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4장 16∼18절
십자가 고난은 우리를 향한 ‘도우심’
보혜사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
성령 충만은 곧 예수 충만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손길을 통해서 생존할 수 있습니다. 자라서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지식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만권의 장서를 갖다 주어도 가르치는 선생님이 없이는 그 장서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 부부는 서로를 돕는 배필로 삼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처럼 신앙생활도 보혜사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보혜사란 우리를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란 뜻입니다.
1. 처음 보혜사 예수님
처음 보혜사는 예수님이시고 두번째 보혜사는 성령님이십니다. 아담 이후 인간은 타락의 원죄에서 스스로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 세속에 떨어지고 마귀의 노예가 된 인간은 죄의 종이요, 세속과 부패의 종이요, 질병의 종이요, 저주와 가난의 종이요, 죽음과 절망의 종이 되어 있는데 어떻게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애써도 못합니다. 어떠한 노력과 수단도 우리를 스스로 해방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죄와 사망의 수렁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창세 이후 우리를 해방시켜 줄 때는 하늘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냈는데 이 예수님이 바로 처음 오신 보혜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고 성령은 다른 보혜사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 이가 보혜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목숨을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3년 반 목회생활을 하셨는데 가는 곳마다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병든자를 치료해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를 먹여 주시고 환난에 처한 자를 건져 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 주시며 인간을 돕는 주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를 돕기 위해서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죽어야 되므로 우리를 대신해서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올라 가셔서 몸찢기고 피흘리며 극한의 고통을 당하시면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0절에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합법적으로 죄와 세상과 병과 저주와 사망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해방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해방의 원천이 됩니다.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면 죄에서 해방됩니다. 세속과 마귀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질병에서 고침을 받습니다. 저주에서 놓여남을 받습니다. 사망과 음부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을 얻어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되는 놀라운 축복이 바로 보혜사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세계 제일의 강철 왕 카네기는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빚은 다 갚을 수 있지만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한다”고 말했고, 신학자 칼 바르트는 “나는 공짜로 받았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값을 지불하신 것이 십자가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무 노력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주님께 나와서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를 주시고 예수님 편에서는 몸을 찢고 피를 흘리는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너무 값이 비싸기 때문에 도저히 그 값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햇빛을 값을 치르지않고 받는 것처럼, 공기도 값을 지불하지않고 숨을 쉬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엄청나게 크므로 도저히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값없이 받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외아들을 내어 주시고 예수님은 몸을 찢고 피를 흘리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바통을 인계해 준 것입니다. 릴레이 달리기 할 때 아무리 잘 뛰어도 바통을 전달해 주지 못하면 안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았을지라도 그 보혈의 은혜를 연속적으로 이어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복음이 온천하 만국에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동안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기고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적으로 제한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바람과 같은 영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바통을 받아서 다른 보혜사로서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누리도록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2장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2. 다른 보혜사 성령님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지 아니하셨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땅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2천년 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끝없는 구속의 사역은 성령님이 바통을 받아서 완성되고 있습니다. 성령은 보혜사가 되셔서 온 천하 만국에 가셔서 모든 사람과 함께 계셔서 이것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지구상 어느 곳에도 계십니다. 성령님은 처음 보혜사 예수님의 역사를 품에 품고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보혜사란 의미가 깊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사역에 완전히 동일하지만 다른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는 것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겠다는 말씀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의 임재이고 성령 충만은 예수님 충만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은 완전히 동일하지만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고 성령님은 다른 보혜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놓았어도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깨닫게 해주셔야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호세아는 말했는데 못깨달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밤에 물건을 찾으려고 방안을 아무리 찾아다녀도 못찾지만 전등불을 켜면 바로 발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전등불이 머릿속에 켜지면 영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바로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예수님 안 믿는 것이 죄고, 의인은 예수님은 유일하게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고, 심판은 세상 마귀가 심판 받았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깨달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할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믿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믿어지는 사람도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으면 쉽게 마음속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쉽게 마음문이 열리고 믿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도 없고 아버지를 믿을 수도 없는데 성령이 오시면 마음속에 믿음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믿음을 주시고 인을 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가야 믿음이 자꾸 자라지 성령이 없는 곳에 있으면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진리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감각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이성적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라 계시적인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셔서 믿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 마음을 열어야 마음속에 믿음이 인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속에 와서 놀라운 변화를 입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기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하는 것은 성령으로 우리속에 변화를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같이 우리에게 와서 모든 혼탁한 공기를 몰아내어 주는 것입니다. 