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7∼11절
십자가 위에서 제해진 죄, 불의, 질병, 저주들
예전 것은 지나갔으니 성령 안에 새사람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이 우리의 정체성
우리는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부릅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말입니다. 행복 속에 슬픔이 있고 웃음 속에도 눈물이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비밀한 죄책이 있고 돈, 지위, 명예,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도 갑자기 엄습하는 허무와 무의미의 감정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은 모두 죽음의 그림자 밑에서 몸서리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호화롭게 살았던 솔로몬도 전도서 1장 2절로 11절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했습니다.
1.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날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다 지구라는 타락하고 저주받은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저주받은 땅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우리 삶에 장애물 천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저주받은 땅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평생에 수고해야 소산을 먹을수 있습니다.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딴 김연아 선수가 우리 온 민족의 가슴을 흥분하게 하고 세계를 뒤흔들었지만 그 발바닥을 보면 다 갈라져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작년에 ‘5020’을 2009년의 숫자로 선정했습니다. 이는 미국이 이라크전쟁을 시작한 2003년부터 약 3년 동안 테러와의 전쟁에 사용한 비용이 5020억 달러가 들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재해보험회사인 ‘스위스 리’ 등에 따르면 같은 기간 전 세계에서 일어난 자연재해 피해액은 55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지구촌 곳곳에서 진행 중인 테러와의 전쟁 비용보다 가뭄, 홍수, 태풍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액이 더 큰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자연재해 피해액이 해마다 커져서 2000년부터 5년간의 자연재해 피해액은 5년 전보다 약 4배 정도 올랐다고 합니다. 오늘날 지구촌은 곳곳이 테러와 전쟁이 일어날 뿐 아니라 갖가지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들과 자연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육신을 입고 이처럼 타락한 세상에 오셔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태어날 때는 천한 구유에서 였습니다. 목수의 집 아들이어서 심한 중노동을 했고 그 다음에는 노숙하면서 제자들과 이 땅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생후 한 달도 안 된 아기를 단돈 200만 원에 판다고 광고한 20대 초반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아민 마이베스라는 사람이 인터넷에 천지가 놀랄 광고를 냈습니다. “자기에게 먹히기 원하는 젊고 건강한 남자 구한다”는 광고였습니다. 더욱이 광고를 보고 실제로 누군가가 연락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정신과 의사의 확인에 의하면 마이베스는 심각한 정서 장애를 앓고 있었고 이후에 15년 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미국에서는 50년 전에 이미 조지 조겐슨이라는 사람이 세계 최초로 성전환수술을 받았습니다. 남자인데 수술을 받아 여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오늘날 남녀의 성은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는 가치관이 널리 확산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자녀를 둔 남성 부부는 6만 가구이며, 자녀를 둔 여성 부부는 9만 6000가구나 되는 것입니다. 남녀가 아니고 남자끼리 살고 여자끼리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이혼율은 50%가 넘어서 어느 기자는 “혼인 서약을 파기하기가 전집류 구매 계약 파기보다 더 쉽다”고 평가했습니다. 우리나라도 2008년 전 세계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처럼 타락하고 저주 받은 땅에서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육신을 입고 이처럼 타락한 세상에 오셔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실 때 당신 자신을 고난의 한가운데 풍덩 빠뜨리도록 던지셨습니다. 태어나서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셨습니다. 목수의 집 아들로써 심한 중노동을 했고 공생애 사역 중에는 노숙을 하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33년 동안 이 땅에 살았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저주받은 땅에 오셨습니까? 온 땅이 이렇게 저주받았는데 무엇 때문에 왔나요? 예수님 오기 600 내지 700년 전에 이사야는 이 저주받은 땅에 희망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저주받은 땅에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8절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희망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여섯 번째 남자하고 살면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절망적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나자마자 순식간에 변화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개인도 변화되고 예수를 만난 가정도 변화되고 예수를 만난 나라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성형외과 의사인 맥스웰 몰츠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형수술을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성형수술로 자신의 외모가 아름답게 되면 성격이나 인격도 갑작스럽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평소 콤플렉스로 여겼던 부분이 고쳐지면 그로 인해 생겼던 자기 비하, 자기 혐오, 불만, 두려움 등도 없어져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성격이 밝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건은 아무리 성형수술이 잘되어서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아름다워져도 마음은 달라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얼굴을 성형수술 하지 말고, 마음을 성형수술 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직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무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믿는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안 믿는 사람은 종교는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못 만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예수를 만난 사람이요,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2. 믿는 자의 삶
