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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역설
2006.09.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장 8∼10절

질그릇 같은 우리안에 주님을 모시면
가난과 저주의 묶임에서 자유케 되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은혜가 넘쳐나


 기독교 신앙에는 세상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다른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질그릇 같은 인간이라도 그 중심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끝나고 망한 자 같을지라도 주님을 의지하면 결국에는 승리할 수 있는 것이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이 언제나 악을 선으로 바꾸시므로 놀라운 역사를 베푸는 역설적인 은혜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1. 죄가 많은 곳에 용서와 의의 은혜가 넘친다

 역설적인 면중에 가장 큰 한면이 죄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것입니다. 의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아야 될 것인데 성경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자기몫의 재산을 받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받은 재산을 전부 탕진하고 빈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돼지를 치는 일을 하며 돼지에게 주는 음식인 쥐엄열매를 얻어먹고자 하였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런 비참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비로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무능력하고 어리석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탕자가 되어 깨어지고 알게 된 것은 전에 자신이 살았던 것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은혜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은혜가 없으면 한시라도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로 19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라는 말씀처럼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고용해 달라고 아버지께 구하였던 것은 삶의 고통을 통해서 그 실상을 발견하게 된 결과입니다. 고통이 없을 때는 잘난줄 알았지만 고통속에서 모든 실상이 벗겨지자 못나고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내온 모든 과거는 아버지의 은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나갈 길은 아버지의 은혜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고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동네에서 죄 많은 창기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를 풀어서 그 발을 닦고 향유를 부었을 때 바리새인인 시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선지자임을 의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7장 39절에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자가 적은 빚을 탕감받은 자보다 채주의 은혜에 더 감사하고 그를 사랑하리라고 말씀하시므로 더 많은 죄 사함의 은혜가 더 많은 사랑을 낳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양의 바울’이라고 불리는 이기풍 목사는 장안의 소문난 불량배요, 건달이었습니다. 잔칫집마다 찾아다니며 술과 떡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습니다. 1890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모펫 선교사의 집에도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 돌 세례를 퍼붓고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쳐서 입원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원산에 갔다가 또 다른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을 때 순간 그의 머릿속에 모펫 선교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왜 반항 한번 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죄 없는 선교사를 돌로 쳤을까?’ 그는 이러한 생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밤에 꿈속에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나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일이 있은 뒤로 전에 지었던 죄들이 눈 앞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 괴로워하던 중 스왈른 선교사에게 찾아가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였습니다. 스왈른 선교사는 “예수님이 당신을 귀하게 쓰실 징조요, 당신 죄는 예수님이 모두 사하여 주셨소, 그러니 기뻐하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날부터 불량배 이기풍은 전도자 이기풍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나와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가 되었고, 초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7년간 제주도에서 복음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며 교회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그 이후에 호남 지방에서 목회를 하던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받은 옥고로 순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와 선교사를 핍박하였던 청년이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자 오히려 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주의 종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은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면 뉘우칠수록 용서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고 깨달은 은혜를 통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감격적으로 가슴에 사무쳐 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선생이 일평생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에서 허덕이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땅에 사는 동안에 내가 죄를 많이 지어야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깨달으면 깨닫게 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은혜가 넘쳐나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죄 사함의 능력을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러함에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 리스도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게 되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율법의 방망이로 얻어맞은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율법 앞에서 죄의 깊이를 깨달은 사람이 비로소 은혜로 용서를 받고 변화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역설적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병약한 곳에 치료와 건강의 은혜가 넘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다고 성경에 말한 것처럼 건강하면 자기 건강을 의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치료를 구하지도 않고 또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몸이 약하면 병원을 찾아가고 약을 찾는 것처럼 주를 믿는 자는 치료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병고침 받을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치료의 은혜는 우리가 병이 들었을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내가 약할 때 강하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때는 자기의 건강을 의지할 수 있지만 있다가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건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능력되신 주님께 매분, 매시, 매초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한번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주님을 의지하게 될 때 생명의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 건강한 삶을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41편 3절로 4절에 “야훼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야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은 믿음의 번지점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같이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을 도전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병상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을 믿고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가운데 건강한 사람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을 연약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견디지 못할 중한 노동을 주님께 의지할 때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되고 건강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고된 여행이라도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그 여정을 마칠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형언할 수 없이 몸이 약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한 몸을 돌아보고 주님께 나와 육신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였으나 응답받지 못하고 두 번째 주님께 매달렸어도 응답받지 못하고 세 번째 주님께 나와서 ‘주님, 나의 몸을 건강하게 해주셔야 내가 주님 섬길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서 병약했던 바울은 주님을 의지하고 온천하 만국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로 27절에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극한 환경속에서도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평강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강건함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함으로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주님의 능력으로 살았던 바울처럼 오늘날에도 이와같은 역설적인 의미가 우리 크리스천들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1967년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 여사는 굉장히 인물이 못났습니다. 비록 얼굴은 못났을지라도 메이어 여사는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을 튼튼한 국가로 세우는 놀라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고 난 다음 자서전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얼굴이 못난 것이 다행입니다. 나는 못났기 때문에 기도했고, 못났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런 나의 약함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못나고 연약한 나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메이어 여사가 자기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지하여 훌륭한 총리로서 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 안에서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역설적인 말씀으로 너희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히려 우리의 약한 것을 자랑하고 내가 약함으로 주님께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통하여 강한 능력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가난한 곳에 부요와 형통의 은혜가 넘친다

