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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은총
2007.04.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 15장 12∼20절)

아담의 타락이후 절망케된 우리 영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으로
온 인류 부활의 은총 입어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얼어붙어 생명의 흔적이 사라졌던 산천에 파란 생명의 화사한 꽃들이 웃는 얼굴을 내어놓는 계절입니다. 그때문에 봄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희망과 기쁨의 노래를 선물합니다. 죽음을 이긴 생명의 찬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다가온 사망은 죄와 세속과 질병과 저주와 영육의 죽음으로 인간을 절망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 성육신 하셔서 아담의 타락의 죄와 그 값을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망을 다 청산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에게 생명의 환희로 우리들에게 벅찬 믿음, 소망, 사랑, 의, 기쁨으로 다가오게 되셨습니다.

 1. 믿음의 부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40주 40야 금식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하실 때 하나님의 능력이 넘쳐났습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복음을 증거할 때 귀신이 쫓겨 나가고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가 낫고 벙어리와 귀머리가 말하고 듣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얻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나님의 능력의 은혜가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다. 메시야다. 이분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할 것이요, 우리들에게 소망을 줄자”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흔들리지 않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3년 반 공생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사로잡히고 안나스와 가야바의 뜰에 가서 수염이 뽑히고 온갖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또 빌라도의 뜰에 가서 심판을 받고 갈보리 산에 올라가서 아무 힘없이 매달려 죽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절망하고 만 것입니다. 철저히 절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렇게 권세와 능력과 위엄이 계시던 분이 이처럼 무력하고 무능력하고 처참하게 죽을수가 있느냐”고 통곡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눈앞에서 죽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좌절과 절망의 검은 먹구름만 그들을 덮었습니다. 사흘이 지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고 그와함께 앉아 음식을 나누고 그의 체취를 맡고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절대절망에서 절대믿음으로 다시 바뀌였습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랐을때 믿음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예수님을 보고 완전히 사라졌는데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 만남으로 말미암아 죽어서 사라진 믿음이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순교란 의미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다 버리고 철저히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보고 그 믿음이 도로 살아나서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시며 우리의 메시야가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없이 순교로써 피를 뿌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다가 순교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제자들의 순교는 더 의미 심장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믿음이 뿌리채 흔들려서 뽑혀버리고 만 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만나고 흔들릴 수 없는 증거앞에 죽은 믿음이 도로 살아나고 그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피를 뿌린 것입니다. 목숨을 구하려고 예수님을 버렸던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완전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부활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도로 찾고 죽은 믿음을 부활시킨 위대한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그 부활은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을 부활시켜 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의심도 다 소멸시키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시며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확실히 믿을수 있는 믿음의 부활입니다.
 어떤 종교도 창설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기초한 믿음이므로 이 믿음은 위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2. 소망의 부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으셨을 때 그리스도를 바라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망의 불길은 다 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캄캄한 밤이 마음속에 다가온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로 20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어서 이 땅에만 살다가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가 죽어 버리고 만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종교라도 아무리 아름다운 윤리와 도덕을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바람이 이 세상뿐이면 믿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영원한 삶의 희망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주셨습니까? 부활하시므로 영원한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훈만 하셨더라면 우리에게 끝까지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세가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환경의 지배를 당합니다.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공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끌어 안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사망의 세력을 멸하고 부활하시므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속에 소망이 불타게 된 것입니다. 소망은 인간이 내일을 바라보는 불빛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이 임하실 강력한 소망을 3년 반동안 가졌었으나 그 소망이 그리스도께서 체포당하고 사형언도를 받고 십자가를 걸머지고 갈보리에 가서 죽으시므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소망의 밝은 빛이 사라지고 캄캄한 밤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3일만에 예수님이 부활하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이런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제자들이 죽은 시체에 기름을 바르러 갔다가 이른 아침에 천사가 내려와서 무덤문을 옮겨놓고 그 무덤에 올라 앉아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로마군인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간다고 가서 소식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여제자들은 너무나 기쁘고 놀라서 뛰어서 제자들에게 가는데 그중에 발이 빠른 막달라 마리아는 가까이 있는 베드로와 요한의 집에 뛰어가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천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막달라 마리아는 또 무덤에 뛰어 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 과연 예수님은 없고 수의만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떠나가고 막달라 마리아만 무덤 앞에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마리아를 보셨습니다. 마리아가 “선생님이여”하며 만지려고 하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아직 나는 아버지께로 가지 아니했다. 빨리 가서 내가 부활했다는 것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부활한 모습을 나타내시고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뛰어가는 여제자들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은 기뻐서 제자들에게 말을 했으나 제자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잘못 보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 제자는 너무나 낙심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낙향하여 엠마오로 가다가 한 나그네와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분이 성경을 풀어줄 때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같이 들어가서 식탁을 준비하고 빵을 들고 축사를 하는데 두 제자가 눈이 번쩍 뜨이고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주님인 것을 깨닫자마자 주님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일어나서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뛰어와서 열 제자들이 모인 곳에 와서 “우리가 엠마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니까 열 제자들이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났다. 안식후 첫날인 주일날 예수님이 우리 모인 곳에 오셔서 평안하라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 예수님을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베드로도 뛰어와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내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늦게 돌아온 도마는 그 말을 듣고 앙천대소를 했습니다. “무식해도 유분수가 있고, 여자들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 나는 예수님이 정말 살아났으면 그 손에 못자국에 손을 넣어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야 믿지 당신들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믿지 않는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날 이후 여드레만에 안식일이 지나고 주일이 되자 도마와 함께 열한 제자가 한방에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보고 “도마야, 내 손에 네 손을 넣어 보아라. 내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아라.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덧붙여 “네가 본것을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다음에 제자들을 디베랴 바다에서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잡았는데 예수님이 나오라고 해서 보니까 이미 불을 피워놓고 빵과 물고기를 구워놓고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베드로의 낙심한 마음을 다시 위로해서 재기시켜 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갈릴리 산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서 교훈하시고 그 다음에는 감람산에서 부활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만나 보시고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는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뚜렷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죽음이 절망이요, 캄캄하지만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영광으로 거듭 나타나므로 그 사람들이 변화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두번 나타났다고 말하는 이가 한 두사람 뿐이라면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거듭 나타나서 당신이 부활하신 것을 증명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믿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그 은혜를 체험한 제자들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변화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 영생 천국 소망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부활의 영광이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한 마을에 꽃파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굉장히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얼굴에는 깊이 주름이 파였지만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파는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할머니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생활도 곤궁하고 외로운데  항상 웃으며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난들 괴로움이 없겠소? 나는 나이 늙어서 자식들도 없고 외롭게 혼자서 살고 꽃을 팔고 사는데 잘팔릴때도 있고, 안팔릴 때도 있고 또 나이 먹었으니 몸이 아플 때도 있고, 안아플 때도 있는데 그래도 내가 늘 웃음을 가질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금요일날 십자가에 못박혀 처절한 절망으로 죽으셨으나 주일날 아침 3일만에 부활하셨지요. 그러므로 나는 항상 내 인생에 고통과 괴로움이 다가오면 ‘3일만 기다리자! 오늘, 내일 고통이 다가와도 3일이 지나면 주님께서 부활한 것처럼 내게 즐거움이 다가올 것이니 절망하지 말고 3일만 기다리자’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할머니가 삶을 살아가면서 고통스러울 때마다 3일만 기다리면 고통이 사라지고 어려움이 사라지고 언제나 희망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절대절망의 고통 중에서도 죽으신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절대믿음으로 행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절망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3일만 더 기다리면 절망이 소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절망속에서도 오늘날 소망으로 부활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기고 일어난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 생애가 어둡고 캄캄하고 얼어 붙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소망이 넘쳐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리아 앤더슨의 노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녀는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흑인으로 미국에 출세해 백인들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엄청난 시련과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많기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문기자들이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이렇게 많은데 희망을 잃지 않고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견디기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언제나 내 시선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만에 부활한 것을 바라봅니다. 백인들이 나를 멸시하고 청중들이 나에게 야유를 하고 달걀을 던지고 할때도 나는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봤습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고 무덤에 들어간 예수님은 결국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니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부활의 소망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멸시와 천대와 차별과 고통을 이기고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오늘 영광의 부활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부활이요, 영원한 승리의 부활인 것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절망도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면 부활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동굴도 예수님이 들어오면 터널로 변화되는 것처럼 캄캄한 절망도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실제의 삶 속에 체험할 수 있는 능력과 영광인 것입니다.