로마서 8장 36절에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법적인 의미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육체는 십자가를 쳐다볼 때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죽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어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옛사람이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옛사람으로써 세상에 살지 않는다. 옛사람의 죄, 불의와 추악, 질병, 저주,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이미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용서받고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같이 채찍에 맞으므로 병을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저주를 다 벗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도록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끝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님을 통해서 옛 사람이 죽었고 장사지내고 말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장사지내고 말았다.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해서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산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고 하셨으니 자유를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우리의 육체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쳐다볼 때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죽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어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깨달음을 항상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난 옛사람이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옛사람으로 세상에 살지 않는다. 옛사람의 죄, 옛 불의와 추악, 옛 질병, 옛 저주, 옛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 깨달음 속에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이미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용서받고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같이 채찍에 맞으므로 병을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저주를 다 벗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이미 부활해 버린 것입니다. 그 빛을 마음속에 늘 비추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이 이 진리를 깨닫는 빛을 비춰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도록 축복을 받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끝납니다. 예수님이 그냥 십자가에 벌거벗고 매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것입니다. 죄짓고 추악하고 병들고 저주받고 가난하고 낭패와 실망당하고 죽고 지옥가는 그 못난 우리가 주께 매달려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새로운 이미지를 마음속에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빛이 우리 마음속에 비친 이상 항상 이 빛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옛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서 자기에 대해서 저주와 절망을 가지고 낙심하고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주님께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을 하고 믿음이 적은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개들도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데 이방인이라도 주님이 고쳐주신다고 믿는다고 하니 주님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믿을 수도 있고 적게 믿을 수도 있고 크게 믿을 수도 있고 죽도록 믿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자꾸 자라게 해야 됩니다. 믿음있는 사람하고 같이 지내면 이야기를 들어서 용기를 얻습니다. 또 체험을 하면 체험을 할수록 믿음이 점점 강해져서 나중에는 믿음의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깨달음을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지식을 가지고 주의 성령의 도움으로 새 사람이 되는 꿈을 꾸며 마음에 능력인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서 믿고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입술의 말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압니까? 우리 입의 말이 우리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도 관심을 가지고 선택적으로 해야지 무지막지하게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대속물이 되셨으니 그 대속물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9절에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열매가 우리 생활속에 나타나야합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죽으신 열매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 비춰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내지에서 개척하며 선교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신자가 되는데 몇 년이 걸립니까?” 테일러 선교사는 그 청년에게 “램프의 심지에 얼마 동안 불을 붙여야 빛을 발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청년은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라고 답하자 테일러 선교사는 청년의 손을 잡고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삶을 얻은 그 영혼에서 빛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순간에 즉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들은 점점 빛을 받아서 그 구원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 구원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을 점점 더 크게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이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더욱 30배, 60배, 100배로 향상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3. 우리의 정체성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완전히 새사람이 된 보배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보배로운 사람인가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명한 자 같아도 유명합니다. 사방에서 우리를 우겨싸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해도 낙심치 않으며 아무리 박해받아도 즐겁고 기뻐하게 됩니다. 망하게 해도 안망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했듯이 주님이 능력을 주시므로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파우스트’라는 책에서, 파우스트는 문학가이자, 법학자이고,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 문제에 부딪혀 마음에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살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의 종소리가 나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부활할 수 있는 보배로운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누가 뭐라 말해도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로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신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떤 환경도 이겨내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소유하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을 바라보게 도와주시옵소서.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자기 모습을 새롭게 보게 도와주시옵시고 믿음으로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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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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