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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기다림
2006.09.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로마서 4장 17∼21절

말씀 위에 세워진 믿음으로
주안에서 인내하고 기다리면
하나님 정하신 때에 응답하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그 자체가 응답이 아니라 실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이란 헬라어로는 ‘휘포스타시스’인데 밑에라는 ‘휘포’와 받침대로 받친다는 ‘히스테미’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복합언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응답을 얹어놓는 밑받침대라는 것입니다. 화병의 꽃이 응답이라면 믿음은 그 화병의 꽃을 얹어놓을 받침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믿음 자체는 응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밑받침대가 예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그 위에 얹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받침대를 준비하고 난후에 응답을 얹어주시도록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고 기다릴 때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응답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1. 믿음이란 말씀 위에 서는 것

 믿음은 합리적인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큰 낭패에 부딪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의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초월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좁은 이성이나 과학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말씀을 통해서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느낌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의 느낌은 항상 변합니다.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평안하거나 불안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분이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일 뿐 이것 때문에 환경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느낌에 서서는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 믿음은 헤엄 칠 수 있다”고 말했고, 교부 터툴리안은 “불합리한 고로 나는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파스칼 역시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 믿는 자의 하나님이다. 신앙은 인간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이란 합리적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말씀위에 서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감각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감각을 극복하는 것이지 감각에 따라 믿음이 좌우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시고 나사로의 무덤가에 갔을 때 이미 나사로는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죽은지 나흘의 시간이 흘렀고 썩은 냄새가 납니다. 우리의 감각은 나사로가 다시 살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각에 의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은 “마르다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심으로 믿음은 우리의 감각과 상관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불확실한 환경을 따르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갈 때의 환경은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캄캄한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말씀 위에 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 그리고 감각이나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이 있으면 말씀이 우리가 처한 어두움에 빛이 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도 말씀이 등불이 되고 우리의 의지할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포위되어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담고 전적으로 말씀위에 서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믿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아는 것과 믿음을 선택할 때 아는 것을 버리고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100세가 되어 머리가 희고 눈은 침침하였습니다. 굽은 허리로 거동할 때는 지팡이를 의지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기력이 쇠약해지고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늙은 노인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아내 사라도 주름 투성이의 얼굴에 몸에도 뼈에 가죽만 남아 있는 형편없는 모습입니다. 나이가 아흔살이 되었으므로 이미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아무리 쳐다봐도 로맨틱한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 자기가 자녀를 생산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아는 지식에 의지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 20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도 의심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이 여든 다섯 살에 하나님이 그를 밤중에 불러내어 하늘에 별들을 헤아리게 하시고 너희 자손이 이와같이 많으리라는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들어와 그만 하갈을 첩으로 취하므로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지만 의심도 그의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의심을 오랫동안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는다고 해서 의심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의심이 들락날락하여 밀물같이 들어왔다가 썰물같이 쫓겨나가는 일이 반복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의심이 들어올때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의심을 쫓아내고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어 의심의 모든 열매를 뿌리채 뽑아버리고 다시금 진실한 믿음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의학적인 치료를 통해서 병든 사람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이미 사망하여 피가 썩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4분 이상 숨을 안쉬면 뇌세포가 죽어서 살아나도 식물인간이 되는데 죽은 인간을 살리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의 종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이와 같이 산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고 아이와 함께 내려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9절에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잿더미에서 이삭을 도로 살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로마서 4장 21절로 22절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수시로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치 않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녀, 노유, 빈부, 귀천할 것 없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므로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확실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기대와 기다림을 동시에 가졌습니다.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금씩 의심이 들어왔을때도 있었지만 바로 회개하고 하루 이틀도 아닌 25년의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100세에 독자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당장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모세는 무려 40년을 기다려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21년 동안 머슴살이를 한 후에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10년의 세월동안 종살이를 했고 3년 동안의 감옥살이 한 이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 쉽게 낙심하지 말고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시편 130편 5절에 “나 곧 내 영혼은 야훼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바로 일이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세상일이 기다린다고 해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믿고 기도하는 중에 끝까지 기다리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자가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급함으로 낙심하고 뒤로 물러가면 아무 것도 안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니 천사가 안내하였습니다. 