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로마서 4장 17절
3차원의 고난과 시련 갈등 속에 사는 우리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믿고, 꿈꾸고 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고 승리하는 삶 살게 돼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은 동물은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현재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꿈꾸며 마음으로 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동물과 달리 사람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1. 일반상식으로 사는 삶
일반상식만 가지고 감각적으로 사는 사람은 체험하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체험해 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봐야만 있지 눈으로 안본 것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설교를 마치자 어떤 젊은이가 나와서 목사님에게 대들었습니다. “목사님, 천국 봤습니까? 지옥 가봤어요? 나는 아직 천국도 못보고 지옥도 못 보았습니다. 천국이 어디 있으며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님이 난처해 하니 한 검은 안경을 낀 신사가 옆에 와서 하는 말이 “여보시오. 내 말 좀 들으십시오.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요” “어떻게 압니까?” “보이니까요” 그러면 “이 건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어떻게 압니까?” “눈에 보이니까” “당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요? 내가 여기 있지요” “어떻게 압니까?” “내가 나 스스로 만질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신사가 “여보시오. 나는 해와 달과 별들이 안보이니까 없소. 건물도 내 눈에 안보이니까 없소. 당신이 내 눈에 안 보이니까 당신도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안경을 벗으며 “나는 장님이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단 말이요. 안보인다고 없다면 나에게는 천지가 없는 것 아니오. 나는 눈에 안보여도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것을 알고 이 건물이 있는 것을 알고 당신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안단 말이요. 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에 청년이 머쓱해서 떠나갔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좁은 편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상식으로 사는 사람은 봐야만 믿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앉아있는 이 공간에는 수없는 라디오전파와 TV전파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안보입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라디오 전파가 지나가고 있고 TV전파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기계만 조절하면 다 귀에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귀에 안 들린다고 이 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원시시대 사람입니다. 반드시 우리 일반상식으로 생각하듯이 눈으로 봐야 알고 귀로 들어야 믿고 냄새 맡아봐야 알고 접촉해서 느껴봐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히 낮은 수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창조적인 삶
창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에 마음속에 감동을 늘 느끼고 살았습니다. 아직까지 신학교 학생으로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부흥회를 열어 보지도 못했지만 제가 목회하는 교회와 인도하는 부흥회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장님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것을 마음속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교회와 집회 장소에 몰려 올 것을 늘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인간적으로 그렇게 할 처지가 못되는 가난한 신학생이었는데 마음속에 생각은 굉장히 부요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는데도 내 생각에는 큰 교회와 수백, 수만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집회를 인도하는 모습을 늘 마음속에 생각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생각한 것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마음속에 생각이 장차 우리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밑천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말한 것입니다.
생각의 그릇이 없으면 아무 것도 담지 못합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것이 생겨나고 잘된 생각을 하면 잘된 것이 생겨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꿈꾸는 사람이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꿈꾼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시편 81편 10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꿈은 우리가 꾸고, 채워주시는 것은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입을 크게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적인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입니다. 서대문교회가 좁아서 여의도로 나오려고 할 때 우리 성도들이 모아놓은 현금이 100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 교회를 짓는데 10억이 필요했습니다. 요사이 돈으로 계산하면 1000억도 넘습니다. 그런데 단돈 100만원 가지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100만원+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 교회의 기공식을 하는 날 흐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습니다. 그 때 내 마음에 생각하길 ‘이 비바람 치는 인생을 걸어가야 되겠구나’ 그러나 제가 마음에 한 가지 믿음이 있었던 것은 100만원 밖에 없지만 예수님이 100만원을 가지고 사용하시면 200만원도 되고, 1000만원도 되고, 1억도 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을 믿어 마음을 담대하게 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시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긍정적인 말을 하는데는 똑같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아이고 못살아’ 하는 말하고 ‘아이고 잘살아’ 하는 말하고 필요한 에너지는 똑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에너지를 쓸 바에야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입술의 말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고 갈 길을 지정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란 감각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통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감각을 통해서 체험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다 감각을 통해서 체험해야 믿는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감각으로 체험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안보고 믿어야 복을 받지 보고 믿으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보지 않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는 신앙생활이 우리의 참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은 감각을 초월해서 믿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성경을 보면 골치가 아픕니다. 제가 예수 안 믿는 무당 할머니에게 성경을 갖다 주니까 하루 만에 도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 왜 가져왔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못 읽겠다고 합니다. 무당에게는 잔소리로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성령이 온전한 보배 덩어리인 것입니다. 황금과 같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모략과 재능이 들어있어 그 말씀대로 살면 영혼도 살고 마음도 살고 육체도 살고 생활도 성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보이는 것은 현실 그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말씀이 배후에서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이라도 재료가 없으면 음식을 못 만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재료인 말씀을 가지고 있는 이상 말씀을 읽고 말씀을 통하여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안 보이는 세계가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처럼 우리들도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라고 해서 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본 것입니다.