황사현상도 바람이 불면 다 사라지고 맑아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바람으로 우리에게 생기로 채워 주시고 성령은 불과 같이 임하여서 모든 더러운 것을 태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주시고 새로운 능력과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변화받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같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셔서 우리가 변화를 받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받기 전에는 기도해도 힘이 없고 전도해도 힘이 없고 신앙에도 능력이 없는데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의 은사를 주시고 방언, 방언통역, 예언도 주시고 믿음, 기적, 병고치는 은사를 주셔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가 나타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역사와 은사를 주어서 하늘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의 생활을 끊임없이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와 주시는 도우미가 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해야될 일과 안해야 될 일, 가야할 곳과 안가야 할 곳을 분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은 우리에게 늘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몸부림치고, 우울증에 걸리는 고통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면 위로를 해주어서 여유를 갖고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위로의 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고 담대하게 고백하므로 기적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입으로 고백할 때 성령은 그것을 다윗의 물맷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말을 물맷돌로 사용하시는 이가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속에 물매가 되어서 우리 입술의 말을 돌로 삼아서 원수 마귀를 쳐서 무너뜨리고 승리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고 한 것처럼 우리는 말씀을 언제나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이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을 물맷돌로 사용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있어도 어떻게 체험하는 바를 모르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회개하고 보혈을 의지하면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의 체험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서 처음 생명을 얻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보혈로 씻음받고 성령이 와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아버지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령이 우리속에 들어오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에 자기 아내를 비웃는 교수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심방을 갔는데 남편되는 교수님이 “목사님, 제 집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데 순복음교회에 나가더니만 기도한다고 아침마다 엎드려서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제가 학생들을 데리고 농촌에 봉사 가서 연설을 하면 동리사람들이 다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아무리 예수를 안믿어도 우리 집사람 보다는 기도를 잘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를 주일에 교회로 초청해 대표기도를 부탁했는데 그 교수는 땀을 뻘뻘흘리며 기도가 아닌 엉뚱한 이야기를 해댔습니다. 나중에 교수가 고백하기를 ‘입이 딱 붙어서 한마디도 안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이 아닌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나요?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중생의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 마음속에 인을 쳐주셔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은 권능의 영으로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충만 혹은 성령침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120 문도가 한자리에 모여서 기도할때 갑자기 하늘로서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집에 꽉 들어차고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이 각사람 머리에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충만, 성령침례를 받으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증거의 능력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안수의 기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역사를 베풀수 있는 힘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 충만을 통해 ‘권능의 영’인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늘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교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보좌에 계시고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 계시고 성령은 지금 세상에 와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자인 것입니다. 성령님을 인격자로 모시지 아니하면 성령이 슬퍼하시고 섭섭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항상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고, 성령과 친교를 나눠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성령님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 의지합니다. 함께 가십시다. 성령님 나를 도와 주셔서 기도하게 해 주시옵소서. 성령님 나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령님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지금 계십니다. 우리 곁에 계시고 안에 계십니다. 바람은 우리 곁에 있고 코를 통하여 우리 폐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하셔서 하나님과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만 할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동역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데 한 사람은 기술을 대고 다른 사람은 자문을 대는 것처럼 우리는 몸을 대고 성령님은 능력을 가지고 우리와 인생동역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함께 하시는 성령님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할때 성령과 함께 의논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짊어지고 책임지고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도우심이 없이 우리는 빈손들고 인생을 행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항상 우리를 돕는 자로 우리곁에 계셔서 동역을 하기 때문에 성령님을 기다리고 성령님의 뜻을 받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동역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한 도시의 목사님들이 모여 유명한 무디 목사님을 초청하여 전도 대회를 하자고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목사님이 반대하며 “목사님은 왜 강사로 무디 목사님만 고집합니까? 무디 외에는 설교자가 없단 말입니까? 그가 성령을 독점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하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존경받는 원로 목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무디만이 성령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무디를 독점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디를 청하는 것은 성령님을 청하는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을 독점하고 계신 것입니다. 점령하고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안에서 하나가 된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옷입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후 50일만에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교회가 탄생하고 온천하 만국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지 않으셨으면 십자가 사건은 온천하 만국에 전파되지 아니했고 구원의 역사도 온천하 만국에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성회를 인도하실 때 강림하신 성령께서 100년 동안 한국에 1200만 성도, 5만 교회가 되도록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49년 전에 불광동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시작한 그 곳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우리를 길러서 서대문에 오게 하시고 여의도로 나오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온천하 만국에 복음을 전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성령없이는 비없는 구름과 같습니다. 성령없으면 물없는 우물과 같습니다. 성령없이는 불없는 화로와 같습니다.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성령충만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성령으로 거듭나고 간절히 기도해서 성령침례를 받아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며 성령과 동역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안에서 깨어지고 회개하고 순종하고 복종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도 성령이 우리눈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공기 없이 사람이 이 세상에 살 수 없는 것처럼 성령 없이 영적으로 살 수 없음을 믿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성령의 감동으로 믿지않는 사람들이 다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구원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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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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