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카카오링크 보내기 버튼
죽을 각오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2012.01.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그들이 느브갓네살 왕에게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중략)…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장 8∼18

 

 

주께 온전히 맡긴 신앙, 일사각오 믿음으로
절대 신앙 절대 충성 절대 헌신 각오하면
하나님께서 동행해 평안과 축복을 부어주셔


 하나님을 믿을 때 내 목숨을 다 해서 주의 말씀을 의지하고 일사각오하고 내어맡기면 하나님이 맡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 결단은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단호한 결심입니다. “하나님께 내어 맡겼다가 잘못되면 내가 죽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내가 살 것이다” 이렇게 분명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어찌하든지 살려고 발버둥 치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각오하고 의지하면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파도가 잠잠해집니다.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때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다가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포로지에서 바벨론 왕이 총애했던 유대인 엘리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아주 신앙 좋고 영리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미리 간 탁월한 정치인 다니엘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이방 왕에게도 인정을 받아 국무총리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이 다니엘의 천거를 받아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제 바벨론의 각 도를 지배하는 높은 지위를 얻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브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아니하고 믿지 아니한 왕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정치적인 힘을 얻은 이방 왕들은 꼭 우상숭배를 하게 됩니다. 바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라평원에 왕의 금신상을 세우고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모든 사람이 엎드려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만 요동없이 우뚝 서 있습니다. 즉 세 청년은 왕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사각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축복만 받을 뿐 아니라 필요하면 죽기라도 각오했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왕이여, 왕이 우리를 그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을 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요, 만일 안 건져 주실지라도 우리는 절하지 않겠나이다” 이는 놀라운 신앙의 결단입니다. 건져주실 걸 알면 어떤 시련이라도 참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안 건져주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우리의 의심이요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단호함을 보십시오. 왕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얼굴색이 변하지 않습니다. 죽기로 각오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이제 왕이 진노해서 가장 용감한 특전 용사들을 불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었습니다. 그리고 풀무불을 칠배나 뜨겁게 하여 엄청나게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들을 던져 넣겠다고 근처에 간 군인들이 불에 타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던져 넣은 후 왕이 보니 묶어 놓은 밧줄만 타버렸고 세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왕이 눈을 닦고 보아도 네 사람인데 그 네 번째 사람은 얼굴이 찬란하게 빛나고 영광스럽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사자는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믿음과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세 사람을 건지러 불속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 후에 왕이 깜짝 놀라 그 불구덩이를 향해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여 일어나 나오라”고 외치자 그들이 나왔는데 왕이 그들의 옷을 만져 보고 냄새를 맡아 보고 머리카락을 만져보아도 불탄 자국도 없고 불이 스쳐간 흔적도 없습니다. 왕이 그것에 놀라 깨어져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이 천하에서 자기를 믿고 목숨을 내어 던진 사람을 위해 이런 기적을 행한 신은 없었다. 이제 내가 명령을 내리노니 내 나라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에게 반역되는 말을 하거나 만용스러운 말을 하는 사람은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만들어라!” 왕이 변화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사람을 더 높여서 지도자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 세사람이 살기로 작정했더라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 절대 충성, 절대 헌신을 하니 자기들만 구출 받을 뿐 아니라 그 이방 왕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사망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죽을 각오하고 주님을 믿으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고 이것이 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하고 섬기고 그에게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우리가 못이길 리가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타협 없이 죽을 각오를 하면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2. 다니엘의 신앙

 메데와 바사왕 다리오 때 총리 대신으로 있었던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다니엘에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작정을 했습니다. 사람은 남이 잘되면 밤잠을 못자고 배가 아프지 않습니까? 결국 다른 신하들이 다니엘을 참소하려고 계략을 세워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왕이여, 왕이 이 나라에서 최고가 아닙니까? 왕이 높임을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독재자는 자기 칭송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왕을 더 높이고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지금부터 선포를 하십시오. 30일 이내에 왕 이외에 다른 어떠한 신에게 예배하든지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 포고를 내리십시오” 왕이 “그래 좋다. 그렇게 하라!” 그러니 당장 포고문을 만들어 왕의 이름을 적고 인장을 찍어서 온 전국에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것을 알고도 집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향해 동편 창문을 열어 놓고 하늘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반드시 참소를 당하여 사자 굴에 뛰어 들어갈 것을 알고서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니엘은 일사각오하고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다니엘을 참소하려던 사람들이 얼씨구나 좋다고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비디오로 찍어 가지고서 왕에게 보고했을 것이지만 그 당시는 비디오가 없어도 엄청나게 떼를 지어가서 참소하니 왕이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느꼈습니다. 왕은 다니엘을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 말을 거역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결국 다니엘을 잡아들여 굶주린 사자굴 속에 던져 놓고 굴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니 왕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아니하고 음식을 끊고 음주가무를 금지하고 슬퍼했습니다. 왕은 밤새도록 다니엘이 살아나기를 마음속으로 소원하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사자굴 앞에 가서 울음 섞인 소리로 “다니엘아! 다니엘아! 네가 평소에 그렇게 섬기고 존경하던 하나님이 너를 건지셨더냐?” 다른 사람들은 전부 속으로 웃었습니다. ‘왕이 미쳤다. 미쳤어. 환장을 했지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 굶은 사자가 다니엘을 내버려둘 턱이 있느냐. 뼈까지 다 으스러지게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귀신인지 사람의 소리인지 사자굴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어서 나를 지켜주므로 사자의 입에서 나를 건지셨나이다” 하나님을 위해 죽으려하면 삽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헌신한 그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 것입니다.

