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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
2010.03.2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  이사야 53장 1∼8절

 

죄로 죽었던 우리 살리신 주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고난은 나와 우리를 위함이므로
변화된 모습 꿈꾸고 바라보고 시인해야


 지금으로부터 약 2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교부 폴리갑은 이사야 53장을 가리켜 ‘황금 같은 장이다’라고 말했고, 주석가 델리취는 ‘구약성서 예언의 가장 중심부요, 가장 깊고 가장 높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이사야 53장 말씀으로 ‘수난의 어린양’을 작곡하던 중 펜을 멈추고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고 있습니다”라며 울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고난 받는 예수님을 ‘상처받은 치유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1. 출생과 환경의 비천함

 예수님은 연한 순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다고 했습니다. 봄이 되면 식물의 순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밟으면 쉽게 부러지는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서 연한 순같이 아무런 힘도 없이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아이 때 고운 모양도 없고 당당한 인물이 될 풍채도 없어서 이사야가 보기에도 감탄하고 존경할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가장 평범한 인간으로 주님은 태어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4절에서 7절에 보면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것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 대한 인간들의 대접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사회에서 자라면서 인간들의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교의 제도와 조직 안에서 그는 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는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많이 당했으며 병자들만이 그를 따랐습니다. 유대인의 사회 속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오직 거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힘 없고 능력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평범한 사람, 중류사회의 사람들은 완전히 예수님을 무시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고 사람들을 돌봐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 나오면 고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수많은 영육간에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치료하는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과 사명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우리의 질고를 몸에 짊어지고 그로 인한 슬픔을 당한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여 징벌로 삶의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게했다”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괴로운 것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상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더 괴로운 것입니다. 이사야 52장 14절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5절로 20절에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저 단순히 십자가 형틀에 달리셔서 돌아가신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제일 마지막 순서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죄인에 대한 형벌은 심한 채찍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채찍 끝에는 납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이 달려 있어서 한번 맞으면 살에 박혀 당기면 살이 찢기고 뼈가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엄청난 것이어서 매를 맞다가 그 충격으로 죽는 죄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러한 고통 가운데 자신이 못 박힐 2미터 길이의 무거운 나무를 끌고 사형당할 장소까지 이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사야 53장을 읽을때 또는 예수님에 대한 사건을 읽을 때마다 늘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나 때문이 아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올 필요도 없고 고난 당할 필요도 없고 십자가에 매달릴 이유도 없습니다. 나 대신,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난을 당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캔버스 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하워드 매츠키 교수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분석했는데, 몸의 체중이 두 손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살이 찢어지고 많은 피를 쏟으며 통증이 극심하고,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늘어져 팽창하므로 호흡장애를 일으켜 숨을 쉴 수가 없으며, 산소가 부족해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몸을 조금 위로 조금이라도 치켜 올리려고 하면 이 때마다 체중이 발등에 꽂힌 못에 실리게 되어 고통은 더욱 가중된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고통을 주님은 6시간 당하시고 온 몸의 피와 물을 쏟아내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1992년에 USA 투데이 국제부 편집장 잭 캘리는 소말리아의 기근 상태를 직접 목격하고 와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 사진 기자가 한 아이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자몽을 줬는데, 그 아이는 자몽을 잡을 힘조차 없었습니다. 기자가 자몽을 반으로 잘라서 주자 아이는 고맙다는 눈빛으로 잠시 우리를 바라보다가 자기가 사는 마을로 급히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를 따라서 마을로 들어갔는데 그 때 마을 한 모퉁이에는 거의 죽어가는 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에게 자몽 반쪽을 받은 아이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이 받은 자몽을 한 입 베어 씹더니, 동생을 향해 무릎을 꿇고 동생의 입을 벌려 자몽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못 씹으니까 턱을 위 아래로 움직여서 자몽을 먹도록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후 우리는 그 형이 2주 동안 이렇게 동생에게 먹여주었다는 소식과 함께 형은 영양실조로 죽고 동생은 형 덕분에 살아나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요사이 그런 형도 없고, 그런 동생도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음식을 동냥해 자기가 씹어 동생 입을 벌려 넣어주고 턱을 움직여서 씹게 만들어 살리고 자기는 굶어 죽겠다는 것인데, 보통 애정이 아닙니다. 형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은 동생과 같이 우리는 우리 힘으로 결코 살아갈 힘이 없는 죄인입니다. 굶어죽어 가던 동생과 같이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살아날 도리가 없습니다. 죗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을 당하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의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이 모든 고난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대속의 삶과 그 은혜를 통해서 공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대속의 삶과 고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삶과 고난의 의미를 우리는 이사야 5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찔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머리는 가시채 찔리고 손발도 가시채 찔리고 옆구리도 창으로 찔렸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5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허물과 죄로 우리는 영원히 죽었습니다. 