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 10장 38∼39절
이스라엘 민족은 고난과 기적 통해 순종 배워
예수님 바라보고 믿음 가질 때 하나님 영광 보게돼
긍정적 믿음과 고백이 성경적 삶의 방식
우리 사람들은 다 감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지혜와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 모든 방식 위에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과 함께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들어가는 과정은 굉장히 험악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혹독하게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왔는데 배도 없고 교량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에 빠져죽든지 애굽군대에게 맞아 죽든지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감각으로 볼 때, 경험으로 볼 때, 과학으로 볼 때,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기회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들에게 믿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애굽군대를 멸하여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로 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에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목이 말랐습니다. 광야는 햇빛이 비취고 대단히 더운 곳이기 때문에 낮 동안에 수증기가 다 증발해 버려서 몸이 바싹 마릅니다.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물이 있어서 마실려고 하니 써서 마실수 없습니다. 이에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고 나무를 꺾어서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기고 피흘려 우리 죄악의 독을 다 제하시므로 예수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어떠한 죄악의 독도 사라지고 달아질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양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3백만이 먹어야 하는데 식량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소리를 들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 “그 때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오늘날도 우리에게 떡과 고기를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는 심각한 물부족 문제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물이 샘솟습니다. 인간의 감각적인 지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과 순종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신명기 8장 2절로 3절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는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다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오늘날에도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험한 광야를 지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지나게 하지 않았으면 만나를 내릴 필요도 없고 쓴물을 달게 만들 필요도 없고 메추라기를 보낼 필요도 없고 바위가 물을 토해내게 만들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런 기적을 우리가 읽을수도 없었고 어떤 하나님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모르면 우리가 믿고 기도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쓴물도 달게 하시고 광야에서 메추라기도 주시고 만나도 주시고 바위에 물을 솟게 하시고 신발이 달아지지 아니하고 40년 동안 병이 들지 않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실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이 가르치신 삶의 방식
마태복음 9장 27절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는데 두 맹인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능히 이 일 할줄을 믿느냐”라고 묻자,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자 즉시 눈이 밝아졌습니다. 수술 받은 것도 아니고 약을 먹은 것도 아니고 침을 맞은 것도 아닙니다. 하늘나라 방식은 믿음의 방식인 것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자 맹인이 눈을 뜬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이 작아서 시련을 당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1절에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데 제자들이 유령인줄 알고 고함을 치니 예수님이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을 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잡은 것이 없으나 주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지겠다고 했습니다. 깊은데 가서 그물을 던지니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고 배에 가득 채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걸어오라 하셨지만 캄캄한 밤에 파도가 치는데 바다 위를 걷는다는 것은 정말로 용기가 필요합니다. 보통 사람은 두려워서 못합니다. 베드로는 물 위에 서서 걸어나갔습니다. 그러나 파도와 바람이 불자 그의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졌습니다. 결국 주님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며 매달리게 됩니다. 말씀을 놓쳐 버리면 믿음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잡고 있으면 믿음이 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큰 믿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1절에 예수님께서 한 동리에 들어갔는데 가나안 여자가 나왔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도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입니다. 그중에도 또 여자입니다. 그 당시에 여자들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가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고함을 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줄 떡을 취해서 개에게는 안준다고 하시면서 무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나안 여자가 무릎을 꿇고 주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주님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릎을 탁 치며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개들도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며 모욕을 참는 여자를 보고 예수님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냥 믿기만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믿고 난 다음에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산기도도 가고 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믿음의 조건은 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8장 25절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음에 믿음을 잘못된데 두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데 파도가 일어나서 배가 물에 잠기게 되어 죽게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으나 예수님은 배 한구석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제자들은 아우성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일어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니 즉시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제자들을 보고 하는 말씀이 “너희 믿음을 어디다 두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바다의 파도와 같은 일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우리 가정과 사업에도 파도가 일고 풍랑이 일어나서 무너지게 되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죽겠나이다”고 고함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네 믿음을 어디다 두었느냐”는 질문은 믿음을 주님께만 두고 있으면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조건밖에 없습니다. ‘바람에 두지 말고 파도에 두지 말고 죽는다고 믿지 말고 산다고 믿어라’는 것, 곧 믿음을 주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또 말씀하기를 요한복음 11장 4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무덤에 있은지 나흘이 되자 더운 지방의 특성상 벌써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그를 어디 두었느냐. 