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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선택하라
2009.07.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엘리사가 이르되 야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야훼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열왕기하 7장 1∼2절

희망 선택한 사마리아의 나병환자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아가면
주님의 도우심 가운데 승리할 수 있어


 우리는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들 중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많은 일이 다가올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긍정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들 중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두려움을 선택하고 뒤로 물러갈 것이냐, 믿음을 선택하고 백척간두에서도 한 발자국 내딛을 것이냐. 이러한 선택을 우리가 늘 내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1. 희망을 선택한 사람들

 성경에 보면 나병환자들의 선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람의 침공을 받아서 첩첩이 포위당했습니다. 사마리아성에 대한 포위가 하루 이틀이 아닌 긴 날 동안 계속되매 물이 다 끊어지고 양식이 다 끊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성문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안으로 들어가도, 여기 가만히 있어도 굶어죽을 것이니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절망하기를 거부하고 일어나서 희망을 향하여 전진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고 외면하는 나병환자 네 사람이 절망에 주저앉아 있지 않고 희망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같이 하셨습니다. 아람 군대가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아람군인들은 “이스라엘왕이 애굽왕과 주변에 있는 왕들에게 돈을 주고 군대를 사서 우리를 포위 공격하려고 한다. 빨리 달아나자!”라고 말하며 모두 다 내버려 놓고 달아났습니다. 네 사람의 나병환자가 아람군대의 진지에 도착하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이 기쁜 소식을 사마리아성에 알렸습니다. 사마리아성의 굶주린 사람들이 벌떼처럼 나와서 아람군대의 진지를 탈취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식들을 걸머지고 왔던지 성 밖에 밀가루와 보리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사마리아가 굶주림에 의해서 죽게 됐을 때 그들을 건진 사람은 군대도 아니고 장정들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우습게보고 손가락질하는 네 사람의 나병환자들인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사용하겠는가. 나는 교육도 받지 못하고, 훌륭한 사람도 되지 못하고, 배경도 없는 사람인데 누가 나를 사용하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버림받은 사람, 낮은 사람, 비천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7장 3절로 4절에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선택하기로 결단할 때, 우리 삶은 현재의 고통과 상관없이 희망찬 내일의 소망으로 가득할 수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문에 있던 네 사람의 나병환자 역시 희망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망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희망도 다가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절망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을 선택해야 합니다. 희망을 저버리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희망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인 것입니다.

 열왕기하 7장 6절로 7절에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보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전진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같이 하시니까 원수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죽는다. 절망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하고는 하나님이 대화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이미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전력을 다하자. 노력하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같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희망 플러스이다

 십자가는 희망 플러스입니다. 십자가는 플러스(+) 모양 아닙니까? 우리에게 희망을 언제나 보태주는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33년간 세상에서 사시다가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 흘려 이를 청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을 때는 절망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와 의의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짊어지셔서 청산하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셨으므로 용서받고 의롭게 될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인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을 희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마귀와 악한 습관에 묶여서 꿈쩍 못하는 사람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곳에서 예수님이 마귀와 세상을 멸하고 거룩함과 성결함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바라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쳐다보면 거룩함과 성령 충만의 희망도 얻을 수 있습니다.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제가 폐병에 걸렸을 때 저는 17살이었습니다. 매일같이 기침을 하고 피를 토해냈습니다. 정말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 희망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절망 가운데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했을 때 그 절망 가운데서 나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오늘날도 기적을 행하셔서 나를 살려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들어와서 그 희망을 붙잡고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죽기로 결심하지 않고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때 만일 절망을 선택했으면 오늘날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저의 몸으로 체험해서 압니다. 절망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지만 희망은 우리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주 가운데 고통당하고 직장도 없고 먹고 살기가 힘들고 괴로울 때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얻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으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갑자기 직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이 우리에게 빛을 주고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을 생활을 살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절망에 처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십자가 밑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청산하시고 나의 추악을 청산하시고 나의 질병을 청산하시고 나의 저주와 가난을 청산하시고 나의 죽음을 청산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얻고 그 희망을 저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그 희망을 통해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나병환자와 같이 힘이 없고 무력하고 무능하더라도 희망을 품으면 희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행진해 주심으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이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는 것입니다.

