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6장 38절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같은 우리 인생
야훼를 의지하고 선을 행하며 살 때
복되고 풍성한 은혜의 삶 살 수 있어
하나님과 마귀의 차이는 뚜렷합니다. 하나님은 만유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즉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빼앗아 움켜쥐는 악령입니다. 즉 미움의 영인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보좌까지 빼앗으려 했고 아담을 꾀어 탐욕을 갖고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게 하여 타락시켰습니다. 예수님에게조차 다가와서 탐욕을 갖고 자기를 섬기도록 유도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생명을 주심으로 만복의 근원이 되시고 마귀는 항상 도적질하여 움켜쥠으로 만악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1. 주는 자의 복
성경은 주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주는 자가 복을 받습니까? 주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가만히 있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희생해서 이웃을 돌보아 주므로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희생 제물로 삼으신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는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생명을 바쳤습니다. 몸 찢기고 피를 흘려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볼 때 행위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안하시는지 어떻게 압니까? 성령님은 하늘 보좌를 떠나셔서 2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와 계시며, 교회에 와 계시며 우리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와서 우리의 짐을 걸머지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어떻게 느낍니까? 우리를 돌보시는 어머니의 손길이 우리의 모든 어린 시절에 나타나기 때문에 어머니의 손길을 생각할 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랑 역시 우리의 기도하고 말씀 읽고 헌신하고 회개하고 진리를 따라가는 모든 일이 성령님의 손길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과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 안에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 자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태양을 못 보아도 햇빛이 비취는 것을 보면 태양이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의 가슴속에 사랑이 있고 우리가 이웃에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그 사랑이 있는 곳에 바로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마귀는 절대로 사랑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의 실천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를 위해 일생을 내어주었습니다. 그의 삶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그의 삶은 비록 아프리카 정글에 있었지만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움이 넘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기쁨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 지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목사이면서 교수, 철학, 신학, 의학 박사이며 문필가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내어 던지고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여기서 생명을 바쳐 일합니까?” 슈바이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말로 사람을 감동 시킬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사랑을 아무리 말로 설명을 해도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이곳에 온 것입니다. 저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건강과 행복도 선물로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실로 슈바이처는 91세까지 사랑을 실천하다가 1965년 아프리카 가봉 땅의 한 병원 묘지에 묻혔습니다. 이와 같이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를 위해 일생을 내어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랑 속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슈바이처 박사와 같이 있으므로 비록 문명에서 멀리 떠난 아프리카 정글에 있었어도 그는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쳤으므로 사람들 보기에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희생적인 삶을 산 것 같지만 실제는 사랑 속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하나님과 같이 행복하고 기쁘고 만족스럽게 지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의 빈민굴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캘커타의 빈민굴은 너무나 비참한 상황인 것입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병들고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곳에 일생을 바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고 위로하고 용기와 힘을 준 삶을 살았는데 다른 사람보기에는 너무나 외로운 삶 같습니다. 너무나 큰 희생 같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일생은 큰 기쁨과 행복과 만족함이 있었습니다. 왜 그런 역설적인 일이 일어날까요? 사랑을 실천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자가 없으되 사랑하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서 사랑을 실천하므로 하나님과 함께 했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그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행복을 그 마음속에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생애 속에 하나님이 나타났고 그러므로 그는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큰 사랑은 크게 주고 작은 사랑은 작게 줍니다. 큰 사랑을 무엇으로 압니까? 크게 주고 희생한 것이기 때문에 큰 사랑입니다. 적게 주고 적게 희생하면 적은 사랑인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자꾸 빼앗습니다. 미움은 빼앗는 것입니다. 큰 미움은 크게 빼앗고 작은 미움은 작게 빼앗는 것입니다. 사랑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시면 행복하고 기쁩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 즐거움이 넘치기 때문에 하나님 없는 환경은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 놓아도 그 속에 기쁨과 행복은 없습니다. 있는 것 같이 마귀가 꾸미지만 그것은 마귀의 거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발전하고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옛날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만 실제 마음속에 의와 평강과 희락, 믿음, 소망, 사랑은 옛날보다 엄청나게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집을 지어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집에 내용이 없습니다. 미움 속에는 마귀가 있고 불행하고 슬픕니다. 오늘날 세상에 불행이 많고 슬픔이 많은 것은 마귀가 세상을 점령하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계속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움은 언제나 슬픔을 가져오고 고통을 가져오고 우울하고 좌절함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떠난 문명과 부요한 삶이란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와 계시면 그 속에 자연적으로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넘쳐나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절대로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 부귀, 영화가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갖다 주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인류가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 개인의 삶의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2. 참 행복과 기쁨의 삶을 위하여
우리가 참 행복과 기쁨의 삶을 위해서는 남을 사랑하고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에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한없는 영적인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것입니까? 육신의 고통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대못으로 생살이 찔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6시간 동안 몸부림치니 육체적 고통은 극한에 도달했습니다. 사람이 억지로 죽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속사람은 한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좇아 자기를 바쳐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이십니다. 