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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물과 생명수
2007.01.2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장 13∼14절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어

 

 예수님께서 어느 날 사마리아에 가시는데 정오가 되었습니다. 목이 말라 우물에서 물 긷는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나 모두 버리고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정식으로 결혼해서 얻은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매우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을 통해 삶의 의미와 행복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처럼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만 찾지 못해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참 행복과 만족을 찾을 수 있을까요?

 

 1.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앞서 언급한 대로 수가성 우물가 여인은 삶의 환경에서 인생의 가치와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좋은 신랑을 만나 행복한 삶을 얻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꿈을 품고 결혼해서 살아보니 현실은 꿈과 달랐습니다. 맨 처음 결혼한 남자는 아마 돈이 많은 남자였을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하여 이 남자는 끊임없이 시간에 쫓기며 살았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오순도순 밥 먹을 시간도 없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돈을 가지고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좋지 않은 소문들이 나고 속상한 일이 많았습니다. 또한 돈을 벌기위해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며 이런저런 시비에 휘말리는 것도 상당히 고통스러웠습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무지개빛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돈 많은 남자하고 살아서는 아무 희망이 없다. 내가 꿈꾸는 행복이 돈에서 오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그 남자를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환경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돈과 같은 외적인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이 여자는 부자와 영원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은 결코 행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전도서 5장 10절로 12절에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도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드 디너 교수는 2004년 포브스가 뽑은 미국 400대 부호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들의 행복지수는 동토의 땅 그린란드에 사는 사람들이나 케냐 사막의 유목 민족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타임지의 연구 결과도 비슷했습니다. 행복을 주는 요인 중 돈은 14위로 애정이나 자유, 유머보다도 그 순위가 훨씬 아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롭고 총명한 여인은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기 위해 그 부자를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정치가와 결혼했습니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고 박수를 받는 권력을 가지면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치가에게 시집을 가고 난 다음 사생활이 전혀 없어졌습니다. 정치가는 공인이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의 비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옷을 잘 입어도 비평하고, 못 입어도 비평했습니다. 좋은 집에 살아도 비평하고, 좋지않은 집에 살아도 비평하고 모든 것이 비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비난, 시기, 모략, 중상이 끝이 없었습니다. 정치가의 아내로 살아보니 너무나 머리가 아팠습니다.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행복을 찾아 왔는데 행복의 장소가 아니라 권력다툼으로 인한 전쟁터였습니다. 그는 결국 여기에도 행복이 없다고 결론짓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시편 146편 3절로 4절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착하고 조용한 학자와 결혼했습니다. 학자와 결혼하면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잘 이해해 주고, 어려운 일은 상의하며 시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이 학자는 자기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학문하고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항상 서재에 들어가 연구만 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잠깐 이야기 하자고 하면 ‘내일 강의할 원고 작성해야 되는데 왜 귀찮게 하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월급이 너무 작았습니다. 매월 가지고 오는 월급으로 생활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또한 식사시간에 만나 대화를 해보면 세상사는 일에 흥미가 없었습니다. 자기하고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도 마음의 만족이 없었습니다. 꿈과 이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전도서 1장 18절에 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서 12장 12절에도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결국 학자와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밭에 식물을 심고 사는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농부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농부의 아내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혼도 지나지 않아 농사를 짓기 위해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새벽에 일꾼들의 밥을 지어 주고, 짐승들에게 여물을 먹이고, 하루 종일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쉴 틈이 없었습니다. 또한 농산물을 생산해서 판매하는데 농사짓는 비용도 안 나올 때가 많았습니다. 어쩌다가 흉년이라도 들면 정말 말할 수 없이 고생했습니다. 언제 얼굴에 크림을 발라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새카맣게 타고 손도 거칠어져 다 갈라졌습니다. 농부의 아내는 고생만 할 뿐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농부의 아내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를 들으며 바다의 신선한 공기를 맛보고 모래밭 위를 걸으며 신선한 생선을 잡아 먹고 사는 어부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는 행복이 찾아 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폭풍이 불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파도 소리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공포의 소리로 변했습니다. 매일같이 큰 파도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항상 배가 파선되지 않았는지 두려움이 몰려 왔습니다. 또한 생선이 많이 잡힐지 늘 불안하고 물고기의 수확이 불확실해서 생활에 염려가 많았습니다. 팔기에도 부족해 신선한 생선회는 구경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꿈은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안할 뿐이었습니다. 마음에 근심걱정만 쌓이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어부 아내의 삶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2. 삶의 행복을 포기한 삶

