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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
2008.03.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7∼10절

죄와 사망으로 얼룩진 우리 인생
예수와 함께 죽고 장사될 때
의·치료·축복·부활영생의 삶 살게 돼

일제 치하나 한국전쟁과 같은 고난을 겪어 본 사람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압니다. 그러나 풍요의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세대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감사와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고생하면서 산 것이 손해인 것 같으나 실제로 지나가 보면 그 배경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부요와 풍요를 감사하고 기쁘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가 고파본 사람이 밥의 귀중함을 압니다. 밥이 항상 많았던 사람은 밥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하지만 빈 밥그릇을 가지고 울어본 사람은 밥 한톨이 얼마나 귀한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이 들어봐야 건강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환난을 당해봐야 평안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 우리 속에 있는 보배

 우리는 우리 질그릇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정말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가? 못 보았는데, 예수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는데 질그릇 안에 보배가 어디 있느냐?” 그렇게 말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의 그 보배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고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 고통당할 때 기도하면 주님의 능력으로 해방을 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살아 계시구나.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기도할 것이 없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폐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해봤기 때문에 치료하는 예수님을 깨달아 감사하고 찬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내 건강했던 사람은 체험을 안 해봤기 때문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보다 크고 능력 많으신 분이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알려면 적군과 싸워봐야 아는 것입니다. 적군에게 지면 내속에 계신 예수님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적군에 이기면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이 과연 능력이 계시구나’라는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니 로페즈라는 여성은 47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회생불능의 뇌사상태라고 말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임신 4개월이었습니다. 그 운명이 아기의 운명과 함께 결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산소호흡기 등 생명보조장치를 모두 떼도록 하고 임종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그녀의 뱃속에서 아기들이 심하게 꿈틀거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뇌사상태였던 대니 로페즈의 뇌파가 갑자기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뇌파가 완전히 죽었는데 아기가 뱃속에서 발로 차고 몸부림을 칠 때마다 뇌파가 살아 움직인 것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이 여인은 뇌사 상태에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의 예측을 깨고 무의식상태에서 건강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후 여인은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더니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깨어난 후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의식이 가물가물해 질 때쯤 뱃속에서 괴로움으로 요동치는 아이들의 태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고, 나는 절망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순간 내 마음에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라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녀는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 주셔서 이 아기들을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뇌는 죽었는데 그 영이 속에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녀가 뇌사상태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아기를 순산하고 그 모친도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보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사람이 뇌사상태에 있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의학적으로 완전히 뇌가 죽었는데 뇌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가 뱃속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자기 속에서 영이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 나와 어린 아기를 살려 달라’고 기도한 결과 응답받은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안 겪어본 사람은 뇌사상태에서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봐야 빛이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죽음이 있어봐야 생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봐야 해방시키는 주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 죽을 지경일 때 주님께 의지하면 ‘주님은 정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로 받아들여 예수와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냥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합니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아침, 점심, 저녁 순간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을 감당케 하셨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죽음을 걸머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철학이 아닙니다. 신학과 도덕의 훈련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죽음을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수치를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어서 장사지내 버리면 그 다음 하나님은 능력으로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죄와 세상과 병과 저주와 가난과 죽음의 공격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 가도 죄가 있고 세상과 마귀가 있고 병이 있고 저주와 가난과 실패가 있고 사망과 절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살면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모든 것을 이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짊어지고 우리도 같이 그 이김에 동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김 내 이김, 예수 승리 내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면은 면역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겼기 때문에 이긴 예수님을 걸머지고 있으면 예수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이기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이기고, 병에 대해서 이기고, 저주와 가난에 대해서 이기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걸머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겨울 초에 독감주사를 두 번 맞았습니다. 독감주사를 맞았으므로 저의 몸에는 면역력이 생겼습니다. 면역이 있으니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내 면역력에 잡혀 먹히는 것입니다. 면역을 걸머지고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면역을 걸머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귀와 세속이 꽉 들어찬 세상, 병이 득실 거리는 세상, 저주가 꽉 들어찬 세상, 사망과 음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세상에서 내가 살려면 면역이 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내 속에 있어야 되는데 내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그 주사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죽음을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항상 생각하고 예수의 죽음을 항상 바라보고 예수 죽음이 내 죽음인 것을 믿고 예수가 나와 함께 죽었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죄가 와도 이기고, 세상과 마귀도 이기고, 병도 이기고, 저주도 이기고, 사망과 음부도 이기는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수영을 하다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 청년은 아픔의 장소를 피하기 위해서 캐나다로 이주를 했습니다. 