무덤에 가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굴을 파서 무덤을 만들고 시체를 넣어 돌로 막아 버립니다. 땅을 파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굴을 파서 넣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보시고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자 마르다는 “오라버니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계셔도 안 믿으면 안나타납니다. 돌문을 옮겨 놓는 마르다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데 믿음만 있으면 행함으로 돌문을 옮겨 놓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니까 수의를 온 몸에 칭칭 묶은채 살아서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주사를 맞고 살아난 것도 아닙니다. 수술을 받고 살아난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믿음의 방법으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1장 21절에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믿음의 방식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무화과 나무 옆을 지나갈 때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영원히 사람들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무화과가 말라버렸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서 “주여,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주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 내게 이르노니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고 해도 될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생문제의 해답을 종국적으로 ‘믿음’이라고 제시해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믿어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믿음의 방식인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감각이요, 체험이요, 지식이요, 과학이요, 이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주 예수를 통해서 기사와 이적을 우리 생애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삶의 훈련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꾸준히 훈련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훈련하는 것은 삶의 목표와 바람과 소원하는 꿈을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믿음이 활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병든 자는 낫는 것이 꿈이고 소원인데 낫고 건강하게 될 것을 소원하며 꿈꾸고 믿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이 망한다는 것은 꿈이 없으면 믿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꿈을 믿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바다에서 항구를 잃어버린 배와 같고 공원 벤치에서 잠자는 노숙자와 같은 것입니다. 제가 아침 출근할 때 여의도공원을 산책 삼아 걸어서 교회로 올 때가 있는데, 공원 벤치에서 자는 노숙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볼때마다 “꿈이 없으면 믿음의 낙오자가 되어서 저 모양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를 먹어도 꿈은 놓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도 믿음 잃은 노숙자나 방향 잃은 배처럼 되지 말고 목표가 분명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믿을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믿고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대로 행하려고 할 땐 마귀가 방해를 하고 의심을 가져오기 때문에 상당한 투쟁을 해야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는 창조적인 믿음의 말로 선언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고통스러울 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다스려집니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하다. 나는 평안하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형통하다. 좋은 일이 생겨난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미국의 알코올 중독자 치료협회에서 재활 프로그램 중에 언어치료를 실시했습니다. 말로써 알코올 중독을 치료했는데 약물이나 운동치료보다 더 높은 50%의 치료 확률을 보였다고 나왔습니다. 언어 치료는 매일 아침마다 12단계의 말을 알코올 중독자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2단계는 “우리 스스로는 어찌 할 수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3단계에는 “이제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또 6단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말하며, 7단계는 “이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합니다”라고 하고, 11단계에서는 “날마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겠습니다”, 마지막 12단계에는 “이것은 효과가 있고, 나는 이대로 행동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말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로 하는 것이 약으로 한 것이나 특별한 주사를 놓는 것보다도 50% 이상의 더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말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허공에 맴돌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말은 곧 능력이 되어 우리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은 우리의 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의 말로써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차원은 감각과 이성으로 사는 차원과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은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하는 방법과 소원하고 희망하며 꿈을 갖는 방법, 믿음으로 행동하고 나아가는 방법, 입술로 고백하는 방법들을 항상 훈련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값싼 인생이 아닙니다. 보배로운 인생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배를 간직하고 사용하여 기적을 체험하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도와주며 온 천하에 복음을 증거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지면보기
행복으로의 초대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