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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역설
2008.10.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우리가 약할 때 주님 의지하면 강하게 돼
하나님께 항복한 자 지혜롭고 행복한 자
욕심과 탐욕을 비운 자리 축복으로 채워져

 신앙생활에는 세상적인 삶의 원리에 정반대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예로 악을 이기는 길로 누군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했습니다. 우리 세상 생각하고는 다릅니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너도 한 대 때리라고 세상은 말하는데 성경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송사하여 겉옷을 가지려거든 속옷까지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적인 우리 생각과 주님이 주시는 지혜가 정반대되는 역설이 될 때가 많습니다. 또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받는 것이 복된 것인줄 아는데 주는 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입니다. 오늘 그 중에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내가 약할 때 강하다

 내가 약해서 쓰러질 지경인데 어떻게 강할 수 있습니까? 약한 사람은 누가 붙들어 주던지 지팡이를 집든지 휠체어를 타든지 자기보다 강한 것에 의지해야 합니다. 내가 강하면 다른 데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강하면 두 다리로 굳세게 서고 두 손으로 나를 방어할 수 있지만 내가 약하면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든지 자동차에 의지하든지 지팡이에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다가오고 우리가 약해지는 것은 강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순복음가족신문의 간증을 읽어 보니 우리교회 나오는 자매님이 처음 교회에 나왔다가 별 재미가 없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남편이 교통 사고로 목 신경이 끊어져 하반신 마비가 되어서 병원에 입원을 하니 살아갈 일이 막막해졌습니다. 어찌합니까? 별도리없이 그때부터 새벽기도에 나오고 주일 예배도 나오고 기도원에 가서 사흘동안 평생에 안해본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사 집에 와서 남편에게 안수기도하니 남편이 일어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지 강했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건강하고 자녀들이 건강한데 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이 하반신 마비가 되고 병원에서도 이제는 평생 하반신 마비로 살 수밖에 없다고 선언을 하니 그때야 강한자를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어서 건강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할 때 강하다는 것은 바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붙잡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큼직한 사건들은 강한 사람들보다는 대부분 약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운동을 할 당시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최초의 독일어 성경입니다. 또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고 하는 「천로역정」은 존 번연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괴로울 때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서 신앙고백인 천로역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밀턴은 그의 유명한 「실낙원」을 지었는데 그는 장님이 되어서 아무것을 볼 수 없을 때 상상의 눈을 뜨고 실낙원이라는 아름다운 장편시를 지은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은 나폴레옹 3세 때 빅토르 위고가 국외로 추방 당하여 망명생활을 할 때 고난 당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여 적은 책인 것입니다. 음악의 거성인 베토벤은 청각 장애가 와서 음악을 들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자기 이외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였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4선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힘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위에서 힘이 와야지 내 힘 가지고는 조그만 일밖에 못합니다. 큰일을 하려면 위에서 힘이 와야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힘을 얻으려면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고 안아 주시고 업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2. 내가 하나님께 항복할 때 이기는 자가 된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 뜻을 거역하면서 내가 내 중심에 서서 내 고집대로 산다고 하는 사람은 형편없이 약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깨어져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오며 하나님께 항복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사는 자는 강하게 보이나 실제는 형편없이 약한 자인 것입니다.

 야곱의 얍복 강 씨름을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처자들과 많은 짐승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가까이와 얍복강을 건너고 난 다음에 형이 있는 곳에 사자를 보내니 형 에서가 동생을 죽이려고 400명의 장정들을 데리고 출동을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 야곱은 간담이 녹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처자와 짐승떼에게 얍복강을 다 건너게 하고 난 다음 자기는 안건넜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건너가라! 건너가라!”고 하니 야곱은 “안가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고집이 세든지 초저녁에 씨름을 시작한 것이 새벽에 해가 뜰때까지 항복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손을 들어 환도뼈를 치니 뼈가 어그러져 쓰러졌습니다. 야곱은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큰일났습니다. 형이 오면 도망치기도 틀렸습니다. 환도뼈가 어그러져서 걸을 걸어도 그냥 걷지 못하고 몇 발자국 달아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나를 복내려 주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나이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야곱은 쉽게 말하면 사기꾼이라는 말입니다. “네 이름은 이제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 불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긴자라고 말했습니까. 그가 하나님께 항복을 하니 하나님은 항복한 자를 승리자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24절로 25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32장 26절로 28절에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실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졌는데 하나님은 진사람 보고 “너는 이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복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의지하니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온 형 에서의 과거의 원한이 눈녹듯이 사라지고 말에서 뛰어내려서 동생을 껴안고 화해하고 죽음을 면하고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싸우지 아니하고 승리를 갖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 항복해서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버리면 내 어디 가리까’ 그 찬송처럼 하나님께 항복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3. 내가 빈 그릇이 될 때 가득해진다

