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 사랑
주님 안에서만 참 사랑 발견할 수 있어
하나님의 사랑 찾고 그 가운데 살아야
성경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올라가면 믿음도 완성될 것이고 소망도 다 이루어질 것이지만 사랑은 천국에 들어가도 겨우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야 진실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인간 삶의 근본적인 요소인 사랑
인간 삶의 근본적인 요소가 사랑입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마음이 허해져서 세상 죄악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변명을 하고 이유를 대지만 세상 죄악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과거를 살펴보면 사랑결핍증에 걸려서 병이 난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참 인간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담 전문가인 오제은 교수는 그의 책 ‘자기 사랑 노트’에서 중독은 상처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즉 내면의 공허함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잊기 위해 알코올중독, 약물중독 혹은 일중독 등의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니까 그 대신 중독으로 그것을 메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로버트 파이어스톤은 “모든 인간의 심리는 자신의 감정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나 특별한 경험 혹은 특정 물건 등에 크게 애착을 느끼며 그러한 것들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 대신에 여러 가지 주위 환경을 가지고 메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를 늘 안고 다니고 어떠한 사람은 개와 더불어 삽니다. 이런 모든 것은 자기가 필요한 감정적 사랑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주위 환경을 통해서 메워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면 마음이 허해져서 세상 유혹에 쉽게 물들거나 세상 죄악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을 적대시하고 경계합니다.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습니다. 자랄 때 쭉 핍박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한 사람은 성장하고 난 다음에도 늘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해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대당한 자기의 과거의 생활을 기초로 삼아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본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마음의 따뜻함을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해하고 동정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학대당하고 멸시당한 체험만 있지 이해해주고 동정해주고 품어준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이해와 동정을 할 수 없습니다. 아주 냉철하고 냉혹하게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나 이외의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남을 받아들이고 남과 하나가 되는 일을 좀처럼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랑받지 못한 남편이나 아내는 건강한 가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항상 그 마음속에 열등의식과 좌절감으로 몸부림을 치고 고통당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과학자들이 원숭이로 사랑의 힘을 실험한 결과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한 원숭이를 태어나자마자 어미 품에서 떼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금속으로 만든 원숭이에게 털을 입혀 놓고 새끼 원숭이 방에 넣어 놓았습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가 아무리 매달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 감정이 없고 차디찬 어미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새끼 원숭이가 자라서 어미가 됐습니다. 자기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에 대한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새끼가 근처에 오면 발로 차버리고 가슴에 매달리면 물어 찢습니다. 새끼를 기르지 못합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원숭이는 자기 새끼를 낳아도 새끼를 사랑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힘들고 자신 이외의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언제나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부모님께 사랑받았고 주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적대감정이 없습니다. 마음이 넓고 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 있게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물을 대할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것이 그에게는 생활의 습관이기 때문에 이웃을 쉽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 가운데서 행하려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했으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 깡패들, 중독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난 다음 그 인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듣고 있습니다. 사랑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고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2. 당신은 지금 사랑받고 있는가?
