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장 16∼19절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셔
그 사랑의 너비·길이·높이·깊이 깨달아
사랑의 십자가 걸머지고 주님 따라가야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굉장히 흐뭇해집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에로스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이성 간의 사랑입니다. 에로스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남녀가 서로 끌리고 함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고 살게 됩니다. 다음에 친구 간의 사랑인 필레오 사랑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는 형제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친구 간의 사랑이 사라지면 신뢰를 잃어버리고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주시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하나님 사랑의 너비
우리가 평원에 가면 평원이 아주 넓지 않습니까? 그러나 평원 가운데 계곡이 있으면 계곡은 아주 좁습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은 좁지만 계곡을 뛰어 넘으면 넓은 평원이 있는 것처럼, 넓은 사람의 마음은 마치 넓은 평원과 같고 좁은 사람의 마음은 계곡과 같습니다. 아주 좁은 사람의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넓은 사람은 모든 것을 관용하고 받아들이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로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외아들을 기르는데 그 외아들을 동네나 시민을 위한 제물로 내놓으라면 절대로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외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도 부모의 마음이 아픈데 하물며 마을이나 국가를 위해서 제물로 내놓으라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인류를 대신해서 짓지도 않은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건지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없이 넓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죄인도 찾아오면 환영하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뭐 저런 사람이 다 교회에 나오느냐? 세상이 다 아는 죄인인데 저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겠느냐?”라고 말하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가 하도 넓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백인이나 황인이나 흑인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부자라고 특별히 잘 대해주거나 가난하다고 멸시천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넓은 사랑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의 여인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여자를 보고 다 손가락질했습니다. 결혼을 다섯 번 하고 이혼을 다섯 번 하고 여섯 번째는 오다가다 만난 남자하고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기피하고 손가락질하며 죄인된 여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침에 우물물을 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여인들이 다 우물물을 길러 오는데 그들을 만나면 하도 욕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피해서 쨍쨍한 햇빛이 비치는 대낮에 혼자 우물가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땡볕에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앉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와서 쳐다보지도 않고 물을 기르는데 주님이 먼저 말을 붙이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여자가 깜짝 놀라 쳐다보면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온 세상이 죄인임을 다 알고 자기도 죄인인줄 알아서 예수님이 말을 붙이는 것만 보고도 깜짝 놀랄 정도인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나타내시고 영원한 생명수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것이지 죽이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든지 살리려고 하는 그 넓은 사랑을 여기서 읽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다름없는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살리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기고 피 흘려 우리 죄를 대신 청산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렇게 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우리들은 쉽게 남편을 정죄하거나 아내를 정죄하거나 부모를 정죄하거나 이웃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용서한 사람을 왜 우리가 정죄합니까? 예수님이 품어준 사람을 왜 우리가 밀어내는 것입니까? 오늘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기 죄는 덮어놓고 남의 죄만 자꾸 바라보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용서와 사랑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넓은 사랑을 가지고 남녀노유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끌어안아서 변화시켜 주시는 위대한 역사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사랑의 길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1년 동안 사랑하다가 말고, 10년 동안 사랑하다가 말고, 1000년이나 1만년 동안 사랑하다가 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제트기가 시속 960㎞의 속도로 날아갈 때 지구에서 출발해서 16일이 되면 달에 도착합니다. 17년이 되면 태양을 지날 수 있습니다. 690년이면 명왕성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0년을 날아도 제트기는 태양계조차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트기로 700년을 날아도 우주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주 조그마한 태양계를 떠나지 못하니 이 우주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과 끝이 안 보이는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는 인간의 사고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죄를 짓는 사람을 보고 ‘저런 것을 어떻게 하나님이 참고 견디실까? 그냥 박살을 내버리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없이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하나님이 또 일으켜 놓고 기다리시고 넘어지면 또 일으켜 놓고 기다리시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벌써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저는 종종 기도할 때 “하나님, 북한정권을 왜 저토록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하나님께서 빨리 북한의 주민들을 구출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해도 하나님은 대답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스스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8절로 9절에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10년 동안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그가 회개하지 못하니 하나님이 내 남편을 버리시는가 보다’ 무슨 말씀입니까? 10년이면 하나님께는 딱 한순간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은 20년, 30년, 50년, 아니 내가 죽고 난 다음에도 내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은 5만 번 기도해서 5만 번 다 응답을 받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뮬러 목사님도 꼭 한 가지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친한 친구가 죽기 전에 자기에게 부탁하기를 “여보게. 내가 우리 아들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너무나 안타깝다네. 