 ‘빈그릇이 되는데 어떻게 가득해 지느냐. 처음부터 가득한 그릇을 가져야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인생에 빈그릇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이 채워 주시지 가득히 담고 있으면 채울곳이 없습니다. 죄악과 세상이 가득하면 하늘나라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벌써 가슴속에 죄가 꽉 들어차고 세상이 꽉 들어차 있는데 하늘나라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다는 것은 죄와 세속을 회개하고 비워 버려야 천국이 들어올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빈 마음에 가득히 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와 세상을 다 회개하고 털어 버리고 빈그릇이 될 때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탐욕을 비워야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욕심이 꽉 들어차서 자기 욕심대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욕심은 우상입니다. 우리가 나무나 돌을 가지고 형상을 만들어 절하는 것만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욕심이 우상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는 절대로 천당에 못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아주 미워하십니다. 탐욕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절대로 채워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때도 십일조와 헌물을 아끼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데 십일조가 아깝고 헌물이 아까워서 그것을 안드리고 ‘하나님 축복만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탐욕을 비워야 그 그릇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그 그릇을 안비워 놓으면 복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 시작할 때 한푼도 없는 빈털터리었습니다. 그래도 내게 무엇하나 생기면 십일조는 반드시 드렸습니다. 이렇게 있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 늘 도움을 베풀었는데 그 어려운 시기에 심고 난 다음 잠시동안 어려움을 당했지만 50년의 목회생활에 99%는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축복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내가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아니하나 보란대로 그대로 해주신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로 12절에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야훼의 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시행하고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믿고 있으면 빈그릇은 다 채워지는 것입니다.

 젊은 사업가인 워너 메이커가 하루는 장미 화원을 잘 가꾼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은 워너 메이커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서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종류의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장미꽃들을 꺾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고 놀란 워너 메이커가 물었습니다. “아니, 왜 가지를 모두 칩니까?” 그러자 집 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다 쳐버려야 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가지를 잘라내도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큰 교훈을 얻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내 사업에 여러 가지 가지를 쳐서 자꾸 나누어 주면 축복을 받는구나!’ 가지를 그대로 두면 꽃들이 조그마한 것만 달리는데 다 꺾어버리니까 몇송이 피더라도 큼직하고 보암직하게 피는 것처럼 복도 자잘한 것은 다 나누어 줘야 큼직한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워너 메이커는 이 사실을 깨닫고 그의 사업은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미국의 대 재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과 탐욕을 비워 빈 그릇이 될 때 가득히 채울 수 있습니다.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고 사랑과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없는 것은 다 나눠주고 다 흩어주면 하나님께서 크게 열매맺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4. 내가 죽을 때 영원히 산다

 사람은 영혼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두사람 중에 한 사람이 죽어야 다른 사람이 사는 것인데 세상 사람은 속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만 살다가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고 지옥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살려면 정욕과 탐욕과 욕심인 겉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탐욕은 다 세상 육신에 속한 것 아닙니까? 보는대로 듣는대로 만지는대로 그대로 다 가지고 싶고, 방탕하고 허랑하는 육신을 따라 살면 영은 죽습니다. 육신을 죽이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은 육은 싫어 하지만 영은 사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안나오고 세상에 놀러 다니고 등산가고 낚시가고 하면 육은 재밌지만 그러나 영은 말씀을 먹지 못하고 굶주려 죽지 않습니까? 기도 안하고 TV 보고 있으면 육은 좋지만 그러나 영은 말라 죽습니다. 세상에 화려한 것에 취해서 세상을 따라 가면 육은 좋아하지만 영은 죽습니다. 영은 교회를 찾아와서 말씀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삽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21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항상 예수와 함께 육신의 세상에서 나는 죽고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꿈꾸고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원으로 해서 이전 것인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장사 되었다가 부활한 것은 새사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변화를 항상 생각하고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고 꿈꾸고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새사람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육체는 점점 죽이고 영적으로는 점점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태어나게 해주었지만 그 다음은 자기가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되고 장성하게 되어야 천국을 나가서 장성한 분량대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꿈꾸십시오. 예수와 죽었다고 믿으십시오.

 성경에는 내가 약할 때 주님께서 붙들어 주므로 강하고, 내가 하나님께 항복해서 두 손 들었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이기게 만들어 주시고, 나를 비우면 충만하게 되고, 내가 죽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와같은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도리를 따라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 깨어져서 항복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도와주옵시고 우리 자신을 항상 비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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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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