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창세기 39장 10∼20절
인간 사회도 냉혹한 ‘정글의 법칙’이 존재
꿈을 품은 사람은 늘 고난과 핍박 받지만
인내와 기다림의 십자가 지면 반드시 열매 맺어
인간 사회는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씨줄 날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처를 어떻게 해야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동물의 왕국’이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동물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정글의 법칙’에 큰 관심을 기울여 보았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도 계급 차별이 있습니다. 왕초가 있고 그 다음 부하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라는 부하들은 왕초에게 도전하고 왕초는 부하들을 다스리고 억압하다가 늙고 힘이 없으면 쫓겨나게 됩니다. 쫓겨난 동물은 결국 무리에서 사라지고 혼자 외롭게 정글 속에 살게 되는데, 약육강식의 법칙이 바로 ‘정글의 법칙’입니다.
인간사회도 이와 같이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에는 언제나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아 마음에 깊은 원한과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집단에서 쫓겨나서 멸시와 천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그것을 치유하지 못해서 슬픔을 마음속에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요셉이 당한 억울한 일
세상에 살면서 꿈을 품은 사람은 언제나 고난과 핍박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꿈을 품은 사람을 죽이려 하지만 일단 가슴에 꿈을 품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 속에 4차원의 영성인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은 3차원적인 현실을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요셉이 그와 같았습니다. 자신의 꿈을 질투한 형들에게 억울하게 들에서 잡혀 발가벗김을 당하고, 마른 우물에 던져졌다가 아라비아 상인에게 종의 값을 받고 팔렸습니다. 그는 17살에 아버지와 가정을 떠나 멀리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 왕의 경비대장 보디발의 집 하인이 됐습니다. 그 집에서 일을 하는데 꿈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형통함이 따르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있으니 보디발의 집이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하니까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보고 마음에 흑심을 품고 자꾸만 꾀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 그 꼬임에 빠지지 아니하고 저항했습니다. 하루는 대낮에 종들이 모두 일하러 갔고 보디발의 아내가 나오다 보니 요셉이 대청마루에 나와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때다’싶어서 달려들어 그를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놀라서 자신의 옷을 벗어놓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 순간 요셉을 흠모하던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변한 보디발의 아내가 고함을 쳤습니다. “사람 살려라” 밭에 나가 있던 종들이 돌아오고 주인도 돌아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옷을 들고 흔들면서 “저 놈이 나를 겁탈하러 왔다가 내가 고함을 치니까 옷을 벗어 놓고 도망쳤다”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변명을 할 수도 없고 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증거로 옷은 남아있으니 무슨 말로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요셉은 평생 나오지 못하는 시위대 뜰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전히 그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요셉은 마음속에 꿈을 품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우리보다 위대한 점입니다.
그 당시 감옥에 있으니 얼마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대소변을 감옥에서 해결하고 빵조각 하나 던져 주면 받아먹는 비위생적인 곳에서 2년이 넘도록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왕궁에서 사람들이 와서 요셉을 찾았습니다. 요셉이 나가니 갑자기 이발을 시키고 옷을 입히고 왕궁수레에 태워 왕에게로 갔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누구도 해석하지 못한 왕의 꿈을 듣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왕이 무릎을 치고 기뻐하며 자기 반지를 뽑아서 끼워줬습니다. 그리고 수레에 태우니 모든 관리와 백성들이 요셉에게 엎드렸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도 꿈을 버리지 않으면 꿈이 결국 성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삶이 고달퍼 괴롭고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 상태에서도 꿈을 갖고 있으면 꿈이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찬 꿈을 가슴속에 품고 포기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환경이 다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럽고 쓴물이 넘쳐나는 환경일 수가 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 사이를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꿈을 가질 수 있도록 마련해 주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우리가 꿈을 가질 수 있는 터전이 됩니다. 요셉이 13년 동안 그 험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꿈을 버리지 않았을 때 꿈이 요셉을 이끌어 갔습니다. 요셉이 나중에 형들에게 말하기를 “형들은 나를 해하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을 영광이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창 50:20)고 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으면 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오히려 선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의 장애를 지닌 복수 장애자였지만 장애인으로서 처음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또 작가와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며 ‘빛의 천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련은 있으되 꿈이 없는 것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시련은 다가옵니다. 헬렌 켈러에게는 눈으로 못보고 귀로 못듣는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꿈을 버리지 않으니까 꿈이 그녀를 역사에 남는 인물로 만든 것입니다. 시련은 있어도 꿈은 버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조동에서 천막치고 가마니 깔고 개척할 때 마음에 잊어버리지 않는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려 비쩍 마르고 옷 한 벌 겨우 입은 열네 살 먹은 소년이 한 겨울에 여동생과 함께 손을 잡고 우리 천막교회에 왔습니다. 잘 보니 그 소년은 시력을 잃은 장애인이었습니다. 눈뜨기 위해서 천막교회에 왔는데 내가 아무리 안수해도 눈이 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너무 불쌍히 생각돼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육신의 눈은 감겼지만 영의 눈은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더니 후에 하나님께서 그 꿈을 통해서 그 사람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나중에 대통령 참모까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강영우 박사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나는 그의 과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막교회의 구석에서 여동생과 함께 쭈그리고 앉아있던 그도 꿈이 있으니까 그 꿈이 그를 붙잡아 이끌어서 미국 대통령의 참모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아들들은 첫째는 외과 의사로 둘째 아들은 최근에 대통령 비서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을 통해 보았습니다.