 3. 사랑의 부활

 가인이 아벨을 쳐죽인 이후 인류 역사는 미움과 분노와 살상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인류를 볼때 어느곳에 가나 미움이 있고 분노가 있고 질투가 있고 시기가 있고 살상이 있고 피흘림이 있습니다. 이것을 치유할 능력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마귀는 엄청나게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의 33년간의 생활은 풍찬노숙을 하면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고 로마의 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원수들은 십자가 밑에서 침을 뱉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모욕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은 대꾸하지 아니하시고 협박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원하시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욕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며 사랑으로 기도하고 끝까지 참아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사랑의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값없이 세상과 마귀를 이기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되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값없이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값없이 부활, 영생, 천국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를 저주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사랑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영원한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미움이 예수님께 쏟아져서 엄청난 종교적인 미움과 정치적인 미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주님은 사랑으로 보답해 준 것입니다. 주님은 축복을 해주고 오히려 용서와 의로움, 거룩함과 성결함, 치료, 아브라함의 축복, 부활, 영생, 천국이라는 사랑의 선물을 안겨 주므로 영원히 미움을 극복하고 만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부어주고 은혜를 베풀면 사랑과 은혜는 위대한 부활의 능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겨울이 춥고 산천이 얼어붙고 눈보라가 쳐도 봄이 오면 녹습니다. 봄은 부활의 능력으로 추위를 녹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움이 크고 원한이 깊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조건없는 사랑을 베풀면 원한을 녹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위대한 힘은 없습니다.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세와 능력으로 원수들을 모두다 멸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길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사랑의 표시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이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무력으로 유럽을 정복했으나 지금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죽어가고 있다. 사랑의 예수여, 당신은 칼 한자루 쓰지 아니했으나 지금도 당신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부활은 바로 사랑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영원한 승리의 부활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지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오늘 이 자리에 와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안에 지금 들어와서 부활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캄캄해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푸른 생명, 화사한 꽃같이 우리 가슴속에 피어 오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믿음이 부활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이 부활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 부활합니다. 그리스도는 종교 이상입니다. 교훈 이상입니다. 윤리와 도덕 이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에서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활하고 소망이 부활하고 사랑이 부활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생 전체가 캄캄한 밤에서 밝은 광명으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 얻을수 있는 축복입니다.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것이 되어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이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사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믿음이 부활하고, 소망이 부활하고, 사랑이 부활해서 우리는 새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여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더 나은 우리의 삶, 가정, 사회, 국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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