 이렇게 남편을 다섯 명이나 바꾸고 나니 너무나 공허하고 아무런 삶의 의욕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상도 없고 꿈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과거가 모든 사람들의 소문거리가 되어 동네를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물 길러 나오지 않는 더운 대낮에 물동이를 메고 물 길러 나오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삶의 행복을 포기했습니다. 부자, 정치가, 학자, 농부, 어부 어느 누구에게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결코 행복은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물을 마시면 또 목말라집니다. 여섯 번째 남편을 거느리고 대낮에 물 길러온 그 여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을 만나는 큰 행운을 얻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 없이는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삼대절망에 처한 존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죄의 절망을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허무와 무의미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시골에서 일하는 아무런 학문이 없는 농부라도 밭에서 일하다 허리를 툭 툭 치고 일어나 ‘후유∼ 인생이 무엇인가. 아침저녁으로 일하다가 죽어서 북망산천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 생활이 반복되는 가운데 머리는 희어지고 허리는 굽게되고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다가도 어느 순간 ‘인생이 왜 이렇게 허망한가’라고 스스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젊을 때는 못 느끼지만 나이가 들수록 허무와 무의미가 삶속에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시편 39편 6절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서도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 자체가 무엇입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인간은 모두다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처해 있습니다. 과거에 온 천하를 휘어잡겠다고 큰소리치던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도 한줌의 흙으로 변화되어 다 떠나갔습니다. 모든 있는 것은 없어지고 존재하는 것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도 다 무(無)를 향해서 줄달음질쳐가고 있는 것입니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따라서 한발자국, 두발자국 죽음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가치 있고 의미가 있다’라고 무엇 하나 드러내 놓을 것 없이 다 지나가 버리고 우리는 허공을 바라보게 됩니다. 인생은 일장춘몽이요, 거품을 잡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죽음과 무의 절망에 처한 존재입니다. 저는 매주 토요일 기도원으로 기도하러 갑니다. 기도하러 가면서 산위의 무덤을 봅니다. 그곳에는 최자실 목사님과 아버님을 비롯하여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 지역장님, 구역장님들이 아무 말 없이 누워 계십니다. 저는 그 무덤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살아서 저와 함께 웃고 울며 신앙상담하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무덤에 들어간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저를 보고 잘 왔다고 말하거나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추억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만일 죽어서 영혼이 없다면 인간의 삶이란 너무나 비참합니다. 짐승은 죽어서 저 건너편을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은 저 건너편을 생각하면서 죽기 때문에 더 비극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90편 4절로 5절에서도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식간에 인생은 지나가고 죽음으로써 우리는 끝이 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는 그 자체가 절망인 것입니다.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만 삶의 절망을 느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과 무의 절망을 가슴에 안고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가슴속에 텅 빈 절망의 공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든 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한 가슴을 안고 사람들은 환경의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을 통하여 찾고 부귀, 영화, 공명을 통하여 찾고, 출세를 통하여 찾으나 지금까지 그런 것들을 통하여 행복을 찾은 사람은 없습니다. 옛 시인은 ‘산 너머 행복이 있다기에 산을 넘어가니 또 저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를 찾아 산을 넘고 들을 달리고 개울을 건너도, 행복은 저만큼 멀리 있고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언제나 허무하게 됩니다.

 1977년 하워드 휴즈라는 미국의 대부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항공 산업의 개척자이자 영화 제작자였던 하워드 휴즈는 억만장자였지만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고독과 공허를 달래기 위해 방탕한 생활을 했고, 건강이 나빠지자 주변에 그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모든 사람을 불신하는 강박장애에 빠졌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독살하려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집에서 요리사를 불러 놓고 주스만 마시고 살았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려 죽었을 때 그의 머리털은 정강이까지 길게 내려왔고 손톱은 매의 발톱처럼 되었습니다. 정신이상이 걸려 죽은 것입니다.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수없이 결혼하고 이혼했으므로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다 재산만 탐했습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고 고독하고 쓸쓸한 사람의 대명사로 세상을 뜨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인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공백이 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거스틴 역시 “하나님,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는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세상 우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말라지는 물웅덩이일 뿐입니다. 우리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지위나 명예, 돈이나 쾌락으로 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야 마음속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우물과 생명수를 잘 선택해야 됩니다. 이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 출세도 모두다 우물물입니다. 하지만 이 물은 자꾸 마셔도 또 목마릅니다. 갈증을 해결할 생수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3. 우물물과 생명수

 요한복음 4장 13절로 1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않으면 언제나 목마릅니다. 돈이 있어도 목마르고 권력이 있어도 목마르고 지위나 명예가 있어도 목마릅니다. 그 목마름은 아무리 세상 것을 바꿔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아무리 남편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어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 우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말라지는 우물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가 터진 웅덩이입니다. 대통령 자리도, 장관 자리도, 재벌의 자리도 모두가 터진 웅덩이입니다. 인간이 만든 지위, 명예, 권세, 부귀, 영화는 모두 다 터진 우물이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허망해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이사야 29장 8절에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는 꿈을 꾸어도 깨면 무엇이 남습니까? 꿈에 물을 마셔도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찾은 행복이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 밖에서 찾는 행복은 다 터진 우물이요 꿈에서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행복은 예수님을 마음 가운데 모셔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로 26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마음 가운데 모셔들이자 마음속에 생명수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내던져 버리고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며 사마리아 시내로 들어가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도 허무했는데 그 분을 만나고 난 다음 마음에 만족과 생수가 강같이 흐르게 되었습니다”고 외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피 흘려 생명수를 터뜨려 놓았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우리는 용서와 의의 생명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거룩함과 성령 충만, 치료와 건강,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 부활, 영생의 생명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로 39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자는 이제 세상의 우물을 찾아가지 말고 예수님을 찾아야 됩니다. 예수님만이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수를 주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은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속에 오신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5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32장 2절에서도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4장 3절에서는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빛과 같이 마른땅의 냇물같이 목마른 자에게 생수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깨닫자 순식간에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고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됩니다. 행복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어도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좌절과 절망밖에 없었으나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깨닫자마자 그 영혼 속에 만족과 행복의 생수가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빛이요, 소망이요, 생수가 되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어야 돈과 권력이 효과가 있으며, 부귀와 영화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것은 다 터진 웅덩이에 불과합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참된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무슨 일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도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히시고 피흘리신 예수께서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의지해서 진실한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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