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야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편 118편 5∼7절
사망의 골짜기에서 고통가운데 있을 때
내편 되시는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원수에게 보응하시고 평안으로 채워주셔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은 은혜 받은 간증이 있습니다. 평탄한 신앙생활보다 거센 삶의 풍랑을 당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역사를 더 생생히 체험하고 간증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그 당시에는 괴롭지만 지나고 보면 큰 은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1.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시편 기자는 첫째로,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으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 처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평안하면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고통이 적으면 적게 기도하고 고통이 많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환경적 고통은 결과적으로 마음의 고통으로 직결됩니다. 고통은 삶의 터전, 명예, 생명을 빼앗길 것이라는 마음의 불안과 공포로 나타납니다. 극심한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다가올 때는 온 생명이 지옥불에 타는 것같은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9절에 “야훼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통이 다가와서 마음에 근심이 오면 눈이 어두워지고 영혼은 좌절과 절망에 휩싸이고 몸은 병들어 쇠약해집니다. 이런 절망적인 고통에 처하게 되면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고통중에 몸부림치다가 멸망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약하고 나태한 신앙상태에 빠져 있을지라도 고통을 통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우리를 신앙의 잠에서 일깨워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입니다. 시편 40편 17절에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말씀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 중에 빠진 사람들을 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또 건지기 원하시는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통을 통과할 수 있고 또한 고통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떡을 구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여행중인 친구가 헐벗고 굶주린 채로 늦은 밤에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친구를 대접할 떡이 없는 주인은 이웃한 친구에게 떡을 빌리러 갔습니다. 밤중에 이웃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어리만 빌려달라고 했을 때 대답하기를 “나와 애들이 이미 일을 다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어와서 자고 있으니 지금 일어나서 떡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을 구하는 이 사람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떡을 빌려달라”고 강렬하게 부르짖었습니다. 그 간청함으로 인하여 이웃한 친구는 일어나서 떡을 주면서 “당신이 친구이기 때문에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간청함으로 떡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1장 8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간청하는 기도를 하기 원하십니다. 뒤로 물러나지 않고 강하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16편 3절로 4절에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야훼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야훼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여 주십니다.
현 시대에 큰 변화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용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소곤소곤 기도합니다. 부르짖으며 기도하고 애타게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예전 사람들이 체험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귀가 어둡지 않는데 왜 고함치고 부르짖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귀가 어두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시므로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을 당하므로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면 내가 응답하겠고 너를 건져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34편 6절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야훼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체험을 돌아보더라도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응답해 주셨습니다. 고통이 다가오고 심해지면 육체적이고 환경적인 고통보다도 마음이 당하는 번뇌와 고통이 더 격심해지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격한 마음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갈 때 금이나 은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마음의 평안입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보다 더 값진 것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안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이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29편 11절에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복중에 복이 평안한 마음입니다. 평안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잠시있다 사라지는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 평안을 통해서 절망에 처한 환경이 소망이 넘치는 환경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먼저 역사하시고 그 다음 우리 환경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사람들은 환경에 평안이 오면 내 마음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 부르짖고 기도해서 마음에 불안, 공포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면, 그 평안을 따라 기도할 때 가정과 환경이 변화되고 우리의 생활이 점차 변화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평안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마음의 확신과 평안이 있으면 불을 통하고 물을 통해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시편 116편 8절에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평안이 오고 그 평안과 함께 기도할 때 주님은 능력을 주셔서 사망에서, 눈물에서, 넘어짐에서 건져주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주님께 부르짖으면 큰 평안을 체험하게 되고 이러한 평안 가운데 더 나은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자는 고난과 역경이 더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르짖지 아니하면 역경은 우리를 파멸시키지만 부르짖으면 역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2.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둘째로, 시편 기자는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시니 내가 두려워 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사람이 내게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내편이 되십니까? 야훼 하나님께서 내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실 때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피가죽을 베어서 할례 받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증표였습니다. 창세기 17장 10절에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우리에게 주시고 이것이 너희와 맺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통하여 언약을 맺었지만 오늘날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이 언약은 할례의 언약보다도 수천만배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언약입니다. 