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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희망
2009.10.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사도행전 2장 25∼29절

 

살아갈 힘과 용기 상실한 우리 인생
적극적·긍정적으로 고난돌파하는 모습 필요
세상에 없는 ‘희망’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어느날 사무실에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초라한 옷을 입고 초췌한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그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10대의 젊은 나이로 결혼했는데 남편이 전쟁 중에 죽었고 아이를 낳아 유복자를 애지중지 키우게 되었습니다. 주위에서는 재혼하라는 권유가 많이 있었지만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온갖 시련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성한 아들이 결혼을 해 며느리가 집에 들어와 같이 살게 된 후로 갈등과 마찰이 많아졌답니다. 아들 내외와 할머니는 각자 멀어진 삶을 살게 됐습니다.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할머니는 인생의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결국 교회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신앙적 권면과 기도를 통해 그 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참된 희망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고 간증했습니다.

 

 1. 삶에 희망을 잃어버리면

 이 세상에는 60억이 넘는 인류가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인종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문화와 습관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가슴에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 절망을 극복하고 가슴속에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희망 가득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타락해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떠난 식물들이 잘 자라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난 마음에 희망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와같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든 자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순종하고 불신앙의 죄를 통회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절망적인 삶을 극복하고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희망이 있을 때는 살아갈 희망과 용기가 있는데 희망이 없으면 기운이 빠져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상실되고 인생을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술 가운데 빠지던지, 방종한 삶으로 일관하던지, 될대로 되라고 인생을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하늘만 빤히 쳐다보고 있고 자지도 아니하고 먹지도 아니하고 식물인간처럼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우울증의 노예가 되어서 마음의 즐거움이 없고 누가 와서 무슨말을 해도 대꾸를 하지 않고 완전히 고독한 인생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즐거운 마음은 좋은 약과 같아서 심신을 치료하지만 마음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니 그 몸에 살이 안 마를수 있겠습니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과 퓰리처 상을 받았던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그는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 명작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평생 선교사가 될 꿈을 꾸었으며 어머니 또한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성장하면서 믿음의 길을 저버리고 불신앙의 길 가운데 방탕하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무렵에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도 코드를 꽂으려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은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과 공허함 속에 살고 있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빈 전구처럼 공허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 공명과 쾌락을 다 가지고 있어도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면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상실하고 인생을 포기하게 되는것입니다.

 

 2. 삶에 희망이 있으면

 그러나 우리가 삶의 희망을 가지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어떠한 어려운 환경이 되어도 삶의 용기를 잃지않습니다. 고통과 괴로움과 핍박이 와도 그것을 걸머지고 나아갑니다. 적극적으로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로마서 5장 3절과 4절에 말씀합니다. 소망이 있으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으면 창조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꿈과 행복이 넘쳐납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 런던이 폭격을 받았습니다. 런던의 모든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한 기자가 제안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희망적인 기사를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신문들은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싣고 군대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의 모습이 신문에 헤드라인을 차지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영국 국토 전체에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전쟁의 승리를 국민전체가 믿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현실은 암담했지만 희망을 통해 창조적인 일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신의학자인 빅터 플랭클 박사는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나치 수용소에 잡혀있다가 살아나온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600만 유대인이 참사를 당한 나치 수용소의 체험담을 책으로 기록했습니다. 그 책을 통해 그는 인간의 위기상황 속에서 희망을 가질 때는 놀라운 힘이 나타나는 것을 체험했다고 말했습니다. 빅터 플랭클 박사는 그 당시 수용소에서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다 죽어갔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던 사람은 모진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해도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현재의 고통과 상관없이 삶의 기쁨과 행복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3. 왜 그리스도인에게는 희망이 있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공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질 수가 없고 오직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쾌락을 누리고도 마음의 텅빈 공간은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셔야 채워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지위나 명예나 돈이나 쾌락을 가지고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만족함을 줄 수 없는 우리 마음속의 텅빈 웅덩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그 터진 웅덩이를 메울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을 가질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면 우리가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 상황이 어렵고 괴롭고 한심할지라도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그 속에서 예수님은 나같이 못난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몸찢기고 피흘리신 은혜가 희망을 줍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치료의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음으로 우리는 천국에 대한 희망을 얻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은혜로 희망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오셔서 위로해주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에서 5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 인데 파라칼레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파라칼레오란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을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보혜사라는 말은 파라클레토스로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자’입니다. 저는 온세계에 다니며 성회를 인도할 때마다 위로해주시는 성령님을 체험했습니다. 기후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잠자리가 바뀌고 여행이 피곤해져서 집회장소에 나가 강단에 설 때 다리가 떨리고 몸에 열이 나고 고통스러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니어습니다. 그때마다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 의지합니다. 성령님 나를 붙드시고 나에게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 몸에 새로운 힘이 생기고 불같은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님께서 도와주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희망을 가지는 것은 천국의 약속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 위의 우리 삶이 끝나면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원한 천국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과 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꺼져가는 소망도 아니요 죽어가는 소망도 아닌 것입니다. 산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절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생을 희망속에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가 더 나은 내일을 주실 것을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성령님의 역사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한 밝은 꿈을 마음속에 늘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으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굳게 믿어야 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약속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의 별들을 헤아린 것처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늘 헤아리고 그 말씀을 굳건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희망차고 긍정적인 말을 하십시오. 부정적인 말이나 절망적인 말을 하면 나도 희망을 잃어버리고 남도 희망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잘되는 것도 있고 못되는 것도 있고 축복받을 때도 있고 어려움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좋게 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지난 50년의 목회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저에게 늘 희망의 전도자가 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하던 시절 우리나라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우리교회 성도들은  삶의 희망을 잃고 절망하여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다가 못살겠다고 변두리로 쫓겨난 사람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희망을 주는 우리교회로 모여든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받아 변화되어 기적을 체험하고 오늘날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저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힘차게 선포했고 그들은 가슴속에 희망을 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꿈도 사라지고 믿음도 사라지고 절망과 죽음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안됩니다. 그러면 꿈도 사라지고 믿음도 사라지고 절망과 죽음 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에 끊임없이 감사하고 마음속 희망의 불꽃을 타게 해야 합니다. 희망의 불꽃이 타고 있는 이상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버림 받지 않습니다. 패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희망을 가질뿐 아니라 우리가 가는 곳마다 희망을 전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성령님이 나의 보혜사가 되셔서 나를 감싸고 있으므로 희망을 안가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면 희망은 널리널리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희망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희망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 잡히는것 없고 내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예수님, 성령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예수님은 은혜를 주시고 성령님은 도움을 주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이 붙잡았는데 절망이 어떻게 우리를 힘들게 할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잘살수 있습니다. 병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승리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마음속에 꿈을 만들어 내고 꿈은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만들어내고 믿음은 우리에게 용기와 담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할 수 있다. 하면된다. 해보자”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희망을 끝까지 가지고 희망의 전도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주신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 희망입니다. 어떠한 가난한 집안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다시 일어납니다. 어떠한 가난한 나라도 희망을 갖고 국민들이 일하면 부자나라가 됩니다.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도 희망을 가지면 그것을 극복하고 놀라운 기적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꿈도 사라지고 믿음도 사라지고 절망과 죽음의 포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큰 사랑과, 그 큰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희망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시옵소서. 희망을 가진 사람마다 기적을 체험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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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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