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장 12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그 삯은 사망
죄를 사해주시는 은혜에 감사할 때 형통
하나님이 용서하셨듯 서로를 용서해야
‘죄’의 원어는 ‘하말티아’입니다.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 버린 것을 말합니다. 죄는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삐뚤은 행동이 원죄가 된 것입니다. 그 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삐뚤어지고 인간과의 관계도 서로 삐뚤어져 온 천지가 죄로 꽉 들어찬 것입니다.
인간은 여러 종교를 통하여 이 죄와 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나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이 안됩니다.
1. 죄의 값은 사망이다
아담의 후예는 다 죄중에 잉태되고 죄중에 태어납니다. 이 죗값은 죽음입니다. 엄청나게 큰 값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입만 딱 벌리고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이 죗값을 지불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다 사망 아래 있고 이 사망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굉장히 큰 빚을 지었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그 빚을 청산할 도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태산 같아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짊어지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죄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찾아봐도 우리를 도와줄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고 또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한번에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아무도 우리 죗값을 지불하려고 나오는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친히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죄없이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600여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용서와 바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한없이 많더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갚아주셨으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값없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32편 5절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야훼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용서받은 화목한 관계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의 담을 헐어 버리고 화목해야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심판에서 구원의 관계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결코 화목 될 수 없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심판에서 구원으로 옮겨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빈손 그대로, 못난 그대로, 죄있는 그대로 오라. 내가 너를 위해서 청산했으니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의롭다하게 만들어 주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고 구원을 얻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희생제물이 되셔서 핏값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선물은 감사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2. 일평생 의롭게 살기 위하여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한평생 의롭게 살아야 하는데 자꾸 죄악 가운데 떨어집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지고 죄악가운데 넘어집니다. 그렇지만 매일같이 우리가 목욕을 하는 것처럼 죄악의 먼지와 티끌을 회개하고 씻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매일같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죄가 점점 쌓여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대화를 끊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았다고 해서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더욱더 자기의 마음을 살피고 죄악을 회개하고 보혈로 씻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선생은 로마서 7장 21절로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회개하고 우리에게 주신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고 난 이후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하고 성령께 의지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후 이제 하나님께 용서 받는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냥 내 죄만 고백하면 되는데 용서해줄 사람이 있는데 용서를 안 해주고 내 죄만 고백한다면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고 난 다음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 21절로 2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내게 죄를 지은 사람이 와서 용서해 달라고 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를 들어 설명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왕에게 1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그래서 왕이 빚을 갚으라고 하자 못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처자를 다 종으로 팔고 가산을 다 팔아서 갚도록 하라”고 왕이 말하자 그가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무릎을 꿇어 빌매 왕이 불쌍히 여겨서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밖에 나가다가 자기와 똑같은 관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을 졌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자는 상대의 멱살을 잡고 “내 돈 갚으라. 100데나리온 갚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상대는 “나는 지금 돈이 없으니 말미를 주면 갚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며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왕에게 용서받은 자는 “아니다. 용서할 수 없다. 안갚으면 너를 가만 안두겠다”며 친구를 감옥에 처넣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본 동료들이 왕에게 가서 보고했습니다. “왕께서 1만 달란트 빚진 당신의 종을 용서해 주었는데 그는 자기에게 불과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이럴수가 있습니까?” 화가 난 왕은 “그 놈을 당장 잡아 오너라”고 명령하고, 잡혀 온 그에게 “이놈아, 네가 간청하므로 내가 1만 달란트를 용서해 주었는데 너는 네 동료에게 100데나리온도 용서해주지 못하고 감옥에 가뒀느냐? 여봐라, 이 놈이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넣어서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시고 “너희도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 죗값으로 우리의 생활 속에 많은 고통을 당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어떤 고통이 다가올까요? 기도를 응답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기도의 문을 막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로 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아무리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기도응답 받기를 간구해도 하나님은 “네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너희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네 죄가 있는 이상은 나는 너의 기도에 응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 11장 25절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도할 때 내가 이웃의 죄를 용서안해 준 것이 생각 나거든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떠나보내야 합니다. 씻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3. 왜 눈에 안 보이는 옥에 갇히는가?
