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신앙의 집짓기와 터닦기는 일생의 작업
금·은·보석으로 튼튼하게 세워서
영원한 터가 되시는 예수님 의지해야
불이 나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잿더미로 변하고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철골이나 시멘트로 지은 집은 골조가 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주님의 심판을 받을 때 세상 것으로 신앙의 집을 지은 자는 다 잃어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심판의 불을 능히 이기고 영구히 설 것이요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 중에 서로 대조가 되는 것으로 이탈리아의 토스카 지방에 있는 피사의 사탑과 미국 뉴욕 맨하탄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습니다. 이 두 건축물을 비교해 보면 건물의 터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큰 바위를 기반으로 기초공사를 했기 때문에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사의 사탑은 기반이 약한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1174년 착공 이래로 현재 5.2m 기울어져 붕괴의 위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터를 잘 닦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집과 터 닦기
우리 신앙의 집 역시 터닦기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인본주의적인 터를 닦아서 그 위에 자기의 미래를 건축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적인 터는 인간의 철학이나 학문이나 수양이나 노력이나 고행이나 종교 등 자립으로 이룬 터 위에 자기 인생의 집을 짓습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터를 닦아 놓은 것은 다 무너지고 남아있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혼합주의적인 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으로 터를 닦아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더라도 인간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아무리 은혜를 주시더라도 우리가 금욕하고 고행을 해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수가 있다’라는 것으로 혼합주의적인 터를 닦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집을 지을 터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과 부활의 터전은 영원하고도 절대 완전한 터인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 영원히 청산해 버려서 어떠한 죄악의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터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로 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터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 절대로 대가를 주고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놓은 엄청난 대 역사인 것입니다. 이 터전위에 우리 사람은 아무것도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터전을 우리가 은혜의 선물로 받아서 그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터는 하나님이 홀로 영원히 닦아 놓은 터이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은 이 터를 우리에게 공짜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여서 그 위에 우리가 인생의 터를 닦는 것입니다.
2. 집짓기
우리가 인생의 터위에 집을 지을 때 성경은 금으로 짓는 집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보면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성소와 지성소는 모두 금으로 장식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금으로 장식하는 것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금은 또한 사랑을 표시합니다. 우리가 금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되 우리 신앙중심이 사랑으로 실천하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처럼 위대한 일을 행할 수도 있겠으나, 사랑이란 가까운데 있는 내 이웃을 돌보는 일입니다. 내 주위의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그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산다는 것은 바로 나보다 못한 사람, 나보다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롭고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베푸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모시는 삶이요, 황금으로 집을 짓는 삶인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로 일생을 헌신했던 에릭 리델은 원래 영국의 육상 선수였습니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100미터 선수로써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올림픽 100미터 경주에서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의심치 않았는데, 마침 경기가 있는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에릭 리델은 주일에 뛸수 없다며 교회 출석을 선언했습니다. 영국 황실과 국민들의 질타에도 끄떡하지 않은 그는 출전을 하지 않았고, 그 다음날 400미터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400미터 경기에서 메달을 목에 걸 확률은 희박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경기전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고함을 치면서 손을 흔들기에 보니까 쪽지 하나를 들고 있었고 그 쪽지가 에릭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리델은 마치 하늘을 날듯한 감격을 느끼고 400미터에 출전해 금메달을 영국에 안겨주었습니다.
황금같은 신앙생활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이요,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은 금으로 인생을 짓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9편 9절로 11절에 “야훼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야훼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터전에 은으로 일생의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은 구속함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은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잘 이해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받아들이고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때 예수님은 거기에서 몸찢고 피흘려 우리의 죄와 불의와 추악을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와 의와 영광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이 세상 마귀와 세속을 다 멸하고 거룩함과 성결함, 성령충만의 삶을 주었으니 그를 따라서 거룩하고 성결하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육체의 병을 다 제하고 치료와 건강을 주셨으니 믿음으로 건강을 얻어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저주와 낭패와 절망을 이기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셨으니 그것을 믿고서 삶에 저주와 가난을 이기고 형통하고 살며 십자가를 통하여 사망과 음부를 멸하고 부활, 영생, 천국을 주셨으니 이것을 믿고 천국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구속받은 신앙을 가지고 철저히 자기의 새로운 신분, 새로운 자화상, 새로운 자기 지위를 확실히 알고 사는 삶은 은으로 집을 짓는 삶인 것입니다.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이나 의식적으로 믿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예수믿는 정체성이 확립되어서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치료받았다. 복받았다. 천국 영생인이 되었다. 예수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믿고 이 가운데서 승리하고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도해서 죄악과 절망과 슬픔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삶을 사는 것은 은으로 집을 짓는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로 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다음 보석으로 집을 짓는 것은 ‘아름다운 장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10절에 “내가 야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에 찬란한 보석으로 단장한 것은 보석으로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 보석은 무엇이냐, 승리의 은사가 있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하고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되 성령의 은사가 없으면 보석이 없는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여 지혜의 말씀이 있고 지식의 말씀이 있고 영분별이 있고 방언도 하고, 방언 통역도 하고, 예언도 하고, 믿음의 역사도 일어나고 권능의 역사도 일어나고 병고치는 역사도 일어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같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보석으로 단장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터전위에 보석으로 집을 짓는 자는 성령충만하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가득합니다. 성령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보석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도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11절에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어떠한 집입니까? 주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며 살려고 하는 이러한 사람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를 안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서 인생을 살아가기는 살아갑니다. 주일에 교회도 나오고 십일조도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도 하는 것입니다.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지만 교회밖에 나가면 곧장 세상 욕심을 따라 명예, 지위, 권세, 부귀, 쾌락을 따라서 사는 육신에 속한 성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로 19절에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 중심으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 욕심이나 명예, 지위, 권세, 부, 쾌락을 따라서 인생을 살면 예수를 믿기는 믿었으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인생이 되어서 나중에 주님이 심판하실 때 주님의 불에 다 타버리고 구사일생으로 불에서 끄집어낸 나무 조각같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상급은 하나도 없고 수치와 곤욕만 당하고 말것입니다.
