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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인간관계
2011.08.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9∼14절

 

태초부터 갈등과 대결은 인간의 숙명
십자가의 능력으로 마음의 병 치유해야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쓴물을 달게해


 인간이 사는 세상은 항상 갈등과 대결이 끊이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은 하와를 원망하고 하와는 아담을 원망하면서 부부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낳은 가인과 아벨도 형제간에 갈등과 미움으로 말미암아 형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 죽인 것입니다. 인간은 갈등과 대결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갈등과 대결을 극복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간절히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의 갈등과 대결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1. 미움과 원한에 짓눌린 마음


 마음이 병든 사람이 어떤 현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십시다. 마음에 병든 사람은 모든 것을 미움과 원한의 색안경을 쓰고 봅니다. 미움과 원한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모든 사람이 부정적이고 비평적으로 보이며 악의에 꽉 들어찬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하는데 마음이 악한 사람은 미움과 원한과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사람들의 부패한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 북부의 한 마을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버린 부인에 대한 복수로 남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가지고 와서 던졌습니다. 자기 부인도 그곳에 없고 자기 자식들도 없는데 괜히 남의 결혼식에 가서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 폭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6월에 한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자다가 갑자기 집을 나간 아내 생각에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 자기 아내하고 닮은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잡아서 죽여버렸습니다. 그녀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우발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2008년 논현동 고시원의 방화 및 살인 사건을 비롯해서, 자신의 분노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묻지마 살인’이 너무나 많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미움과 원한에 마음이 짓눌리면 모든 것을 색안경 쓰고 보면서 부정적이고 비평적이며 악의에 꽉 들어찬 생각과 말을 합니다. 심지어 살인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해와 동정과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지 않고는 도저히 안됩니다. 교훈을 하고 가르치고 부탁을 한다고 악한 마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성령으로 변화를 시켜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안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대신 살아주고 주인으로 앉아있을 때 내가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와 동정과 사랑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변화를 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리 사랑을 해도 안되고 용서하려고 해도 안되고 변화가 안되는데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마음에 소원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성령이 은혜를 주셔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로 24절에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사람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변화를 받기 원하고 이기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반드시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새 것이 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원리인 것입니다. 옛사람이 의식과 형식만 가지고서 갈팡질팡하는 것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새로워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자기만 정의롭다고 함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만 정의롭고 이웃은 악하다고 정죄합니다. 모든 일에 ‘자기가 옳다. 남은 다 나쁘다.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은 전부다 내 원수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병든 마음입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다.

 요한복음 8장 3절로 11절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치고 하는 말이 “예수님, 이 여자는 음행 중에 우리가 잡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행음하는 자는 잡아서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자꾸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을 적다가 허리를 펴고 그 사람들 중 큰 사람부터 작은 사람까지 한사람씩 눈을 맞춰보고 난 다음 “당신들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돌을 쳐서 이 여자를 먼저 치시오”라고 말씀하신 후 허리를 굽혀 또 손가락으로 적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적었는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적었다고 확신합니다. 손에 돌을 쥐고 온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깨 너머로 적은 십계명을 보고 모두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돌을 들어 여자를 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이 그 돌을 들고 자기들을 쳐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남을 정죄하면 자기도 정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씩 돌멩이를 버려두고 슬며시 모두 나가버리고 난 다음 한참 만에 예수님이 허리를 펴서 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고 “여자여, 너를 정죄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여자가 “예수님,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더 이상 죄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정죄하기 위해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살리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이웃을 정죄하고 죽이고 짓밟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죄치 않고 짓밟지 않고 어찌하든지 용서와 사랑으로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귀는 나쁜 마귀지만 예수님은 좋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마귀와 연합되어서 남을 정죄합니다. 남을 살리려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꼭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지요? 누가복음 18장 9절로 14절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이 성전에 기도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떼먹고 죄를 지은 세리도 같이 기도하러 왔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 앞에 서서 가슴을 펴고 “하나님 날 좀 보십시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세상 죄인들처럼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르게 삽니다. 지금 저기서 기도하는 저 세리와 같이 남의 돈 횡령하지 아니하고 더럽게 인생을 살지 않고 깨끗하게 의롭게 살았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 살려 주시옵소서!”하며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시기를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입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마땅히 바리새인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입고 세리는 정죄를 받아야 될 것인데 주님께서는 “저들이 기도를 마치고 나갈 때 바리새인보다도 이 세리가 하나님 앞에 더 의롭다함을 입고 나갔다”그리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겠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의롭고 거룩하고 참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눈으로 볼 때는 죄투성이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니까 의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심판받았지 않습니까? 우리 죄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죄 많은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앞에 평생에 한번도 죄를 안지은 사람처럼 취급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의’입니다. 조금이라도 죄가 있으면 의롭지 못합니다. 오늘날 그러한 의로움을 얻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님의 피 이외에는 우리를 의롭게 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로 10절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제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짊어지고 몸 찢기고 피흘려 십자가에 죽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남을 해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 아니고는 아무리 의롭게 행한다고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고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3. 율법 제일주의로 나가는 사람