육체는 못박혀 나무에 달려 한없는 고통을 당했지만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했으므로 그 영혼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기쁨을 예수님은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면 부메랑의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짐승을 잡을 때 사용하는 무기로 던지면 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고 남을 위해서 희생을 하면 그 사랑과 희생의 공로가 우리에게 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 내 자신이 손해를 보고 죽으면 사라진줄 아는데 그것이 나중에는 30배, 60배, 100배가 되어 열매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는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면 사랑이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서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위해서 희생하면 나중에 희생의 결과로 축복이 내게로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이웃을 복되고 기쁘게 해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 마음속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떠한 형태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말씀과 기도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데는 큰 힘이 안 들어도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데는 굉장히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기도는 쉽게 하더라도 부모,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거나 이웃을 위해 기도하거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힘이 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웃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내게 힘들고 괴로운 일이지만 이것을 실천하면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돌아오고 진리의 축복이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7절로 8절에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 말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마음으로 남에게 믿음을 나누고 소망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평화를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위로를 나누고 용기를 나누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나누면 소망의 햇빛이 내 마음속에 비춰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구름위에 덮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슬픔, 좌절에 눌려 있는데 내가 가서 따뜻한 사랑을 베풀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기쁨을 나누고 일어날 수 있게 격려해 주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이웃을 도와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나누면 나눌수록 나는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햇빛이 가슴속에 비춰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적으로 이웃을 도와줘야 되는 것입니다. 준다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행복과 기쁨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물질을 도와주어야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적은 물질 하나라도 내가 정성으로 이웃을 도와주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되고 그 사랑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늘 달라고 하고 움켜쥐기만 하고 빼앗으면 마귀의 미움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가 시간들여, 물질들여 몸들여 섬기고 봉사하면 하나님이 그 사랑 속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 내 마음속에 기쁨과 행복과 평화가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2편 5절에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9절에는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허무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반드시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사망으로 거두고 신령한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고 기쁨을 심으면 기쁨을 거두고 평안을 심으면 평안을 거두고 남에게 용기를 심으면 용기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움을 심으면 파괴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좌절로 심으면 절망으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으로 심으면 낭패와 실망으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법칙을 우주에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심으면 거둡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주든지 무엇을 심든지 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주는 것입니다. 인색하게 살면 내게 돌아오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풍부하게 주면 풍부하게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가 하얗게 말랐으나 생기의 성령이 불어오니까 큰 군대가 되어 일어난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에게 넘쳐나므로 생활이 생명으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람이 메말라가고 더불어 사는 마음도 사라져 점점 삭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음, 소망, 사랑, 평화, 기쁨, 위로, 용기를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3.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게 하여 돌려받는 삶
그러면 성경에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게 하여 돌려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이것을 잘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들은 길거리에 뿌려졌습니다. 길거리에 뿌려졌다는 씨는 무엇입니까?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이웃에 무관심한 삶속에는 행복과 기쁨의 씨앗은 밟혀 죽어 버리고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길거리에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다 짓밟고 지나가 버리지 길거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길거리에 뿌린 씨앗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입니다. 이기주의, 자기중심, 무관심의 삶속에 아무 씨앗을 뿌려도 그 씨앗은 나지도 않고 행복과 기쁨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무관심하게 사는 것은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길거리에 뿌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남편에게 무관심하고 아내에게 무관심하고 자식에게 무관심하고 부모에게 무관심하고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나만 위해서 이기주의적으로 그리고 내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 씨앗도 돋아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메마른 광야와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마지못해 베푸는 사랑인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보기 때문에 체면상 할 수 없어 억지로 사랑을 베푸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 사랑은 말라버린 사랑이 되고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면 사랑을 베풀지 않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넝쿨 속에 떨어진 씨도 있습니다. 자선과 사랑도 탐욕의 수단으로 삼는 가짜 사랑인 것입니다. 고아와 장애인, 불행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돈벌이 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오직 죽음과 절망만 거둘 따름인 것입니다. 가시넝쿨 속에는 아무런 사랑의 실천도 없습니다. 탐욕을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사랑을 베풀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옥토에 뿌려진 씨는 다릅니다. 진실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베풀 때 옥토에 뿌린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희생으로 이웃을 돌보아 주는 사랑은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선을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옥토에 뿌린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3절에 “야훼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고 했고,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남의 행복과 기쁨을 나의 행복과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옥토에 뿌리는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남이 행복할 때 함께 행복하고 남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남의 행복과 기쁨을 나의 행복과 기쁨으로 여기고 헌신하는 사람은 옥토에 씨를 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살벌하고 불행하고 슬픔이 꽉 들어 찼을 까요? 온 세상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이기주의와 탐욕이 가득하여 오직 빼앗고 움켜쥐고 소유하고 자기만 행복하고 만족하려고 하므로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빼앗고 움켜쥐고 쫓겨난 다음 이 세상은 범죄하고 타락하고 부패하여 모두 탐욕과 이기주의, 빼앗고 움켜쥐는 것으로 꽉 들어찼기 때문에 아무리 움켜쥐고 빼앗고 소유해도 행복과 기쁨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 행복과 기쁨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과 기쁨은 하나님의 전유물입니다. 햇빛은 해에서 나오는 것이지 다른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행복과 기쁨의 광명한 빛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사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하늘 보좌를 떠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섬기고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실천하는 삶을 살 때 진실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우리는 사랑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을 때는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을 때는 모두 마음이 무관심의 길거리 마음이 되고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뿌리는 자갈밭의 씨앗이 되고 탐욕을 위해서 사랑을 베푸는 척하는 가시넝쿨에 뿌린 씨앗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시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베풀면 우리는 행복해지고 이웃도 행복해지고 우리의 삶은 점점 부유하고 풍성해지고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이 이렇게 삭막하고 슬프고 좌절되고 절망적인 것은 물질이 없어 그런 것도 아니고 교육이 없어 그런것도 아니고 환경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져 움켜쥐고 빼앗고 소유만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 남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행복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하려고 희생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을 살리기 위한 모든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사랑 속에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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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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