헬렌 켈러가 말한 것처럼 시련은 반드시 다가오지만 꿈을 갖지 못한 것이 참된 비극입니다. 마음속에 십자가 구속의 꿈을 담고 있으면 그 꿈이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고난은 있으되 꿈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당하신 억울한 형벌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인간을 구원하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 신분의 고하를 불구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좋은 일이 생겨났었습니다. 사람들은 좌절과 절망에서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하며 환영하고 고함을 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그 발 앞에 깔고 하던 그 군중이 일주일 후에는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아라! 못 박아라!”고함을 쳤습니다. 한주일 전에 그렇게 찬양을 하던 그 군중이 순식간에 악마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높여 고함쳤습니다.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 정말 억울하다”하는데 예수님이 당한 이 사건은 형언할 수 없이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그 억울한 일을 당하고 무덤에 들어가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흘 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무의미한 죽음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짊어진 은혜의 십자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울하게 못 박았지만 하나님은 배후에서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청산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었으므로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죽음을 멸하시고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또 성령을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영생복락을 주시는 희망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종교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영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3. 내가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을 때
내가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요? 우리는 요셉과 예수님을 통해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꿈을 버리지 않고 희망을 갖고 있으면 반드시 영광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환난과 고통은 그 후에 영광과 승리를 반드시 가지고 오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이익 되는 것도 손해되는 것도 축복이 되는 것도 저주가 되는 것도 우리가 끌어안고 참으면 결국에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그냥 인생이 아니라 비빔밥 인생인 것입니다. 비빔밥에 보면 콩나물도 있고 고추장도 있고 파도 있고 나물도 있고 마늘도 있고 밥도 있고 온갖 것 다 있습니다. 그러나 섞어서 먹으면 맛이 있거든요. 결국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비빔밥처럼 만들어서 우리 보기에는 성공과 실패, 고통과 즐거움이 함께 비빔밥이 된 것 같아도 종국적으로는 맛이 있고 영양분이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을 예비해 주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결국에는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생각하고 성급하게 말하고 성급하게 행동해서 “다 집어치워 버려라”하며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손 털어 버리면 반드시 낭패에 처합니다. 오래오래 참고 또 오래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조금 참고 또 좀 더 참고 또 조금 더 참고 나중에 한계점에 도달할 때까지 참고 있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난 뒤에는 반드시 소망이 옵니다. 좋은 일이 생겨날 것이라는 소망이 옵니다. 환난만 있고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은 죽음의 시작이지만 소망은 생명의 시작인 것입니다. 환난을 참고 기다리면 환난은 결국 소망을 낳게 됩니다.
영국의 격언에 보면 “인내와 기다림은 희생 이상의 큰 일을 한다”고 했으며, W. 벤은 말하기를 “인내와 신앙은 산이라도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시인이요 평론가 사무엘 존슨은 “위대한 일은 강인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내와 기다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하고 믿고 기다린다는 것은 큰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인내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해 주시기를 기다리는지 못 기다리는지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인내와 기다림이 있으면 그 뒤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보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삶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으므로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해 가슴을 치게 될지라도, 사람들이 다 나의 억울함을 동정하지 않고 돌봐주지 않을지라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편에 서계십니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눈 딱 감고 믿고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2010년에 ‘올해의 부부상’을 받은 이상택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상은 전적으로 아내 황영희 씨의 헌신과 인내 덕분”이라며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렸습니다. 두 분은 대학 동창으로 만나서 결혼해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결혼 5년 째, 시부모님과 식구들을 모시고 살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시어머니가 아들 부부의 신앙을 미워하며 더구나 예수 믿는 며느리를 무척 미워했었습니다. 황영희 씨는 8명이나 되는 식구를 봉양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신앙생활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황영희 씨는 시부모님은 물론 남편에게 조차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시댁 식구들을 섬겼습니다. 그녀의 인내가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내 아들이 죽어도 예수는 안 믿는다”고 하던 그 시어머니가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고 며느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전도하고 섬겨준 것을 감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내의 신앙으로 온 가족을 전도한 두 사람은 이제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려고 그 꿈을 품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하며 감사하니 결국에는 넘치는 축복으로 하나님이 채워 주시지 않습니까?
삶속에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부정적이 되면 더 큰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원한을 빨리 십자가 밑에서 씻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도 있지만 잊어버려야 될 것도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잊어버려야 됩니다. 남에게 받은 은혜는 물에 새기듯이 잊고 남에게 잘못 대우 받은 원한은 돌에 새기듯이 마음에 새기고 “두고보자! 너 잘되는 것 한번 보자!” 그렇게 이를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고통스럽고 남도 고통스럽고 삶이 어둡고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삶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부정적이 되면 그것이 끝없는 시련과 고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긍정적이 되고 건강한 모습을 생각하고 꿈꾸며 믿음과 소망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탄식은 버립시다. 차라리 어리석은 자가 됩시다. ‘저 사람이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좋으니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감사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견딥시다. 그러면 좋은 날이 반드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몰이해를 당했다고 원통하고 탄식할지라도 이것을 알아주시고 합력하여 유익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기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어 우리가 좋은 열매 맺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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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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