캐나다에 가자마자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죽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자기를 향하여 몰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청년은 힘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흐느껴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세요. 응답해주세요.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결단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 마음속에 넘치게 꽉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자기 애인이 죽은 슬픔을 이길 수가 있었고 어머니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는데도 마음에 위로와 평화가 넘쳐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기록한 찬송이 찬송가 487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입니다. 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아픔이 변하여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향에 편지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는데,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치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조지프 스크리븐인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귀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날 때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날 무대를 만드는 것밖에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와 치료와 평강과 생명이 더욱 강하게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어려움이 다가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가 다가오므로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해봐야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좋을 것 같아도 혼자 살면 정말 고집쟁이가 되고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고집스러운 노총각, 노처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살면서 서로 의견충돌도 있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양보도 하고, 그래서 이해도 하고 동정도 하고 인내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우리는 죄 있는 세상, 마귀와 세속적인 세상, 병이 있는 세상, 저주가 있는 세상, 사망과 음부가 입 벌리고 있는 세상에 살게 해준 것을 감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면역이 된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는 능력의 신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약해보면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속에서 주님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속에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이 내가 약할 때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것을 감사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원망 불평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종로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 때는 한국전쟁 이후 나라가 회복 된지 얼마 안 되어서 황무지였습니다. 천막부흥회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구원을 받고 병자가 나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내게 와서 “조용기 목사님 안수 좀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제가 무슨 기도제목인지 물으니 “나도 폐병 들렸다가 다시 낫게 안수해 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가정은 매우 잘 살았어요. 나는 아무 돈 걱정 없이 건강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교회도 아버지가 지어주셔서 걱정 없이 목회하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신지 안 살아 계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목사님은 폐병으로 피를 토하고 죽음에 이르렀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나셨잖아요. 역사적인 예수님이 아니고 형상적인 예수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설교하시는데 나는 그렇게 설교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내게 안수해서 나도 폐병 걸려서 피를 토하고 안 죽을 만큼 고통 하다가 죽지는 말고 살아나도록 기도를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폐병이라는 고통스러운 무대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했고 그 체험에 서서 담대하게 50년을 목회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통을 오히려 감사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나타날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의 종이 된 것은 그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가 충만하게 넘치게 된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해도 주님은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함으로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저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살았는데 석탄을 실은 기차가 지나가면 피난민들이 석탄차 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총을 쏘고 석탄 훔치는 사람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한 40대 아버지가 10살쯤 된 아들을 데리고 와서 석탄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헌병이 뛰어 오는 것을 보고 화차위에 있던 아들이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때 굵은 석탄 덩어리 하나가 화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아이가 그것을 끄집어 내려고 화차 밑에 기어 들어가자 기차가 ‘덜컹’하고 움직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 저 어째! 저 어째!” 고함을 쳤지만 아무도 그 아이를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비호같이 뛰어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화차 밑에 뛰어 들어가서 아들을 밀어내었지만 자신은 미처 나오지 못하고 기차 바퀴가 그 허리를 지나가 ‘뚝 뚝 뚝’ 허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저는 들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눈에 눈물이 뚝뚝 흐르고 코에 콧물이 주루룩 흐르며 죽어 가면서도 어린 아이를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중학생 시절이니 ‘장가가서 또 낳으면 될 것인데 왜 그 아들을 위해서 죽느냐. 그 아들 때문에 왜 죽느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는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장가를 들고 자식을 낳고 난 다음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윤리와 도덕, 생명의 존엄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사랑은 맹목적인 것입니다. 저라도 뛰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일단 살려놓고 후에 어떻게 될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 계산하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엄청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아들조차도 아버지를 향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통곡 했습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묶임을 받아 강요를 받아서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지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면역력을 주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항상 걸머지고 사는 우리들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습니까? 몸서리치게 높고 깊고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마귀가 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주어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으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고 질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와 가난에 대해서 죽고 절망과 음부와 지옥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걸머지므로 함께 죽어 함께 면역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를 통해서 역사하므로 우리는 의에 대해서 살고 거룩함에 대해서 살고 치료에 대해서 살고 축복에 대해서 살고 부활 영생에 대해서 살았음을 감사합니다. 이 생명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이 세상에 빛을 비취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어떠한 일에도 불평과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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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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