오늘 당신은 사랑받고 있습니까? 남편이나 아내에게, 자식에게, 형제나 이웃에게 사랑받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사랑받고 인정받기 원합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황무지와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조건이 붙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부부 사랑에 대하여 골로새서 3장 18절로 19절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부부는 상대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보면 여간해서는 서로 딱 맞는 부부가 별로 없습니다. 제가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우리 성도들을 살펴보아도 천생연분인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제가 가만히 보면 어머니 같은 부인이 있습니다. 남편을 자식처럼 돌보아 주는 부인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교사와 같은 부인도 있습니다. 남편에게 늘 꾸중하고 잔소리하고 간섭하는 가정교사와 같은 부인입니다. 그 다음에는 투정하는 아내가 있습니다. 남편만 만나면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투정하는 부인입니다. 또한 자유부인이 있습니다. 책임감 없이 집안 살림은 엉망으로 내버려 두고 밥만 먹으면 밖으로 나갑니다. 그 다음에는 목석같은 부인이 있습니다. 남편이 나가면 나갔는가보다, 들어오면 들어왔나보다, 있으면 있는가보다, 없으면 없는가보다.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이렇게 목석같은 부인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남편도 아버지 같은 남편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부인을 돌봐주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관용하는 아버지 같은 남편입니다.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같은 남편이 있습니다. 늘 아내를 꾸짖고 교훈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남편입니다. 또한 불평이 많은 남편, 집에 들어오면 부인에게 한시도 쉬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런 남편이 있습니다. 그리고 책임감이 없는 남편이 있습니다. 집안이 어떻게 되든 책임지지 않습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됩니다. 집은 돼지소굴이 돼도 관심을 안 갖습니다. 그 다음에는 벙어리 남편이 있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두 마디밖에 말을 안 합니다. “밥 줘!” “자자!” 부인이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밥 줘!” “자자!”가 그분이 하는 말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부부간의 사랑에도 조건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변화되면 사랑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변화 못시킵니다. 남편이 아내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아내가 남편을 변화시키는 못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해줘야 합니다.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무조건 사랑하고 기도해주면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자식을 기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외톨이가 돼서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집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 많이 안아줘야 합니다. 스킨십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안아주고 뺨을 비벼주는 것은 자녀들의 마음속에 정말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할 수만 있으면 비평하지 말고 칭찬해주는 게 좋습니다. 잘한다고 박수쳐 주고 칭찬해줘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하고 친구가 돼줘야 합니다. 예전에는 어른이 어린아이하고 친구가 되면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른은 어른답게 있어야 하고 애들은 애들답게 있어야지 어른과 애들이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유교적인 관습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와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낼 수가 있습니다. 친구가 돼주는 것이 어린 아이들을 잘 성장하게 만들어 주는 길입니다.
아버지학교 운동본부의 국제운동본부장인 김성묵 장로는 ‘좋은 아빠 되기 프로젝트’라는 책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며,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고, 많이 안아주며 스킨십을 자주하고, 문자 메시지를 통해서도 대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안정적인 신체적인 정신적 발달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잘 먹여준다고 자식을 잘 기르는 것이 아니고 잘 입혀준다고 자식을 잘 기르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자녀의 근본적인 인격을 성장하게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영양소가 사랑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이 항상 곁에 있는데 이웃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2장 31절에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복음 13장 34절로 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이웃을 청해놓고 늘 대접해야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웃의 허물을 덮어 주라는 것입니다. 사람만 만나면 손가락질 하고 귀에 소근대고 이웃의 허물을 말하면 이웃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 허물이 있어도 눈감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로 18절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행복 나누기 운동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이 고통당할 때 함께 고통을 나누고 이웃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려움을 나누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긍정적인 교제를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람과 기쁘고 좋은 말을 하고 비평하고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뿌리는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세상 것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과 조찬을 함께 하시고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친구의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무조건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친구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무조건 사랑한다고 큰소리 쳤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잠시 있다가 또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필레오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을 한다고는 말 못합니다. 무조건 사랑은 못하고 그저 친구로 사랑합니다. 주님은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있다가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친구로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필레오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또 친구로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러다가 배반할 줄 어떻게 아느냐?” 베드로는 눈물어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가 주님을 친구로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모르겠어요. 이 말을 하고 난 다음 또 배반할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다른 질문은 안하셨습니다. “네가 3년 동안 나를 따라 다니면서 잘 배웠느냐? 훌륭한 제자가 되겠느냐?” 그런 것을 물으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세 번 다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가지고 하면 사명을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려면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수고를 감내하게 합니다. 어떠한 고통도 견딜 수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실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늘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랑을 사람 속에서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너무나 각박한 세상 속에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를 속이고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람은 늘 물고 찢고 싸우고 전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참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해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걸머지고 몸 찢기고 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할 수 없고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변할 수가 없는 것은 사랑의 대가를 너무나 크게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당해야 마땅하고 사람들에게 다 질시를 당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그 사랑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가 참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랑의 기본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안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예수님이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과 생활하면 세월이 흘러 갈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마음속 깊이 느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고 행복을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 이 사랑을 우리가 가슴속에 받아들이면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속에 받아들이지 않고는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다 말라 버리고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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