3. 무엇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나무나 풀이나 짚을 다르게 하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이 우리 신앙을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나무나 풀이나 짚을 만들겠습니까?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땅속 깊은 곳에 있습니다. 땅을 캐고 바위를 깨뜨리고 들어가야 금이나 은이나 보석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캐낸 광물은 제련을 통해서 찌꺼기를 걸러내 순수한 금이나 은이나 보석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고난의 터널을 통하고 불같은 시련을 통해 자기가 깨어지고 회개를 통해 변화받아야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은 신앙생활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우리를 캐내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신앙생활에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생애속에 금과 은, 보석을 캐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고 견디고 변화받으면 금같은 신앙이 되고 은같은 신앙이 되고 보석같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깨어지고 불을 통할때면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깨어지고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사랑못한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고 진실로 주님 중심으로 주님의 구속사업을 믿고 은혜의 사람이 되고 성령 충만하여 보석같은 은사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고난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믿는 사람으로 큰일을 한 사람은 인생에 큰 고통을 통해서 깨어지고 파헤쳐지고 변화받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이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보물섬의 작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통 속에서 명작을 집필했고, 테레사 수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힌 만성두통을 참아가며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파스칼은 청년 시절부터 괴롭힌 온몸의 통증을 이겨내고 ‘팡세’를 남겼으며, 베토벤은 청각장애의 고통 속에서 불후의 명곡을 만들었습니다. 선교사 마틴은 폐결핵과 악전고투하며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프랑스의 화가 르느와르는 류머티즘의 고통을 이기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구세군운동을 주도한 캐더린 부스는 “내 삶에 있어서 단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결코 고난 없이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로 나무나 풀은 작은 불씨에도 쉽게 타버리는데 금과 은은 아무리 큰 불에도 쉽게 타지 않습니다. 고난의 터널을 통하고 불 같은 시련을 통해 자아가 깨어지고 회개하고 통회하고 변화받는 금같은 사람, 은같은 사람, 보석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변화되고 살만한 곳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삿갓조개는 바위나 배 밑창에 붙어서 삽니다. 이 삿갓조개는 워낙 집착력이 강해서 바위를 깰지언정 떼낼 수는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삿갓조개가 이렇게 강하게 붙어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오랫동안 파도와 싸웠다는 점을 꼽습니다. 파도의 힘은 시속 500Km의 엄청난 바람과 비슷한 힘으로 조개를 때립니다. 이렇게 강한 파도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남기 위해 삿갓조개는 엄청난 힘을 키워서 바위에 바짝 붙어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한가지입니다. 많은 풍파와 시련을 통하면 예수님께 바짝 붙고 더 바짝붙고 더 바짝 붙어서 나중에는 어떻게 되어도 예수님께 떨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보석 중의 보석으로 여기는 것은 다이아몬드입니다. 바로 이 다이아몬드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보면 놀랍습니다. 인조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과정은 탄소로 이루어진 숯을 1700도의 고열로 가열한 뒤에 5만 기압의 무게로 압축시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아름답고 영롱한 다이아몬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죄가 많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시련과 환난이 다가와서 불같은 시험과 환난의 어려움이 누르면 다이아몬드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고난당할수록 우리는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지고 변화받고 영광스러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믿는 신앙생활에 따라오는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피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믿음으로 주의 품에 더 안기는 삿갓조개나 다이아몬드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지상에 있습니다. 깨뜨릴 필요도 파헤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발에 차이는 것이 나무나 짚이나 풀인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좇아 살고 자아가 깨지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은 나무나 풀이나 짚과 같은 삶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행복도 가져오지 않고 도움도 가져오지 않고 복음을 위한 영광도 나타내지 못하고 자기나 겨우 턱걸이 구원을 받아서 하늘에 올라가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통하게 되면 이 세상 일생사라는 것이 다 불타 버리고 자기는 불구덩이 가운데 겨우 목숨만 건져 나오는 사람처럼 구원을 받게 되고 수치스럽게 되고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집정관으로 강력한 지도자이자 용맹스러운 군인으로 잘생긴 외모에 머리도 비상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그는 ‘은빛 목청을 가진 로마의 웅변가’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적이고 말초적인 욕구에 따라 사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집트로 원정을 간 그는 제국의 중요한 순간에 클레오파트라를 보고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서 그녀와 불륜관계를 맺고 자신과 세상의 지도자로서 갖고 있던 권력과 생명까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일시적인 세상의 나무나 짚이나 풀같은 쾌락에 빠져서 일생을 불태우고 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따라 살면서 자아가 깨지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은 나무나 풀이나 짚이 작은 불씨에도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터가 되십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다 동일합니다. 똑같은 영생의 터전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서야 됩니다. 우리가 몸을 떠나가든지 주님이 강림하시든지 언젠가 주님앞에 우리는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세우지 않는 집은 터전도 없으니까 통째로 불타 잿더미 속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구원을 받아 살 수 있는 사람은 금으로 인생의 집을 짓고, 은으로 집을 짓고, 보석으로 인생을 지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칭찬과 찬양과 박수 속에 천사의 환호를 받으며 영원한 영광 속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금으로 은으로 보석으로 집을 짓게 도와주시옵소서. 금같은 믿음, 은같은 믿음, 보석같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 신앙생활을 하게 도와주시옵시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의 포로가 되어 나무나 짚이나 검불로 집을 짓고 살다가 일생을 마치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지면보기
행복으로의 초대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