4. 신앙생활의 갈등
그러면 우리가 이런 것을 바라볼 때 우리 신앙생활에 자연적으로 갈등이 생깁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 속에 사니까 영혼이 따로 놀고 육체도 따로 놀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따로 놀면 가정에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 힘듭니다. 육의 눈과 영의 눈이 있어서 육의 눈이 보고 ‘안돼, 없어. 큰일이야’라고 판단해도 영의 눈은 하나님을 믿으니 ‘괜찮아.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거야’라며 내속의 육의 눈과 영의 눈이 서로 보고 싸우는 것입니다. 육의 눈은 영을 보고 ‘너 잘못 봤다’ 영의 눈은 육의 눈을 보고 ‘네가 잘못 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하시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읽을 때 ‘아멘, 할렐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몸에 육의 눈이 있고 영의 눈이 있으니 갈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신앙에 늘 갈등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또 마음에 있어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육의 생각은 영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의 생각은 육의 생각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5절로 7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는 육신의 감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대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하나님 말씀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감각은 내가 아직 몸이 아프다고 하는데 성경은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현재 어렵고 생활이 어려운데 성경 말씀은 ‘십일조와 헌물을 들여 하나님 창고에 양식이 있게 하고 하나님이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감각과 생각은 말씀과 너무나 다를 때가 많습니다. 이러므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서로 투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의 말과 육의 말이 또 있는 것입니다. 우리 혀가 세치 혀지만 육신의 말을 할 때가 있고 영의 말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말을 하면 낙심을 주고 영의 말을 하면 격려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갈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 갈등에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겨내면 신령한 생활은 물론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5. 승리하는 신앙생활
우리가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육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육의 생각이 부정적인 말을 하더라도 영의 생각을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영의 생각은 말씀을 따라서 훈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이 있어야만 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꿈이 없으면 자기 마음대로 행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언제나 크고 작은 꿈을 품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큰 축복입니다. 나에 대한 꿈, 남편에 대한 꿈, 아내에 대한 꿈, 자식에 대한 꿈, 나라에 대한 꿈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이근미 작가가 최근 출간한 「+1%로 승부하라」는 책을 재밌게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 책에는 전 세계 사회 각계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전 세계 커피 전문점 매출 1위를 달리는 스타벅스의 회장 하워드 슐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기업을 세우고자 한다면 위대한 꿈을 가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작은 꿈을 꾼다면 작은 것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꿈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작은 꿈 대신에 큰 꿈을 꾸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계 66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변화시킨 리더십 매니지먼트 인터내셔널(LMI)의 창립한 폴 마이어는 “당신이 간절히 바라고 마음속에 바라고 꿈을 꾸고 깊이 믿고 행동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꿈을 꾸고 믿음을 가지고 행하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지 감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느낌으로 살거나 감각으로 살거나 환경을 바라보고 요동하면 안 되고 내 마음에 믿었으면 줄기차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합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살아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달렸습니다. 우리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를 연구한 여러 실험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의 연구가 에마토 마사루는 말 한마디의 효력에 대해 ‘밥’을 가지고 실험했습니다. 유리병에다가 새로 밥을 지어서 한 유리병에는 새로 지은 밥을 넣고 겉에다 ‘감사합니다’라는 라벨을 붙였습니다. 다른 유리병에는 밥을 넣고 ‘망할 자식’이라는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 두 사람에게 매일 아침, 점심, 저녁에 이 유리병을 바라보고 병에 쓰인대로 말하게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 결과는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불러준 그 병의 밥은 아주 멋진 누룩이 되어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데 ‘망할 자식’이라고 한 그 병에 있는 밥은 썩어 고약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잔뜩 피고 만 것입니다. 말의 힘은 이처럼 엄청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식을 보고 “이 망할 놈의 자식아, 이 못난 놈의 자식아, 이 죽일 놈의 자식아” 그러면 썩어서 부패하지 않겠습니까? 죽고 사는 권세가 말에 있는 것입니다. 한 달 만에 똑같은 밥이 하나는 향기로운 누룩이 되고, 하나는 썩어 냄새가 나는 고약한 밥이 되는 것처럼 말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은 3차원의 감각적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4차원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육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삶과 영혼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삶은 확연히 틀린 것입니다. 육은 3차원의 세계에서 지배를 당하고 살기 때문에 창조적인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영은 4차원의 세계를 통해서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므로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기적을 행하는 역사를 하나님을 통해서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다 3차원의 삶에만 머물지 말고 예수 믿고 거듭나서 4차원의 세계 속에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꿈꾸고 하나님의 생각을 통하여 말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통하여 믿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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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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