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로다” 시편 121편 1∼2절
인간은 아무 도움없이 혼자 살수 없어
고난의 산 아닌 도움의 하나님 바라봐야
입술의 고백대로 창조적인 희망 성취돼
세상을 살면서 남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살 수 있으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와 형제 도움이 있고 스승의 도움이 있고 사회 선배의 도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도움의 손길을 통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두손들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인가? 그런 어려움에 처해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못할 때 바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 어느 곳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바라봄의 법칙은 우리 삶속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네게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만 바라보고 자기의 실력과 비교해 보아서 감당할 수 없을 때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미리 겁을 집어먹고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염려해도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나 크게 할 수도 없고 염려한다고 해서 환경을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사실은 염려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염려를 중지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우리는 밤새도록 염려하고 잠을 못자고 밥을 못먹고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릴때가 많습니다. 그때는 염려를 대신 짊어져 주시는 주님을 간절히 찾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둘째로, 염려는 불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면 염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가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6장 31절로 32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용사 조지 뮬러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고,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믿으면 염려는 사라지고 또 염려가 오면 믿음이 사라지고 둘 중에 하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염려할 이유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실 때 그 말에 귀를 기울여서 담대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 세상의 염려는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은 22절에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기록합니다. 마음에 염려가 있으면 아무리 설교를 듣고 권면의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시넝쿨같이 마음을 덮어서 결실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을 맡겨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말씀이 마음에 심어지고 결실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고통스럽고 나쁜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므로 언제나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믿음으로 담대히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임재하십니다. 하나님께 염려와 근심을 맡기면 좋은 것은 더 좋게 해주시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주시고 합동하여 유익이 되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마음의 바탕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한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으니 모든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 스스로 강하고 담대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바라보라
시편 121편 1절로 2절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든지 둘 중에 하나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염려나 근심을 바라보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든지, 나의 고통을 바라보든지 고통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든지,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를 바라보든지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는 주님을 바라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눈을 들어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든지 바라보면 그것에 끌려가고 그것이 우리 가슴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요? 믿지 않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의 수단과 방법과 능력으로 감당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일을 감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에 의지하므로 우리를 이기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의 대상만을 바라보면 용기가 사라지고 분별력을 잃어 목표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 가운데 서면 마음에 확신을 얻고 담대하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주야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기고 피흘리게 할 때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서 용서와 의의 방패가 되어 주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많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 마귀의 공격으로 힘을 잃었을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곳에서 용서와 의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악을 다 사하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의를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지 못해 마귀의 공격을 받은 허물진 인생으로 용기와 힘을 잃었을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주님께서 용서와 거룩함을 옷 입혀 주시고 그를 통하여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의 복도 받고 성령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 우리가 죽음을 바라보면 두려워하고 절망합니다. 누구든지 결국 외롭게 홀로 죽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홀로 죽지 않고 우리와 같이 죽음의 터널을 지나서 천국으로 데려다 주실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의 자리에 반드시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붙잡고 사망을 지나서 천국 영광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활과 영생 그리고 천국을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하여 바라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이미 사망을 이겼노라.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거처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거처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근심 많고 고난 많은 세상의 거처와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바라보고 용서와 의를,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치료와 건강을, 아브라함의 축복과 은총을, 영생 복락을, 마음속에 단호하게 받아들이고 주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라보고 주장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바라본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되 넘치도록 충만히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께서 가져오는 변화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놀라운 변화를 창조하십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성령이 운행하시자 아름다운 세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령은 변화를 창조하는 영이시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두움을 빛으로, 무질서를 질서로, 가난을 부요로, 고통을 즐거움으로, 더러움을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끊임없이 변화의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온전히 믿을 때 그것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4장 6절로 7절에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야훼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라고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힘으로 안되고 능으로 안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좋은 변화를 창조하시는 성령이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생각이 달라지게 만듭니다. 성령은 죄의 포로에서 용서와 의의 사람으로, 허물 많은 사람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병든 사람에서 치료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요 부요한 사람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시며 구원이 없는 사람에게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으로 감사와 찬양을 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5절로 6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의 생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오시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거대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늘 불안, 초조, 절망, 좌절, 원망, 시기, 분노, 질투,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생각으로 꽉 들어차면 성령이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청소하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하고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보혈로써 우리 마음을 다 청산해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성령으로 생각이 변화되면 변화된 생각대로 우리의 운명과 환경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주십니다. 요엘 2장 28절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꿈과 환상이란 현재의 일이 아니고 내일의 일입니다. 현재 일을 꿈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일 잘될 것, 내일 새 집으로 이사갈 것, 내일 사업을 시작할 것, 내일 치료받을 것, 이처럼 우리가 내일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가지는 것이 희망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십니다.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오늘 절망해버리면 내일은 정말 캄캄하고 절망적입니다. 성령은 내일을 심어주십니다. 내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성령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 꿈을 심어주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령은 모든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역사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령충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믿음과 담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인간의 힘으로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을 때 주님을 바라보고 성령께 의지하면 상상을 초월한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하며 전진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임하시면 그런 담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믿음으로 모험을 할 수 없으면 기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적은 모험이 있을 때 따라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기지 못하지만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서 우리도 이미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꿈꾸고 믿고 담대하게 입술로 시인하며 전진해 나가면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말이 달라져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바라보고 감사하고 명령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으면 “영혼이 잘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범사에 잘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강건하게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하며 감사로 받고 그것에서 그치지 말고 “영혼이 잘될지어다. 범사가 잘될지어다. 강건할지어다”라고 입술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적인 감사만 할뿐 아니라 창조적인 명령도 내려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주신 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인정하며 감사하고 그 다음에는 담대히 명령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능력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으므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말을 입술로 끊임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바라보는 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고난의 산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낙심하고 불행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또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긍정적이 되고 희망을 갖고 용기와 믿음을 갖고 담대히 말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행복하고 기쁨과 믿음으로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걸머지도록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사랑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 편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 버림받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서면 예수님도 우리 편에 서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십시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아름다운 별들이 반짝이는 것처럼 우리에게 희망이 반짝이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결국은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매일같이 바라보는 것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것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긍정적인 것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 지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희망찬 꿈과 믿음을 갖고 입술로 시인하며 바라보면서 나아가게 도와주옵소서. 모든 성도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주위에서 다가오는 흑암의 세력을 극복하고 나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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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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