우리가 기도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영적으로 메마르고 억압을 당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이유를 발견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용서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를 그러한 메마름의 감옥 속에 처넣어 버린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기록한 것처럼 허물을 들춰내고 남의 허물을 탓하고 상처를 입히면 하나님은 “너도 허물투성이인데 왜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남의 죄를 용서하면 내게 하나님의 영광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용서해야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불안, 억압, 고통, 슬픔, 우울한 감옥에 빠져 있습니다. ‘왜 나는 늘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할까? 왜 고통스러운 일과 슬픈 일이 많을까? 왜 마음이 우울할까? 내 마음의 감옥에서 왜 나오지 못할까?’ 이렇게 탄식합니다. 이것은 용서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107편 10절로 11절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기록된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존자의 뜻은 용서하라는 것인데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에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할 때 마음이 억눌리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스위스에 안드레아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수년 전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세상을 증오하며 싸움을 일삼는 외고집 늙은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나타나면 슬금슬금 피했습니다. 왜냐하면 욕을 잘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싸움을 걸고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용서’에 관한 책을 한 권 선물로 주었습니다. 안드레아 할머니가 그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또한 자신이 상처를 준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삶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늘 분노로 짜증만 냈던 마음이 사랑과 기쁨으로 넘치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마음속에 막힌 사랑의 샘물이 터져 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안드레아에서 해피라고 바꿨습니다.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자 해피 할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즐겁고 생기가 넘쳤던지 88세에 알프스 정상에서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아 프랑스 잡지의 표지 인물이 됐습니다. 또한 90세에 단독으로 비행기를 몰고 곡예비행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습관을 완전히 버리고 용서하는 새로운 삶을 살던 할머니는 사망하기 전에 재산을 사회에 헌납했습니다.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13세기 작품 예수의 초상화마저 자기에게 용서를 가르쳐주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책의 저자에게 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용서함으로 삶이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감옥에 갇히는 것은 마음이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과 원망으로, 불안과 고통과 슬픔과 우울로 꽉 들어찼기 때문인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몸과 마음의 감옥에 갇혀있어 자유를 상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속에 용서하지 못한 미움이 있으면 그것이 우리를 감옥에 갇히게 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만들어서 기도를 응답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심인성 병 즉 두통, 소화불량, 불면증, 피부병 등은 의사들이 말하기를 60∼70%는 마음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억압되어서 심인성 병으로 고생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용서와 치료는 언제나 손과 손을 잡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로 14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용서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반드시 해야 될 의무요, 책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없는 죄악을 용서받았은즉 우리에게는 이웃을 용서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의 빚을 진 사람인 것입니다. 용서해주어도 좋고, 안 해주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용서의 빚을 졌으므로 그것을 이웃에게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해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용서와 사랑을 반드시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 암 과학자 소사이어티는 각종 질병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가장 큰 발병 원인은 정신적, 심리적 요인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 가운데 스트레스는 호르몬의 불균형을 일으켜 우리 몸에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또한 마음에 증오심과 공포심, 우울증이나 울화증은 우리 몸의 생체 리듬을 파괴시켜서 우리 몸 안에 화학작용을 일으켜 돌연변이적인 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 마음에 사랑이 넘치고 영성이 높으면 신체의 면역력이 높아지고 효소 작용과 호르몬 신호 체계가 정상화됩니다. 그래서 종교와 신앙심, 긍정적인 신념이 높으면 높을수록 신체의 면역력이 강화되고 호르몬 신호체계를 정상화시켜 질병으로부터 우리 몸과 마음을 지켜줍니다. 그러므로 교회와서 즐겁게 찬송 부르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마음에 평화와 기쁨과 안정을 가지면 놀라운 치료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우리 병의 대부분이 마음의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미움, 분노, 시기, 질투, 원한, 좌절감 등이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용서로써 제하여 버리면 심신이 건강해지고 장수하게 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죄 사함을 받고 좋은 관계로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용서와 사랑, 온유와 겸손을 갖고 인간관계를 맺어 하나님께 회개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원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되지만 믿고 난 다음 짓는 죄는 반드시 이웃을 용서해야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기 전의 죄는 회개하고 믿음으로 다 청산되지만 믿고 난 이후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와 이웃과의 관계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믿고 난 다음 우리의 삶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너와 나와 함께 손과 손을 마주잡고 웃으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면 하나님도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다 죄짓고 불의하며 추악하여 버림받아야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몸 찢기고 피 흘려주셔서 용서와 화목과 영생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들이 이제부터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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