자네가 꼭 예수께로 인도해주게” 그래서 이 목사님은 이 친구의 아들을 위해서 평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조지 뮬러가 죽는 날까지도 친구의 아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만은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의 아들이 뮬러의 장례식 때 문상을 왔습니다. 그는 관이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고 회개했습니다. 조지 뮬러는 평생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뮬러 목사님의 장례식을 통해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3. 하나님 사랑의 높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꿈은 모자람이 없이 온전한 신앙의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막무가내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 놓고 제멋대로 살라고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넓고 길지만 또한 높은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망나니 같은 우리를 그 높으신 사랑으로 구원하셔서 그때부터 온전한 사람으로 기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을 온전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방종하게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책망하고 매를 듭니다. 만약 어떤 부모가 “나는 우리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도박을 하든지 방종하게 놀든지 술에 취하든지 마약을 하든지 내버려둔다. 왜?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무관심입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끝까지 따라가면서 달래고 경책하고 매를 때리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매를 대거나 꾸지람을 하면 자식이 괴로워한다고 그대로 내버려 놓으면 나중에 그 자녀가 장성했을 때에 오히려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그 온전한 사랑에 이를 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십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온전한 사람이 됐습니까? 옛날과 비교하면 많이 발전했지만 온전한 사람이 되기에는 아직도 많은 껍질이 벗겨져야만 할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아직 새까맣게 멀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할 때는 칭찬하고 격려해주시지만, 우리가 잘못할 때는 징계하십니다.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느 날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죄를 범해도 하나님이 저를 꾸짖지도 않으시고 채찍질도 안하시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무디 목사님은 그 여자 교인을 가만히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왜 안 믿어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나오는데” “교회는 나와도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왜요?” “자식을 징계하지 않는 부모가 없는데 한 번도 징계를 안 당했다면 자식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매님은 길거리에서 남의 자식이 흙탕물에서 노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아이들을 꾸짖습니까?” “그냥 지나가지요” “그렇지만 자기 자식이 흙탕물에서 온몸에 흙칠을 하고 놀면 불러서 꾸짖고 징계하잖아요? 그러므로 자매님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신 적이 한 번도 없다면 비록 교회는 왔다 갔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징계와 교훈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 하나님의 채찍자국이 한두 개는 꼭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까닥도 안하시더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중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안됐습니다. 하나님의 자식이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 하나님이 한두 번 경계하시다가 안 되면 때리시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라고 고백했습니다.
4. 하나님 사랑의 깊이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체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좋을 때 함께 좋아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마음이 깊은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됐고 우리의 앉고 일어서는 것, 생각까지도 밝히 아십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의 머리털을 다 헤아립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어서고 앉는 것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동정과 사랑은 분명히 다릅니다. 동정은 그저 마음으로 ‘참 안됐다. 불쌍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가서 함께 끌어안고 울고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불한당을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동정만 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바르고 붕대로 싸매어 주고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려가서 치료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흘 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하도 통곡을 하고 울어서 초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고 “네 오라비를 어디 두었느냐? 가자!”하시면서 묘지로 가시는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머리를 산발을 하고 허리를 굽히고 흐느껴 울면서 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냥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 왜 우셨을까? 뻔히 살아날 것을 알면서 왜 우셨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고통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그냥 동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불쌍하다’라고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끌어안고 울고 함께 마음을 나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로 35절에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울 때 예수님이 우십니다. 우리가 웃을 때 예수님이 웃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에 동참하십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죄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하신 것을 보십시오. 1시간이 아닙니다. 2시간도 아닙니다. 3시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절실합니까?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으면 우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끝까지 그 엄청난 고통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의 깊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해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얼마 안 있으면 지나가고 말 것이다’ 슬픈 일이 다가와도 ‘얼마 있으면 지나갈 것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이 나를 사랑한다면, 인종도 국경도 시간도 초월한 그 사랑 속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그 한없이 넓은 사랑과 한없이 긴 사랑과 한없이 높은 사랑과 끝이 없는 깊은 사랑으로 사랑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랑의 자녀답게 성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율법의 옷을 벗어 버리고 율법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사랑의 옷을 입고 사랑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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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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