육체만 살아있지 영적으로는 죽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함께 살렸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로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은 모두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았습니다. 살아난 사람입니다. 함께 따라 말씀해보십시오. “나는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상해서 그 고통중에 우리를 이끌고 하나님께로 나갑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나갑니다. 보혈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가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 자체가 되었습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참소할 수 없는 그러한 상태가 의입니다. 엄청난 의로운 의가 우리 힘으로 됩니까? 예수님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의가 되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성화(聖畵)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장면을 그린 것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리아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서서 울고 있거나 탄식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그 표정에 하나같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그림 한쪽 구석에 렘브란트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렘브란트는 그 현장에 자신이 있었다고 하며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우리의 죄악을 온 몸에 짊어지고 그로 인해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허물에서 해방되고, 평화를 얻고 치료와 건강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삶으로 우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 죄 때문입니다. 이천년 전에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채찍 맞은 그대로 와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이해하고 꿈꾸고 믿고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5. 십자가 고난의 총체적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당한 총체적인 의미가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적혀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아닌 제각각 탐욕의 길로 다 나갔습니다. 이 모든 죄의 책임을 하나님은 예수님께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고난은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종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9절로 31절에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원함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그것을 시인하십시오.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다고 하면서 변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변화를 안받은 것입니다. 옛 습관인 거짓말, 못된 짓을 그대로 합니다. 분명히 교회에 나와서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구원은 받았는데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구원만 받을 뿐 아니라 변화가 꼭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를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미 죄와 허물만 청산한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 술 취하는 것, 아편 중독, 도둑질하는 마음, 욕하는 마음,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청산되어 버리고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고 나의 거룩과 성결이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내 힘으로는 변화가 안됩니다. 근본적으로 삶이 변화 되어야 됩니다. 그것은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이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옛모습은 지나가 버리고 새것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내 속에 들어오지 않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통해서 내 모든 죄와 불의와 추악과 저주를 짊어지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런 변화된 내 모습을 꿈꿔야 되고, 믿어야 되고 ‘나는 변화 되었다’라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켜야 결코 우리의 힘과 결심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덧셈, 뺄셈도 하지 못하는 유치원 어린이가 선생님께 미분 적분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선생님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어린아이를 보고 허허 웃고 말것입니다. 더하기, 빼기도 못하는 아이가 미분, 적분을 어떻게 압니까? 설명해도 모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우리에게 상대성 원리를 설명해 주어도 수학과 물리학에 문외한인 우리들은 그 말이 무슨말인지 못알아 듣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피조물인 우리가 일일이 내용을 다안다고 하면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수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믿어야 합니다. 밥을 먹기 전에 단백질과 탄수화물, 비타민 등의 함량과 영양가를 계산해서 알아야만 먹을수 있다면 굶어죽기 딱 십상입니다.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룻배가 바다를 담을 수 없듯이 인간의 조그만 가슴이 하나님의 넓은 세계를 다 담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고통 받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렇게 많이 듣고 그렇게 많이 공부를 했는데도 끝까지 이해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섭리 안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려고 하신 것인데 그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가 모릅니다. 만분의 일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가르치고 또 가르치시고 꾸짖으시고 성장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3차원의 세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이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과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주시는 꿈과 믿음과 입술의 시인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난 사람들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괴로운 것이지만 부활을 위해서는 십자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입니다. 죽음이 있으면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으면 죽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가 믿고 가슴에 받아들이므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늘 바라보고 새사람된 나를 시인하고 바라보고 믿고 주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새사람으로 살고 옛사람으로 살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언제나 천국의 행복과 기쁨이 우리속에 충만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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