죽이려는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서 호렙산으로 가던 중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는데, 그보다 훨씬 연약한 우리도 하나님께 위로를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2. 위로가 없는 가정
오늘날 가장 큰 위기는 바로 우리의 가정에 위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부간에도 이기주의가 너무 심합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고 말씀했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짐을 다 맡겨 버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짐을 다 맡겨버립니다. 그리고 서로 위로해야 될 것인데 서로 상처를 너무 많이 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말로써 상처를 너무 많이 주고, 남편도 아내를 너무 상처받도록 비방하며 몰아치는 일이 많습니다. 격려와 힘을 주는 대신에 욕을 하고 폭력을 사용하고 허물을 잡고 압력을 가하면, 그것을 당하는 사람은 더욱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를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부간에 서로 위로하지 않고 상처를 입히게 되면 가정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이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부부가 서로를 위로하는 가정이 돼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수많은 가정들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또한 대화가 사라진 부모와 자식 간도 큰 문제입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로 21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말씀했는데, 지금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치 않고 여러 면에서 부모를 대적하고 반역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낙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가까운 것이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있어 서로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집에 가면 아버지와 아들이 다투고 어머니와 딸이 싸워 큰소리가 떠나지 않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서로 이해와 동정이 아닌 비평과 비난을 하기 때문에 서로 위로가 없어서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육이 그러한 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현재의 교육은 인격이 없는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의 범절, 규모있는 생활, 공중도덕, 윗사람 공경하는 윤리와 도덕적인 교육은 없고 그저 돈만 잘 벌면 되고 세상적인 성공만 하면 된다는 교육만이 남았습니다. 마땅히 할 의무와 윤리와 도덕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되는데 부모들은 “출세하라. 이겨라. 남보다 돈 많이 벌어라.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강조하며 이 세상의 유익만을 취하기 위한 법만을 가르치고 온전한 인간됨을 가르치지 않는 인격 없는 교육이 자녀들에게 큰 시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까지 물질만능주의로 병들었고 그것이 결국에는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일이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부정적인 상황이 현재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위로는 이러한 것들에 물들어 사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켜 착실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해 마음을 치료받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들도 자녀들도 모두 세상에서 방탕하고 방향을 잃어버려 고통의 삶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도 필요하셨던 위로
예수님조차도 마음에 위로가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으므로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졌겠습니까? 예수님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스트레스를 견뎌내셨을까요? 그것은 마리아의 헌신을 통한 사랑과 위로가 마음속에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일주일 전 유월절 날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서 대접을 받으실 때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나드 기름은 굉장히 비싼 향유입니다. 그것은 처녀가 시집가기 전에 준비해서 지참금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 나드 한 근은 그 가치가 300데나리온입니다. 그 시절 노동자의 하루 노임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300데나리온이면 노동자 한 사람이 1년 내내받은 노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되는 액수입니다. 나드 한 근은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마리아는 시집가려고 준비하여 옥합에 담아놨던 나드 한 근을 그대로 가져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거기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흠모와 헌신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그러한 헌신에 예수님은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크게 소리치며 마리아를 꾸짖었습니다.
마리아의 기름 부은 것이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어 온 세상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그 모진 고난을 참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헌신적인 위로가 큰 희생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 남편은 가족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 아내는 가정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합니다. 위로를 받는 국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속에 이와 같은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가 없이 이 세상에서 살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헌신적인 마리아의 위로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4장 6절로 9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로한 사건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위로한 마리아의 헌신은 위대한 공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를 받을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받은 그 마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여 그들이 새로운 힘을 얻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4. 교회는 위로와 희망의 처소
많은 사람이 교회에 왔다가 어려운 고난을 당하면 마음에 상처입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럴 때에 지역장, 구역장이 심방해 주고 기도해주며 위로해 주면, 그 위로 때문에 다시 용기와 힘을 내서 교회에 열심을 다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위로와 희망의 처소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희망을 얻지 못하면 다른 어디에서 위로받고 희망을 얻겠습니까? 교회는 조직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상영하는 극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이 와서 변화를 받고 위로받는 곳이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 좌절과 절망 받은 사람이 희망을 얻는 곳입니다. 교회는 위로자 성령이 계시는 곳입니다. 성령은 바로 ‘파라칼레토스’ 즉, 또 다른 ‘보혜사’요 ‘위로자’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 곁에 와 계신 분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로 27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성령이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교회 오시면 우리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이와 같은 성령의 간구를 들으시고 위로의 능력을 베풀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위로받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서 위로 받을 곳이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음악을 통해 위로 받을 수도 있고, 세상의 좋은 예술품과 공연을 통해서 위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잠시 잠깐의 위로일 뿐입니다. 마음의 항구적인 위로의 샘이 솟아오르는 곳은 오직 교회뿐입니다. 교회에 와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통하여 마음에 치료와 위로와 소망을 받고 나면 우리에게는 인생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우리 마음이 치료받으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장 6절에서 7절은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처럼 위로가 있어야 고난을 견딜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위로가 있고 희망이 있으면 참을 수가 있습니다. 희망이 있고 위로가 있으면 오늘의 고난을 힘차게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지만 희망이 없고 위로가 없으면 오늘의 고난은 절망이 되고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위로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에서 위로받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움 받는 것은 다른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은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위로가 필요하셨습니다. 세상에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독한 사람, 죽어 가는 사람에게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우리만이 그러한 위로를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처처에 상처와 아픔과 고통이 쌓이고 또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들 겉으로 웃으나 속으로는 피를 흘리고 있는 입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마음을 열어보면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쌓여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들에게 온전한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위로의 근원을 알고 있는 우리가 고통의 세상의 참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그 은혜와 복음을 전함으로 상대방을 치료하고 고쳐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우연히 왔다 우연히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귀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가 없이는 점점 삭막해져가는 세상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있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위로가 없으면 세상은 더 많은 폭력과 살인 그리고 자살이 일어나 끝없는 고통이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로받지 못하면 극단적인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며 힘을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시편 103편 1절에서 5절은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합니다. 바로 이러한 위로의 처소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시고 심판하여 허물을 들춰내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벌거벗겨 창피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입히시고 덮어주고 허물을 사하여 변화시키시고 위로하기 위해 부르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열심히 오셔서 위로 받기를 간구하십시오. 참된 위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희망을 달라고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희망을 주시고 참된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희망과 위로가 가슴에 가득하면 집안이 화평해지고, 회사의 분위기가 좋아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분위기를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가 우리에게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주님의 위로가 없이는 더욱 살벌해진 이 세상에서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희망과 위로를 주시고, 위로자 성령을 보내사 우리 마음속에 위로의 역사를 베풀어 아버지의 품에 품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족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부모의 사명, 자녀의 사명, 국민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상처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서로 위로하고 허물을 덮어주도록 도와주시고 서로 격려하도록 도와주소서. 무엇보다 살맛나는 향기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위로자 성령께서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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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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