할례의 언약을 통해서도 강하고 담대했거든 하물며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할례의 언약을 굳게 믿었던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7세 정도의 초립동이 어떻게 골리앗과 같은 장수를 대항해서 싸울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직접 본적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도 못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규례에 따라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므로 하나님이 항상 자기와 함께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의 언약을 통해서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36절에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이 내편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언약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할례의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맺어진 언약으로 성령을 통해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셨으면 우리도 하나님편에 설 수 있도록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은 어떠한 어려움에 처했어도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를 질곡에서 건져 주시고 높여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7절에 “야훼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코리 텐 붐 여사는 나치 수용소에서 무려 40일 동안이나 독방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죄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독방에 갇히는 형벌이었습니다. 독방 안에서는 자유로이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40일 동안 앉아있는 것입니다. 머리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 갇히는 형벌인 것입니다. 독방에 24시간 쪼그리고 갇혀있는 것이니 40일 정도 독방에 갇혀지내면 대개는 정신병자가 되어 나옵니다. 맑은 정신으로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코리 텐 붐 여사도 독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얼마나 힘이 들던지 나중에는 믿음도 사라지고 인내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는 이제 견딜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버틸 힘이 전혀 남지 않았습니다. 믿음도 전부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마침 눈 앞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다가 바닥의 물을 피해서 벽 옆에 난 조그마한 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코리야, 저 개미가 보이느냐? 개미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네, 하나님! 작은 틈으로 피해서 가고 있어요” “그래, 너는 지금 피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바로 너의 피난처니라. 이제 나를 향해 오너라. 내가 너를 품어 주마. 너는 내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함을 받을 수 있으니 나를 바라보라” 그래서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독방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 개미가 벽에 난 틈에 들어가서 피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품에 내 자신을 맡기오니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러자 하나님의 임재가 코리 텐 붐 여사의 마음속에 임하였습니다. 놀라운 평안이 마음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루 하루가 평안이요, 기쁨이요, 행복의 연속이었습니다. 간수들은 코리 텐 붐 여사가 독방에 있는 동안에 미칠줄 알았는데 더 평안하고 기쁨이 충만해진 얼굴로 나온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감내할 수 없는 일도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편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편 되심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시편 27편 1절로 2절에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중심을 점령하면 두려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의 중심에 자신이 앉아 있으면 두려움이 임하게 됩니다. 자기의 중심에 세상이 들어오면 세상으로 점령되기 때문에 두려움만이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중심에 하나님이 점령하고 있으면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뱅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섬기면 다른 것이 무섭지 않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만사를 두려워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6절에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희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시리라. 저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람도 내게 어찌할 수 없고 환경도 나를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오고 내가 무서워 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전에 우리 마음속에 격렬한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환경을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두려움을 갖다 주고 마음에 극심한 번뇌와 고통으로 좌절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내편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편인 것을 알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있으면 어떠한 어려움에도 우리는 승리하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야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셋째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내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또는 국가적이든 원수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자 중에 계신 것을 알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십니다. 시편 56편 9절에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시므로 원수들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평안하게 잘 살게 된 것은 한국전쟁 중에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듣고 이 문제를 UN 안보리에 회부했습니다. 당시 상임이사국은 미국과 자유중국과 소련, 프랑스, 영국 총 5개국으로 이 중에 한 나라만 반대해도 UN군은 파견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을 침공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독려했기 때문에 소련은 UN 안보리에서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UN군 파병을 반대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각종 전쟁물자를 대주어서 북한의 남침을 도왔던 소련이 UN 이사국에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간동안 기적같은 일을 진행하셨던 것입니다. 마침 그때는 소련의 스탈린이 휴가를 떠난 기간이었습니다. 휴가를 가면서 “일절 내게 연락하지 말라. 나는 주말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귀찮은 전화는 원치 않는다”라고 엄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UN의 소련 대표 제이콥 말리크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스탈린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불참을 했고 기권한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찬성함으로 안보리 결의가 통과되어 우리나라에 UN군 파병이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시편 59편 10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을 보응하심으로 하나님은 UN 16개국을 통해서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순간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대한민국 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 한국에 기독교 신자들이 100만도 안되었는데 지금은 1200만 성도와 5만교회, 그리고 10만 주의 종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은 100번이고 1000번이고 더욱 우리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서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편에 서신 하나님은 지팡이를 통해서 길을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시편 37편 39절로 40절에 “의인들의 구원은 야훼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야훼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편에 서 계시면 어떤 불안과 공포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원수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매일매일 승리와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언약을 통해서 우리 편에 계시므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안에서 영혼이 잘 되고 평안하고 강건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자나 깨나 항상 하나님을 우리의 중심에 모시고 섬기며 예배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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