 왕이 당장 사자굴 안에 있는 다니엘을 끌어내라고 해서 끌어내어 살펴보니 사자가 와서 핥은 자리도 없었습니다. 왕이 그를 참소하던 신하들을 가족과 함께 묶어서 사자 굴에 던져 넣으니 덤벼들어 뼈까지 으스러뜨려 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자들이 실수를 해서 다니엘을 안먹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와서 사자의 입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역치 아니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로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것을 우리가 확실히 믿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믿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헌신적인 기도를 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E. M. 바운즈는 「기도의 불병거」라는 책에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기도에 게으른 사람은 믿음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결국 기도도 잃어버린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이 퇴보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느끼며 그분의 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선포 이후에도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 다니엘과 함께 하셔서 그가 굶주린 사자굴에서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지켜주신 것입니다.

 

 3. 우리의 신앙 결단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손에 맡기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일단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값주고 사신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샀고 과거를 다 청산하고 미래의 영원한 삶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우리 인생을 통째로 내어 맡겨야 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모세를 광야에서 부르셨을 때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서 ‘신발’이란 행위의 주권을 말합니다. 즉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 결정하는 나의 주권을 하나님께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완전히 맡기고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하고 행위를 주님께 일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37편 5절로 6절에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로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가 신발을 벗어 하나님 앞에 두고 우리의 삶의 행사를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면 하나님께서 대신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순종’과 ‘믿음’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온 인류의 죄악을 다 짊어지고 처참하고 가혹하고 몰인정하게 십자가에 매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버림당해도 힘들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하는 것은 더 힘들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묶는 자에게 순순히 손을 내주고 때리는 자에게 등을 내밀어주고 십자가에 양손과 양발이 박혀서 여섯시간 동안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리면서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했던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기도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바로 이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됩니다.

 유대인들이 바사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때에 왕이 왕비를 간택할 때 에스더가 유대인이라는 정체를 감추고 왕비를 신청해서 왕비가 됐습니다. 대제국의 왕비가 되었으니 그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자리겠습니까? 임금이 아내를 얻을 때 간택한 사람이니 에스더는 보통 미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에스더의 삼촌은 모르드개였습니다. 그는 왕궁의 문지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만이라는 총리가 왕궁에 왔다가 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엎드려 절하는데 모르드개는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하지 않는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만은 마음에 앙심을 품고 모르드개만이 아니라 유대인 전부를 다 잡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허락을 받고 유대인 전부를 다 죽이게 한 날짜를 정해서 선포를 하고 모르드개를 죽일 나무를 자기 정원에 세웠습니다. 이제 유대인 전체가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삼촌인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왕비가 되었지만 이제는 숨길 수가 없다. 다른 사람 다 죽는데 너라고 안 죽을 턱이 있느냐. 왕에게 가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호소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왕이 부르지 않는데 나가면 왕비라도 죽임을 당합니다. 왕이 불러야만 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제 일사각오를 결심한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6)고 전했습니다. 왕에게 나갈 때 에스더가 애교를 가득히 채우고 나가야 될 것 아닙니까?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 살라고 발버둥을 치면서 마음이 창백하게 되어서 벌벌 떨면서 나가면 왕이 그 얼굴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에스더가 ‘나는 죽을 각오가 되었고 죽으면 죽으리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나가니 마음이 편안하니까 얼굴에 빛도 나고 만연에 희색을 가지고 아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상황이 역전되어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하만이 자신이 준비한 창대에 자기와 가족들이 매달리고 유대인들이 구출을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에스더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나갈 때 그와 같은 각오를 가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8장 35절에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살려고 할 때 마음에 두려움이 있으나 죽을 각오를 하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19절로 21절에 바울은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기록한 것처럼 그가 그렇게 매를 많이 맞고 여행에 위협을 많이 당하고 나중에 로마에 사형선고를 받고 끌려 갈 때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것은 이런 마음에 단호한 각오를 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설득해도 안되고 협박해도 안되니 달리 방법이 없어 결국 사도 바울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우리도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마음의 각오를 하면 강하고 담대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말씀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1장 7절로 8절에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기록한 것처럼 강하고 담대하여 하나님 말씀을 시행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같이 하셔서 형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려고 하고 믿음을 편법으로 사용하면 담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해에 분명한 목표와 꿈을 가지고 뒤돌아보지 않는 믿음과 헌신 그리고 절대 믿음으로 자신을 던져 버리면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자꾸 오른편도 바라보고 왼편도 바라보고 뒤도 돌아보고 이래하면 내게 이익이 있을까, 저래하면 내게 이익이 있을까 그렇게 타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불안과 공포가 끝나지 않습니다. 목표를 바라보고 마음에 꿈을 갖고 믿음과 헌신으로 단호하게 나가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아니하실 지라도 순종하겠다”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면 말할 수 없이 감사하겠거니와 응답 안해주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하며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죽으면 죽으리다”는 마음의 자세,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살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 가만히 있어도 죽습니다. 자꾸만 살려고만 하면은 마음이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장에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나님 뜻대로 죽으면 영광이다’라고 생각하고 일사각오하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결국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죽으면 죽으리다”는 각오를 가지고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어떠한 위기와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을 지켰던 믿음의 선진들처럼 우리들도 “죽으면 죽으리다”의 일사각오의 신앙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오니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시고 힘주셔서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