 

 3. 나는 왜 희망의 복음을 전했나?

 저는 한평생 희망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희망목회 50년을 한 것입니다. 왜 희망을 전했느냐,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두 가지 관점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평안한 환경에서 자라고 생활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볼 때 희망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행복하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 희망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계명을 지키고 율법에 따른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고 사회 참여, 인권, 빈부격차 해소, 개혁, 세계 평화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자연보호, 환경보호를 말하고 지상 낙원을 말하지 희망에 대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난하고 저의 목회를 비난했습니다. “어떻게 교회에서 기복신앙을 설교하느냐?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윤리와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회에 참여해서 사회를 공평하게 하고 인권을 회복시키고 빈부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개혁과 세계평화 등을 말해야 하고 자연보호나 환경보호를 말해야 하고 지상낙원을 말해야지 왜 기복 신앙을 전하느냐?” 그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환경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편안하니까 십자가를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못 배우고 오늘의 삶의 불안과 내일의 삶의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볼 때 희망을 찾으려고 합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대조동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할 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오직 살아갈 길은 희망을 주는 복음밖에 없었습니다.

 희망을 주는 복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로 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러 오셨습니다. 죽는 자에게 삶을, 아픈 자에게 치료를, 배고픈 자에게 배불리 먹게 함을, 없는 자에게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떼를 지어 찾아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경상도, 전라도에서 서울에 올라왔다가 못살게 되고 변두리에 쫓겨 나간 사람들이 올데갈데 없는데 희망을 주는 복음을 천막교회에서 증거하니까 다 찢어진 가마니에 앉아 예배드리는 교회지만 구름떼같이 사람들이 모여와서 구원받고 변화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희망의 전도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중복음,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을 개발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라. 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천국과 재림의 복음을 증거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줘라. 희망찬 생각, 꿈, 믿음을 가지고 희망찬 말을 하게 만들어줘라” 모든 것을 희망으로 시작해서 희망으로 끝나도록 하나님은 제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희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한국에서 전도하고 온 천하만국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희망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와 희망을 얻고 구원받고 변화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될 수 있는 것이 희망입니다.

 

 4. 좌절과 절망과 싸우라

 우리는 끊임없이 좌절, 절망과 싸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희망적 생각을 늘 선택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플러스 아닙니까? 십자가는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희망을 얻어야 합니다. 매일같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구체적인 꿈을 꿀 수가 있습니다. 내가 잘사는 꿈도 꿀 수 있고 건강해 지는 꿈도 꿀 수 있고 시집 장가가는 꿈도 꿀 수 있고 직장을 얻는 꿈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크고 작은 꿈을 꾸는데 꿈을 꿀 수 있는 재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나병환자도 사랑해서 동행하셨습니다. 비록 나는 못나고 버림받은 사람이라도, 나병환자 같은 사람이라도 주님이 나와 같이 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체적인 꿈을 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일에도 주님을 바라보면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꿈꾸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희망을 말하십시오. 절망을 말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말하십시오. 그래야 절망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좌절과 절망의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생각하고 꿈꾸며, 희망의 날이 다가올 것을 믿고 말하며 끊임없이 희망을 향해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이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더 나아진다. 나는 승리한다”라고 말하면서 희망을 가지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을 생각하고 절망을 말하면 마귀가 와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노예가 되지 말고 희망의 성공자가 돼야 합니다. 네 명의 나병환자와 같이 희망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희망이 없다고 할지라도 희망을 향해서 걸어가면 희망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없던 희망이 희망을 향해서 나가는 사람에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십자가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초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해주려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시면 하나님의 날개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희망을 향해서 걸어가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도 죄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받아주셔서 희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끌어안으십시오. 예수님이 안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할 수가 없습니다.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할 수 없는 것에서 할 수 있다고 일어나야 합니다. 죽는 자리에서 살 수 있다고 일어나야 합니다. 실패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죽음을 청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배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 수 있고, 예수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고, 예수님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살면서 큰 꿈을 꾸고 큰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우리와 같이 이 자리에 계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인생이 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꿈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기적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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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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