 또한 우리 신앙이 역설적인 것은 내가 가난할 때 부요하다는 것입니다. 배고픈자가 음식을 찾고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것처럼 가난하기 때문에 부요하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돈있고 부요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을 찾고 또 의지하고자 합니다. 제가 1958년에 불광동에서 개척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환경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해주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 교회에 나왔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기복신앙을 말한다고 비난하지만 가난에 처한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와 불우한 이웃을 섬기는데 잘 사용한다면 물질의 복은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아서 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위해서 쓴다면 복은 우리에게 해가 되고 독이 되지만 받은 복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축복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축복을 받아야 하나님의 사업도 하고 축복을 받아야 이웃사람들을 도와 줄수도 있고 기부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차고도 넘치는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상 2장 7절로 8절에 “야훼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야훼의 것이라 야훼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난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빈손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훗날에 그는 가나안에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24장 35절에 “야훼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라고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아들 이삭은 어떠했습니까? 창세기 26장 12절로 14절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야훼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외삼촌 집에 갈 때 지팡이 하나만을 들고 갔지만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일하며 그가 돌아갈 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큰 거부가 되어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32장 10절에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을 잘 섬기며 헐벗고 굶주림에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성경적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합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복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돌보며 헌신하는 삶을 통해서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지어졌을 때 에덴은 모든 것에 부요하고 아름답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창세기 2장 8절로 9절에 “야훼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야훼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동산에 가난과 저주가 오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하므로 저주를 받은 결과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류에게 가난과 저주가 왔지만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몸찢기고 피흘리심으로 아담이 가져온 모든 저주를 청산해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박사 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2003년 2월 7일 국민일보에 게재된 춘천시 서면에 관한 기사로 서면은 원래 춘천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입니다. 그러나 지리상으로 춘천에서 멀지 않지만 강을 두 개나 건너야 하기 때문에 외진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역은 농토가 적고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지만 1954년 금산리에 금산교회가 설립되고 복음이 전파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유교적인 전통으로 체면과 의식을 중시하던 주민들의 기질이 복음을 듣고 난 이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바뀌어지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금산교회의 홍순우 목사는 서면이 발전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교회를 통해 받아들인 복음과 새로운 사고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명 ‘박사 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는 서면은 현재 박사학위 취득자를 78명이나 배출하였습니다. 조그마한 동리에 78명이 박사학위를 받음으로 전국 면 단위로 가장 많은 박사가 그곳에서 나왔고 그외에도 초·중등 교장급 이상 교육자가 71명, 국회의원이 3명, 군수가 5명, 법조인이 6명, 교육감이 2명, 5급 이상 공직자도 60여 명, 그리고 목사도 10명이나 나오게 된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므로 변화된 결과입니다. 우리 자녀들과 모두가 복받고 잘사는 것은 예수 잘믿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단과 방법으로 노력을 해도 하나님이 복을 안주시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도 비가 안오면 말라죽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늘문을 여시고 복을 주셔야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열매를 맺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인생이 역설적으로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판도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절망을 축복과 소망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대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믿음으로 새로운 말을 하게 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죄많은 곳에 은혜가 넘쳐나고 병든곳에 치료와 건강이 넘쳐나고 가난한 곳에 축복과 부요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통해서 역설적인 일을 행하시므로 악을 선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세상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계획들을 감사하며 찬양하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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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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