안내중에 어떤 방에 들어갔는데 포장한 소포가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소포가 이렇게 많습니까?”라고 물으니 천사가 대답하기를 “많은 예수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서 우리들이 응답의 소포를 들고 갔지만 이미 이사를 가버리고 없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낙심하여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포를 도로 가져와서 지금 창고에 전부 쌓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많은 기도를 응답하실지라도 마지막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성도들은 응답을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어떻게 믿을 것인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될 것은 믿음 그 자체가 응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는데 왜 응답이 안옵니까? 믿었는데 왜 병이 안나요? 십일조도 드리고 성수주일하고 믿었는데 왜 당장 복이 안오나요? 내가 가족구원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왜 구원을 안주시나요?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믿음이란 눈에 안보이는 집의 기초와 같습니다. 기초가 완성되어야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완성해 가는 기초와 같은 것입니다. 집은 하나님이 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81편 10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입은 우리가 열어 놓고 채우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입이 응답이 아닌 것처럼  믿음 자체가 응답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말씀으로 언제나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워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느낌이나 감각이나 환경을 통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때 부정적인 생각이 둥지를 틀도록 내버려 놓으면 안됩니다. 어떠한 일에도 부정적인 생각이 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쳐들어 오는 대적들을 막아야 되고 또 물리쳐야 합니다. 이때 우리의 무기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싸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침노하는 것은 전쟁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굳게 서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말씀을 자꾸 입으로 시인하고 말씀을 의지하여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고 말씀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기대어 의지하고 말씀과 함께 하면 믿음에 굳게 설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이루어진 모습을 늘 바라보고 꿈꿔야 합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우리는 마음속에 꿈과 상상력을 통해서 이해합니다. 누가 하늘을 말한다면 낮에 해가 떠있고 밤에는 달과 별이 있는 상상을 하며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을 상상속에서 이루어 갑니다. 자기가 알든 모르든 무슨 말을 들으면 곧장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날개가 펼쳐집니다. 사람은 언제나 상상으로 자기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려면 우리의 삶 가운데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바라보고 상상하고 꿈꿔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되어 세상의 더러움이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상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병고침을 받아서 강건케 된 모습을 꿈꾸고 상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을 받아서 이웃에게 구제하고 풍족한 삶을 사는 모습을 상상해야 합니다. 사람은 상상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 세계를 이해하므로 우리가 믿음에 굳세게 서는 삶을 살려면 언제나 말씀위에서 긍정적인 꿈을 꾸고 상상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에 서는 것 뿐만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진 모습을 마음속에 늘 바라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산위에 올라가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보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3장 14절로 15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고 “저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고침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뱀에 물려서 죽어가면서 장대에 매달려 있는 놋뱀을 바라 보았을 때 이미 심판을 받은 불뱀이 우리의 생명을 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자 모든 독은 해소되고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사 우리의 연약한 것과 모든 질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의 묶임들이 풀린 것을 상상할 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를 짊어지고 가셨으니 우리가 저주에서 놓여난 것을 상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옛사람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된 것을 상상하고 꿈꿀 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에스겔 12장 28절에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야훼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야훼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이사야 55장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이루어진 모습을 항상 마음속에 꿈꾸고 상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올바른 생각을 하고 꿈꾸지만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생각은 긍정적으로 하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꿈을 꾸고 마음에 믿기로 결심을 하지만 말로써 다 부인해 버리고 말로써 패배자가 되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바 되었다 했으니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항상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믿음의 말을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믿음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람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뜻인‘아브라함’으로 ‘사래’는 ‘많은 자식의 여주인’인 ‘사라’로 이름을 바꿀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으로 하는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귀신를 쫓아내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긍정적이고 꿈과 믿음을 가졌으면 그것을 말로써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믿음을 따라갈 때 단호하게 믿어야 합니다. 믿기로 결단을 내리고 믿음으로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욥은 고통중에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신실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재산을 전부 잃고 10명의 자식들은 같은 날 비명횡사하였습니다. 온몸이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아내도 떠나가고 친구들조차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였어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1장 21절에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야훼시요 거두신 이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항상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감사하고 지금 없는 것이라도 주실 것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찬양을 하는 삶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골로새서 2장 7절에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감사하는게 아니라 넘치도록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기다리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디다고 믿음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믿음으로 즉시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오랫동안 기다려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고 기다렸던 것처럼 끝까지 인내로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믿음 그 자체가 응답이 아니라 믿고 난 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초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을 받침대삼아 믿음 위에 응답의 화분을 올려주실 때까지 오래참고 기다리며 바라봄의 법칙으로 감사하고 찬미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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