 마음이 병든 사람은 율법 제일주의로 나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율법으로 판단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율법의 척도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서 판단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남을 율법으로 판단하면 자기도 율법 하에 있기 때문에 저주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9절로 20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행하여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을 보면 전부 죄만 보입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이 깨끗하게 화장시켜 줍니까? 얼굴에 때가 묻었으면 거울이 씻어 줍니까? 옷이 찢어졌으면 거울이 찢어진 옷을 바로 고쳐 줍니까? 거울은 우리의 잘못만 들추어내지 고쳐주지 않습니다. 율법은 거울입니다. 율법을 들여다보면 내 잘못만 보이지 나에게 용서와 의의 능력을 주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율법주의로 사는 사람은 자기도 저주받고 정죄하는 사람도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에게 내리는 정죄와 심판이 자기에게도 적용됨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로 5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합니다.

 남에게 내리는 정죄와 심판이 자기에게도 적용됨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은 완전하기를 원하면서 자기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 모두다 용서와 이해와 동정이 필요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동정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용서와 이해와 동정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을 찾으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4.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충고를 거부함

 마음이 병든 사람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충고를 미워하고 거부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줘도 안 듣습니다. 자기 말만 하고 자기 고집만 부리고 자기만 옳다고 합니다.

 잠언 12장 15절에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했는데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권고해도 권고를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제일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권고를 해도 오히려 미워하는 것입니다.

 잠언 27장 5절로 6절에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것은 주위에 있는 어떠한 친구를 사귀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부하나 친구가 아부를 하고 자꾸 부정적인 말로써 귀에 속삭이는 사람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바로서지 못합니다. 정확하게 보고 말을 해줘야 되고 귀에 듣기 좋은 말만 갖다주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문제는 주위에 아부꾼들만 모아놓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게 아부하는 사람의 말만 듣고 충고하는 사람의 말은 안듣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로 23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아부를 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하듯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부는 처음 듣기에는 좋은 것 같으나 나중에 독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참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진실한 말을 가장 잘해줄 사람이 가정에 아내인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진실한 말을 하지 아부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진실한 이야기를 하지 아부하지 않습니다. 별로 좋지 않아도 이웃 사람은 “아∼잘났다. 제일 미인이다. 참 맵시가 좋다”라고 합니다. 그 말은 굉장히 듣기 좋습니다. 남편은 “너무 잘난체하지 말라. 별로 잘나지 못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 말은 듣기 싫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뒤돌아보면 내게 와서 아부하는 것은 귀에 듣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내게 와서 참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마음이 생기니 고약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난 다음 올바른 판단을 해야지 아부하는 말과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따르고 싫은 말과 충고하는 말은 미워한다면 수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을 잘못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인생에 고달픈 삶을 살게 됩니다.

 미움과 원한과 대결의 쓴물을 달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된 관계를 청산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오해, 미움, 분노를 중화시키는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수르광야에서 나뭇가지를 쓴물에 던져 달게 한 것처럼 쓴물이 가득한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던져서 끌어안으면 쓴물이 달아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가 용서와 의와 사랑으로 달라질 힘이 없습니다.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오늘 용서하십시오.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예수님 앞에서 오늘 이 시간에 다 잊어 버리십시오. 우리는 좋은 일은 기억하되 나쁜 일은 빨리 보혈로 씻고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항상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살면서 미움과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살므로 수많은 슬픔과 고통이 우리 삶 속에 다가옵니다. 이처럼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시간에 우리 주님 앞에 고개를 숙였사오니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쓴물을 달게 만들어 주시옵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가득차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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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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